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 워프핵 (3)
도현은 이를 뿌득 갈았다.
주변에 머릿수가 많아지기만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왜 계속 일어나는지, 짜증을 안 내려야 안 낼 수가 없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귀찮기도 하고, 편히 살고 싶어 아무 말 안 했더니 끝을 모르고 기어오른다.
가만히 있어도 꼬이는 벌레들이나 저 잘난 맛에 사는 드래곤이 시비를 건 거면 분이 풀릴 때까지 쥐어 패면 그만이지만…….
‘아! 그래, 대련.’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방향으로 강함에 집착하게 된 매부였으니, 훈련을 빙자해 굴려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혹독하게.
이오르가 들었다면 오만 쌍욕을 다 하고, 20년 정도는 도현이 있을 국가에 얼씬도 하지 않을 만큼 무서운 생각이었다.
도현은 자신의 생각에 흡족해하며 계획을 부풀려 갔다.
‘악착같이 버티겠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팬 카페라는 것도 사라졌거나 아니면 매부 팬으로 갈아 치워져 있을 테고.’
그러다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하는 김에 허약한 민혁이랑 머리만 굴려 대는 아바도 넣고.’
워프 던전에서 죽다 살아난 김경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업그레이드되면 워프 정리도 편해질 거고, 비상 체제 같은 것도 안 생기겠지.
워프핵의 비밀도 알아냈으니 말이다.
농장에 들어선 후로 웃을 일이 없었던 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 자신을 흘깃 보던 휘르카가 시선을 돌려 허공 어딘가를 보는 척했다.
뭐지?
“흠흠, 전 우선 일족에게 도현님이 오셨다는 걸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휘르카가 온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물 건너편으로 날아갔다.
“…….”
왠지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낀 도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민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
“아니, 뭐, 내 친구 우도현이 맞구나 싶어서.”
“실없긴.”
민혁의 눈은 또렷했고, 또렷한 만큼 맑게 반짝였다.
저런 눈빛은 이번에 만난 후로 처음이다.
‘웬만큼 정리돼서 그런가?’
인어 워프에서 나온 부산물로 모든 빚을 탕감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도 여유가 되어서 이사도 하고, 아주머니께서 하시던 포차 대신 작은 가게도 열었다고 들었다.
‘쉬라고 말했는데, 심심하기도 하고 가만히 있으면 병난다고 하시더라.’
그러시겠지. 10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하셨고, 이후로 빚 때문에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오셨을 테니까.
‘갑자기 모든 게 정리되니 기쁘면서도 허탈하셨겠지.’
아직 시간이 필요하신 거다. 적응 기간이라는 시간이.
그리고 남은 부산물 중에서 단단한 뼈와 가죽으로 무기와 방어구 주문을 넣어 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생각 없이 자신처럼 헌터 웨어 이야기를 꺼냈다가 욕을 얻어먹었고, 그제야 헌터 웨어가 비싼 쓰레기라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인벤토리에 있는 방어구나 던져 줄까 하다, 현실에서 사용되는 방어구는 어떤지 궁금해 묻지 않았다.
제련비가 든다 해서 자신이 처리했다.
‘특급으로 2주면 된다고 했었지.’
무척 기대하는 것 같던데, 좀 더 빨리는 안 되려나.
솔직히 도현이 더 궁금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흘렀을 즈음, 민혁이 뭔가 확신에 찬 얼굴로 히죽 웃는 게 보였다.
도현은 픽 웃으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 여기가 마음에 들어?”
민혁이 초롱초롱한 눈을 휘었다.
“은혜 갚은 까치가 생각나서.”
까치? 강아지 얼굴을 하고선 웬 까치 타령이래.
시답잖은 농담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소금기를 듬뿍 먹은 바람이 세 사람을 스쳐 숲을 흔들었다.
작은 바다 근처에 터를 잡은 마을의 밭이, 농경지가 바람에 따라 출렁였다.
많은 인어가 밭과 논에서 수확하느라 한창이다.
겨우 3일이 흘렀을 뿐인데, 새삼 흐르는 시간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민혁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뭔가 평온함을 듬뿍 담은 풍경.
‘있지, 엄마가 어렸을 때는 이런 도로도 건물도 전부 논, 밭이었어.’
엄마가 어렸을 적 동네의 모습은 이러했을까?
교통수단이라고는 하루에 세 번 움직이는 버스와 자전거가 다였던 그 시대.
그저 TV에서 다큐멘터리로 다루던 옛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빚 다 갚고, 네가 결혼하고 나면 엄만 시골에 내려가 살려구.’
흔히들 말하는 귀촌.
‘촌 동네는 왜 가려고? 차 없으면 쏘다니지도 못하는데, 아프면 어떡해? 엄마 말대로 예쁘고 참한 아가씨 데려올 테니까 셋이 오순도순 살자.’
‘얜, 엄마 독거노인 만들 일 있어? 그냥 둘이서 오순도순 살아. 손주 안겨 주면 더 좋고.’
손사래를 치며 극구 싫다는 엄마였는데.
엄마가 여길 봤으면 참 좋아했을 것 같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집 짓고 살아도 좋겠어.”
유독 눈에 띄는 빌라 같은 건물 3개가 보였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자주 놀러 와. 언제든 올 수 있을 거니까.”
“어?”
“주민이라고 안 떴어? 들어오는 방법은 나랑 같으려나? 아무튼 언제든 들어올 수 있을걸.”
그럼 엄마도……?
“현…….”
“우 헌터, 아니 우도현.”
반사적으로 물어보려던 민혁은 차가운 아바의 목소리에 입을 닫았다.
