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105. 워프핵 (5)
두 번째 축제가 시작되었다.
워프에서 열렸던 축제와 다른 점이라면, 농장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평화 지역으로 지정한 하리오카 숲의 한 공터에 모여 도현이 굽고 찐 고래 고기를 흡입하는 중이란 것이다.
그 주변으로 일반적인 몬스터들이 얼굴을 빼꼼 내밀지만, 쉽게 끼어들진 못했다.
경계라 할 수 있는 나무를 넘기 무섭게 그들의 한 끼 식사가 될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옹기종기 모인 몬스터들과 달리 화산 지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인어들로 북적였다.
빙판 위에서 열렸던 첫 축제의 꽃이 인어주였다면, 이번 축제의 꽃은 현대의 다양한 술이었다.
“크으으, 시원하다!”
도현을 중심으로 모인 무리, 유리잔의 술을 원샷한 휘르카가 탄성을 내뱉었다.
드워프들조차 홀딱 반했던 혼합주였다.
뒤를 이어 잔을 비운 아바가 톡 쏘는 탄산에 코를 살짝 찡그리며 작게 크으, 거리더니 빈 잔을 거꾸로 들어 머리 위에 털었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은 썬 고래 고기를 한 쌈 싸 먹었다.
고기보다 지방질이 많은 고래 고기. 자칫 느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지방은 고기라고 생각될 만큼 쫄깃한 식감과 입에 착착 붙는 묘한 맛을 느끼게 만든다.
다양한 양념장과 함께 먹는 재미도 있다지만, 맬젓이라 부르는 멸치액젓이나 전어젓갈과 함께 먹는 게 제일 풍미가 있었다.
거기에 씨앗 쌈장을 한 젓갈 올려 쌈을 싸 먹으면 황홀하다 못해 콧노래가 그냥 흘러나온다.
그러다 꿀떡 삼키고 나면 아쉬움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장 수육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던데, 그건 별미니까 나중에 소수만 모여 먹을 생각에 보관해 두었다.
그렇게 쌈을 싸 입에 넣고 우물거리길 다섯 번.
“혼자 먹을 거예요? 빨리 만들어 줘요!”
배시시 웃으며 도현의 눈앞에서 빈 잔을 들이미는 아바나 은근슬쩍 빈 잔을 그에게 미는 휘르카를 보며 우걱우걱 볼이 터져라 쌈을 씹어 댔다.
‘뭐, 날 선 모습보단 좋긴 한데…….’
동네 오빠처럼 대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몇 년 된 유행어로 차도녀 같았던 그녀는 180도 바뀌어 푼수 같으면서도 시선을 끌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손짓 한 번, 웃음 한 번에 많은 인어들이 멍하니 바라보다 잔을 떨어뜨리거나 먹던 음식이 입가를 타고 흐르기도 일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모든 걸 불문하고 끌어당기니, 도현을 제외하면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정말 관심 없는 이들 정도.
그런 그들도 호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일 테니 무시무시한 능력이겠지.
특히 아바에게 호감이 있었던 민혁은 영혼이 없는 것처럼 뚫어져라 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술을 콸콸 부어 마시길 반복했다.
그 모습에서 왜 실연당한 느낌이 드는지.
픽 웃은 도현은 양손을 놀려 빈 잔에 다시 술을 말기 시작했다.
“전 파인애플 식초 타 주세요!”
살짝 얼굴이 붉어진 아바가 활기차게 요구했다.
토토와 모르달이 잘 찾는 과일 식초를 먹더니 반해 버렸다나.
그렇다고 하기엔 섞은 술의 3분의 1이 과일 식초인 걸 봐서 술보단 달콤하고 시큼한 식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알아서 제조해 먹으면 될 것을.
휘르카와 아바는 좋아하는 비율이 미묘하게 달라서 맛이 없다며 도현에게 생떼 아닌 생떼를 부렸다.
두 사람에게 막 만든 술을 건네자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또다시 한 번에 마셔 버리곤 해맑게 웃어 댔다.
그 둘과 달리 도현 옆에 앉아 막걸리를 대접에 부어 마시던 민혁이 울적한 탄성을 뱉으며 쩝쩝거렸다.
“아, 일주일 전만 해도 이것만 한 술이 없었는데. 이럴 땐 헌터 급수가 높은 게 별로네.”
괜히 다른 말로 우울한 이유를 댄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힘이 강해진다는 건 몸을 언제나 최적의 상태로 유지한다는 것과 같으니까.
그러니 웬만한 도수가 아니고서는 맛만 다른 음료수일 뿐.
휘르카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생소한 술병을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그게 뭐예요?”
“진인어주지. 엄청 귀한 거라 웬만해선 안 꺼내려고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마셔 줘야지.”
같은 주민이 된 후 말을 놓기로 한 모습은 삼촌과 조카 같은 느낌이었다.
“진인어주?”
민혁이 눈썹을 위아래로 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휘르카는 병을 막고 있는 마개를 열었다.
퐁!
열기 무섭게 진하게 퍼지는 향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바다 특유의 비린내 같기도 하면서 묵직한 단내가 고소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아찔할 정도의 강한 알코올 향이 뒤섞이자 절로 침이 넘어갔다.
그는 양주의 스트레이트 잔과 닮은 작은 잔에 술을 부어 민혁에게 건넸다.
홀린 듯 받아 든 민혁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우, 우와!”
완전 반한 얼굴이었다.
