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04화 (104/200)

# 104

104. 워프핵 (4)

아바는 도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용돌이에 갇히게 되면 그게 무엇이든 살아남을 수 없다.

생명이라면 혈액이 반응해 터져 죽으며, 무생물이라면 소용돌이의 힘에 찢겨 죽는다.

반대로 그녀는 소용돌이에 죽은 생명을 흡수해 소모한 생명을 보충하고, 남은 생명은 그녀의 힘이 된다.

그 생명이 인간에 가까울수록 흡수하는 힘도 많았다.

강해질 수 있는 지름길.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이 역겹고 경멸스러웠다.

기생충 같아서.

현실은 달랐다. 그 힘 덕에 빠르게 4급으로 오를 수 있었고, 미국에서 가장 핫한 리암 루카스와 미국 헌터 협회장인 와이어트 콜튼과도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류 헌터로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최악의 상황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더라도 오히려 자신은 살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리고 더 강해지겠지…….’

눈엣가시 같은 한국의 헌터를 재물 삼아 헌터의 질을 높인다.

그게 목적 중 하나였다.

만약 도현을 미국으로 귀화시키지 못하더라도, 3급이라면 자신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었으니까.

그게 잘못된 정보라는 게 문제였다.

미국에서도 자신을 버렸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스킬을 쓴 것이다.

도현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명은 뿌린 그대로 사라지게 되니까.

자살 방법이었다.

그런데…….

소용돌이에 갇혔던 도현이 갑자기 검지 끝을 씹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얼마 되지도 않는 핏방울 3개가 날아오르더니 소용돌이에 흡수되었다.

‘커헉!’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이 느껴지면서 몸이 튕겨 나갔다.

몸이 튕겨 나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용돌이가 사라져야 사람의 몸으로 돌아왔으니까.

스킬을 생각대로 움직일 수도, 끝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몸을 가득 채우는 이 힘. 감각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주변 20킬로미터, 웬만한 광역시만 한 곳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알 수 있었다.

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힘.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의 절반도 가능할 것 같았다.

행방불명된 1급 노아 이선도 우스울 것 같은 이 힘.

고작, 피 3방울이었다.

‘미… 미쳤어…….’

몸이 떨려 왔다.

두려움이 아니다. 환희였다.

그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피에 대한 생각이었다.

보기만 해도 역겨워 속이 더부룩했는데, 그의 핏방울을 생각하면 할수록 침이 넘어갔다.

그렇다고 갈증을 느낀다거나 먹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에 추가된 정도.

정말 뱀파이어가 된 걸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몸을 덮는 부드러운 담요가 느껴졌다.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벌게진 민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경기 일으키듯 흠칫거리는 그와 달리 아바는 움찔거리는 게 전부였다.

도현이 말했다.

“그 정도면 어딜 가든 죽을 일은 없겠지.”

‘설마… 지금 날 걱정해 준 거야……?’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아는 뉘앙스였다.

그 땅에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꼭 가야 했다.

곧 부모님의 기일이니까.

세상이 변하며 혼자 살아남은 자신이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속상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갔다가 다시 와.”

“왜요……?”

“여기가 집이잖아.”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얼굴을 숨기려 담요를 뒤집어쓴 아바는 미약하게 땅의 울림을 느꼈다.

쿠륵, 쿠르르륵!

슬쩍 담요를 젖혀 보니 화산이 용암을 질질 흘려 대고 있었다.

놀란 크로아들이 발을 굴렀다. 가까운 하리오카 숲과 타이탄 레인보우 지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놀란 토토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도현은 눈앞에 뜬 메시지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크로아의 서식지가 ‘아홀로틀 더미’의 워프핵을 흡수했습니다!]

[크로아의 서식지가 확장합니다!]

[경고! 주변 지역에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크로아의 서식지 위치를 변경하시겠습니까?]

‘예.’를 누르기 무섭게 농장 지도가 떴다. 스케치북 2개를 늘어놓은 듯한 크기.

자잘한 점선이 찍힌 모눈종이 위가 먹칠한 것처럼 검었다.

그 중심에서 남서쪽에 자리 잡은 농장.

터치하자 그 부분이 확대되며 한눈에 들어왔다.

‘뭐 이렇게 넓어?’

2천 명이 넘게 사는 인어족 마을이 엄지손톱 크기인 것을 봐선 넓힌 땅이 꽤 된다는 소리인데.