여태 본 적 없었던 냉정한 그녀의 시선이 도현을 직시했다.
“당신 정체가 뭐지?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민혁은 생소한 아바의 모습에 말리려던 것도 잊고 도현을 바라봤다.
도현은 평소랑 다를 바가 없었다.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심드렁한 얼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녀를 도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분풀이야?”
“뭐……?”
“오냐, 오냐 해 주니 내가 누군지 까먹었어?”
으득!
아바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움직이지는 못했다. 4급 헌터라지만 그 앞에서는 일반인과 같은 수준이니까.
서늘한 시선이 아바의 주먹으로 향한 도현이 혀를 찼다.
“목 위에 얹어진 건 돌이야? 왜, 목숨이 아까워?”
“…이 새끼야, 네가 뭘 알아!”
아바가 도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실타래처럼 풀려나더니 움켜쥐는 손안에서 형태를 갖췄다.
얇고 긴 검, 레이피어였다.
특이한 점은, 날과 손잡이가 전부 검으면서도 손이 비치는 반투명한 모습이었다.
레이피어를 익숙하게 그러쥔 아바가 도현의 심장을 향해 매섭게 찔렀다.
“……!”
소리, 기척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검이 그의 가슴에 닿자 당황스럽게도 검날이 통과해 버렸다.
흠칫 놀란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찌르고 베기 시작했다.
목 동맥, 명치, 옆구리, 허벅지!
하나라도 베이면 제대로 힘쓰기 힘든 부분들만 노렸다.
그런데.
‘왜! 왜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건데!’
강철 20센티미터도 종잇장처럼 갈라 버리는 검이다.
검술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마나를 주입하지 않더라도 절삭력 하나만큼은 웬만한 3급과 견주어도 뛰어날, 그런 특기였다.
그래도 피하는 척은 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 스킬을 써……?’
갈등이 서렸다.
공격 스킬은 3개가 전부.
하나는 인어 워프에서 썼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마지막 스킬은…….
갈등과 불안으로 아바는 입술 꾹 씹었다.
진정되지 않은 탓인지 입술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렀다.
분했다. 억울했다. 저렇게 강한 힘이 질투 나기도 했고, 왜 자신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지 화도 났다.
‘하, 그래… 이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강하니까. 미친 듯이 강해, 상상조차 안 됐으니까.
그래도 머리카락 한 가락은 자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저 머리카락 한 올. 이것조차도 너무 큰 꿈이었나 보다.
여전히 무심한 도현을 보자 허탈감과 함께 무력감이 몸을 내리눌렀다.
마치 저승사자가 거대한 낫을 들고 자신의 마지막 발악을 감상하는 듯했다.
‘하, 그래. 어차피 죽었을 목숨.’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힘없이 땅에 꽂힌 검은 녹아내리듯 바닥에 들러붙어 빠르게 아바의 그림자로 돌아갔다.
도현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광기와 살기로 번들거렸다.
“보여 주지.”
깨닫자마자 사용해 봤던 스킬.
몬스터에게도 강했지만, 그보다 사람에게 몇 배나 더 강한 위력을 보였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지만, 후유증도 심했다. 일주일이나 의식을 잃어버렸을 정도니까.
자신의 등급보다 1단계 높은 헌터 3명을 한 번에 보내 버리는 힘.
‘아마, 진심으로 쓴다면…….’
두 단계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그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겠지.
거기에 자신은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속으로 조소했다.
‘배신당한 걸로 모자라 유린까지 당하려고?’
미국 헌터 협회장은 정신 계열의 스킬을 가진 게 분명했다.
교류 헌터가 끝나고 이대로 돌아간다면 죽을 때까지 마리오네트가 되는 건 자명한 일.
‘그런 삶을 사느니… 마지막은 내가 선택하겠어.’
Bloodstained Rhapsody!
아바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그녀의 몸 전체에서 붉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혈색 좋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그럴수록 붉은 안개는 계속 짙어져 갔다. 마치 체내의 모든 피를 토해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도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아바를 보고 있었다.
아바는 경련이 일어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었다.
역시 그다웠다.
그러곤 덜덜 떨리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It’s better than that.
소리는 들리지 않는 뻥긋거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바의 몸이 붉게 물들며 안개에 녹아들자마자 피의 소용돌이가 도현을 삼켰다.
“현아-!”
아바가 도현을 향해 공격할 때 막으려 했던 민혁은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도현의 말에 떨어져 있던 걸 후회했다.
폭 5미터로 시작한 소용돌이가 2배, 3배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붉디붉은 선명한 액체인데, 왜 겁화의 소용돌이로 보이는 걸까.
민혁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용돌이로 몸을 던지려고 할 때였다.
콰앙!
소용돌이가 파편처럼 터져 나가더니 붉은 덩어리 하나가 땅에 박혔다.
그리고 소용돌이가 돌았던 곳, 그 중심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에 뻗는 도현의 손이 보였다.
검지 끝에 살짝 묻은 피가 보였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손은 왜?’
놀란 민혁이 다가가 물었다.
“혀, 현아, 괜찮아?”
“괜찮아.”
그는 인벤토리에서 담요를 꺼내 앞쪽으로 던졌다. 방금 붉은 덩어리가 떨어진 자리였다.
민혁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어……?”
어느 순간 사라졌던 아바가 쓰러진 채 담요를 덮고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선 아래로 약간 창백해 보이는 매끄러운 맨살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매, 매, 맨살!’
담요로 가리지 않은 종아리 아래 쪽으로 보송보송한 발이 보였다.
민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도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옷 있으면 입어.”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뭐, 농장 주민이니까?”
“뭐… 라구요?”
따지는 말투였지만,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