아무래도 머릿수가 많으니 개척으로 돌릴 여유가 있었나 보다.

그 예상이 맞기라도 한 듯 동서남북 방향으로 움직이는 인어들이 보였다. 펜으로 콕 찍은 점처럼 보이는 그들은 부스러기를 갉아 먹는 개미처럼 조금씩, 조금씩 지도를 밝혀 가고 있었다.

도현은 인어족이 밝혀 가는 땅 주변을 훑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북쪽. 바위들만 가득한 지형이 눈에 들어와서다.

그 자리에 크로아의 서식 지대를 옮기자,

[땅을 개척 중인 밤의 인어족에게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밤의 인어족을 불러들이겠습니까?]

소환과 자리 지정으로 두 번 연속 ‘예.’를 누르자 가까이 있던 화산과 바위산들이 키보드의 Delete 키를 누른 듯 사라졌다.

[크로아의 서식지에 아홀로틀이 나타납니다!]

[아홀로틀이 환경에 적응하며, 화산 아홀로틀로 진화합니다.]

[크로아의 서식지가 화산 지대로 변경됩니다]

‘이런 방법도 나쁘지 않은데?’

부수어 없앨 생각을 했었는데, 재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줄이야.

절대 예감을 벗어나지 않는 토토의 행각에 다시 감탄하며 도현은 턱을 쓸었다.

지도를 끄자 화산이 있던 자리가 휑해지더니 저 멀리, 헌터라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거리에 바위들이 들썩이며 땅이 쪼개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붉은 용암이 끓어오르는 화산이 불쑥 솟아올랐다.

동시에 인어족 마을에 소환된 인어들이 허둥대며 놀라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다 도현이 있는 곳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 바닥에 엎드리며 절을 올렸다.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압빠… 재송해요 예쁜 거 떠러트려써……. 근데 땅이 머것써요, 사라졋써! 하산도! 크로아도… 재송해요, 미안해요…….”

헐레벌떡 도현의 어깨로 올라온 토토가 고개를 푹 숙이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도현은 말없이 토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저 멀리 떨어트려 놨어.”

“멀리? 어디, 어디?”

도현은 토토를 머리 위로 올려 화산 쪽으로 몸을 틀어 줬다. 확인한 토토가 와아, 감탄하더니 손뼉을 쳤다.

“도마뱀 이써! 빨개, 불타올라! 싱기해!”

거기까지 보일 줄은 몰랐네.

다시 어깨에 내려놓으니 바동거렸다.

“토토, 하산 놀 꺼얏! 가고 시퍼!”

“안 돼. 밥 먹어야지.”

“한 번만! 쪼금, 쪼금만 놀다 오께!”

“안 돼.”

달래는 건지, 야단치는 건지 모를 말만 반복하던 도현은 다시 쿵쿵 울리는 땅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라타스를 타고 급하게 달려오는 모르달이 보였다.

“도, 도련님! 화산이! 화산이!”

“시끄러워.”

바로 입을 닫아 버린 모르달은 민혁과 눈으로 대화하고 아바를 봤다가 경기를 일으켰다.

“뭐, 뭐, 뭠까욧! 아바 아씨, 어떻게 된 검까욧? 설마 아까 붉은 소용돕…….”

도현이 모르달의 주둥이를 잡고 말했다.

“밥 먹자. 모처럼 농장에 왔으니까 아껴 뒀던 고래나 먹어 볼까?”

그 말에 두 펫은 화색이 되었다.

“고래 꼬기! 꼬기! 조아!”

“웁웁웁! 우웁웁! 우우우웁!”

“진짜?”

민혁까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좋아했고, 아바는 붉게 홍조 띤 얼굴을 담요로 가리며 좋아요, 라고 중얼거렸다.

***

축제가 시작되었다.

화산이 사라진 드넓은 맨땅은 비좁아 터질 지경이었다.

공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검은 고래, 오르오타의 사체와 그 주위에서 부산을 떠는 인어족은 마치 거대한 사탕에 달라붙은 개미 떼를 연상케 했다.

도현은 반나절 만에 꺼낸 시겔로로 고래를 썰고 있었다.

한껏 성질을 부려 댈 줄 알았지만, 어제의 영향인 듯 존재감은 일반적인 칼과 다름없었다.

칼질 한 번 할 때마다 머리와 꼬리가 잘리고, 내장이 정리되었다.

남은 몸통을 고기 자르듯 덩어리로 텅텅 갈라 내니 그 크기만 해도 2킬로미터에 달했다.

고기 다듬으랴, 터져 나오는 핏물 청소하랴, 생각지도 않은 고래 몸속의 기생 몬스터들까지 정리한 도현은 인상을 구겼다.

양이 많아 좋긴 한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서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마나를 다루던 몬스터라서 그런지 머리에서 주먹 크기의 주황빛 마나석이 발견됐다.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아는 휘르카는 잠깐 슬픔에 잠겼다.

그 마음을 아는 도현이 휘르카에게 마나석을 주려고 하자 그는 거절했다.

“도현 님께서 좋은 곳에 써 주십시오.”

희미한 웃음을 짓는 얼굴은 차라리 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나석을 손에 쥔 도현은 주변을 훑었다.

시끌벅적한 게 목소리를 꽤 높여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소음이 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즐거워 보였다.

빙판 위에서 벌어졌던 축제가 다시 펼쳐진 느낌.

아바는 몸에 착 달라붙는 헌터 웨어를 입고 인어족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을 본 그녀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과 날카롭게 변한 송곳니에 놀랐지만, 곧바로 적응했다.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변한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민혁은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구워지는 커다란 고래 고기에 집중한 상태였다.

“2등급 마나석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아바였다.

통통 튀는 목소리에 뱄던 적의는 해맑게 변했다.

늘 불만이나 짜증만 서렸던 얼굴도 무척 편안해 보였다.

빠르게 적응하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예쁜 거! 압빠! 토토 가꼬 시퍼!”

아바의 목소리를 들었나 보다.

묘하게 마력이 실린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감미로워 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후다닥 달려와 어깨에 앉는 토토에게서 맡아 본 술 냄새가 풍겼다.

마침 모르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헤픈 느낌이, 벌써 인어족과 술판을 벌였나 보다.

토토도 거기에 끼었다가 마나석이란 소리에 온 거겠지.

토토의 눈이 반짝였다.

3등급 워프핵을 볼 때보다 더 황홀한 얼굴이었다.

“이건 안 돼.”

“잉, 잉! 압빠! 토토 져!”

도현은 말 대신 마나석을 인벤토리에 넣어 버렸다.

꽥꽥 소리 지를 줄 알았던 토토는 시무룩해져 흥칫뿡, 이라며 쌩하니 모르달 옆으로 가 버렸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 도현은 웃고 말았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도현은 깔끔하게 생각을 지우고, 여기저기에서 절로 구워지는 고래 고기에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데 신기하게도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그가 마법으로 굽고 있는 상태였다.

크고 두꺼운 만큼 불을 피워 구워 봤자 겉만 타고 속은 익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구워지는 것이 네 덩어리, 삶아지는 것이 두 덩어리.

바다의 기온 때문인지 현실의 고래 고기에 비해 지방층이 3배나 두꺼웠다.

그래도 소나 돼지에 비해 느끼하지 않다고 하니까.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 못해 배가 터질 만큼 많은 양이었다.

치이익, 치이익-!

익어 가는 고기에서 줄줄 흐르는 기름이 뜨거운 열기에 타들어 가는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즐거웠다.

고소한 기름 냄새까지 얹히자 그렇지 않아도 곡소리를 내는 배 속 때문에 당장에라도 달려가 잘라 먹고 싶었다.

도현뿐만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고래 고기보다 맛있겠죠?”

옆에서 입맛을 다시는 아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들이 있었다.

사락, 사라락.

바람을 타고 흘러간 냄새에 주변의 몬스터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단지 도현이 주인이니 멀찍이 떨어져 훔쳐보기만 할 뿐.

고양이 특유의 식빵 자세로 앉은 호라타스가 치켜세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그 옆으로 어떻게 온 건지 모르겠지만, 타이탄 레인보우도 꽃봉오리를 쩍쩍 벌려 댔다.

그 모습이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것 같아 황당했다.

하리오카 숲에서 잘 나오지 않던 하피뿐만 아니라 미니 바다에서 조개나 물고기 할 것 없이 수면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쿵, 쿵, 쿵!

북쪽 끝, 화산 지대에서 들리는 울림을 따라 천 년 거목이 브로콜리 같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홀로틀 워프, 워프핵을 꺼냈던 그 거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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