맛이 궁금해진 도현도 휘르카가 주는 잔을 받아 마시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다 내음이 섞인 도수 높은 막걸리다.
곡식이 나지 않는 바다에서 어떻게 이런 술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생각을 읽은 듯 휘르카가 말했다.
“대왕조개로 빚은 술입니다.”
소고기 같으면서도 조개 특유의 맛이 있던 조개. 마나를 품은 진주까지 만들어 내던 신기한 해산물이었다.
대왕조개가 늙어 수명이 다하면 부패가 시작된다.
그때 평생 품어 온 진주가 역으로 힘을 발산하는데, 그로 인해 발효와 숙성이 일어난단다.
그걸 바닷물 통째로 옮겨 와 대왕조개가 사라질 때까지 두는 게 첫 번째 재료이고, 거기에 인어가 일주일에 한 번 마력을 담아 노래를 불러 줘야 한다.
물론 기한은 대왕조개가 사라질 때까지. 최소 5년, 많게는 100년도 걸리고.
당연히 오래 묵을수록 맛 좋고 도수 높은 술이 빚어진다는데, 그렇게 50년간 빚어진 진인어주가 지금 마신 것이었다.
“바다의 보물이었네.”
정말 버릴 게 없는 대왕조개다.
헌터들은 그저 진주 때문에 대왕조개를 헌팅했겠지만, 이런 정보까지 알았다면 자신이 워프에 갈 필요도 없이 인어 워프는 사라졌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배 속에서 뜨끈한 취기가 훅 올라왔다.
몇백 년 만인지 모를 감각이었다.
그걸 알아챘는지 휘르카가 씩 웃었다.
“진인어주는 강한 선대 왕들께서도 3병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도수가 높다는 말이었다.
“헤에-”
민혁이 헤픈 웃음을 흘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쿡 찌르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풋, 귀여…….”
맞은편에 앉은 아바가 생각 없이 웃다 정색하며 입을 가렸다.
풀린 눈이지만, 민혁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쁜데… 너무 예쁜데……. 아니야, 아니야. 현이를……. 그래, 현이가 좀 많이 머싯찌! 근데… 근데… 나도…….”
‘나도 뭐……?’
아바의 청각이 수십, 수백 배 예민해졌다. 민혁의 중얼거림을 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혼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민혁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아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말은 끝까지 하고 잠들어야지!’
흔하디흔한 술버릇이다.
그런데도 짜증이 났다. 짜증 난 자신에게 더 짜증이 났다.
아바의 눈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할 즈음, 도현이 말을 툭 던졌다.
“언제 갈 생각이야?”
미국을 말한다는 걸 금방 깨달은 아바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자신은 이제 인어들과 다를 바 없는 주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은혜를 베풀어 준 도현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미국이라…….’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일단은 비상 체제가 끝나면 갈 생각이에요.”
그게 제일 무난한 방법이긴 했다.
지금 몸을 내빼기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테니까.
아바의 말을 들어 보니 미국과 중국, 일본에서 갑작스럽게 상급 헌터들이 대거 나타났다는데, 그 일로 목에 꽤 힘을 주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은 찬밥 신세가 되었지만, 세 나라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흐름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아직 빼먹을 게 있다는 거지.’
도현의 생각은 심플했다.
그들이 찍어내듯 만들어 낸 상급 헌터들은 패스트푸드라 할 수 있다. 자극적인 맛은 있지만, 깊이는 없는.
반대로 국내 헌터들은 안정적인 헌팅을 위해 개인 또는 팀으로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해 아바를 둔 것일 거고.’
물론 당사자는 그저 팽 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생각을 끝낸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쌍하게 웅크리고 자는 민혁을 옮겨 놓고 올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워프핵 테스트도 해 보고.’
“난 이만 간다.”
“벌써요?”
“벌써 가십니까?”
“응. 할 일도 있고.”
두 사람의 시선에 의문이 서렸으나 묻지는 않았다.
‘신께서 하시는 일에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될 일!’
‘머리 아파.’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행동은 같았다.
도현은 민혁을 들쳐 엎고 몸을 움직였다.
“음, 우선은 남쪽과 동쪽을 넓혀야겠다.”
도현은 토토와 모르달이 함께 지내는 농장의 집에 민혁을 던져 두고 지도를 살폈다.
인어족이 농장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지만, 바다는 필수적이었다. 작은 바다로 많은 인원을 감당하긴 힘들다.
거기에 언제 얼마나 불어날지 모르는 머릿수를 생각하면 추운 곳보단 따뜻하고 볕이 잘 드는 방향을 택하기 마련.
그런 이유를 갖다 붙이긴 했지만, 실은 워프핵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아홀로틀이 크로아 지대와 합쳐지며 아홀로틀의 외형이 바뀌었다. 미끈했던 피부는 두껍고 거칠게 변했고, 색도 선명하고 화려해졌다.
오히려 크로아보다 화산 지대에 더 어울리게 진화한 격이었다.
그 예를 보고 나니 남은 5개의 워프핵을 어떻게 조합할지, 개별적으로 심을지 고민이 된 거다.
“마을 근처에 몬스터를 두긴 좀 그렇고, 적당히 거리를 두려면 북쪽도 둘러봐야겠네. 그럼 반시계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자 도현은 지도를 닫고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하늘로 날았다.
날아서 훑기만 하는 것으로 지도가 밝혀질지는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위치와 환경만이라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 정말 더럽게 넓네.”
지도에 농장이 작게 표시될 때부터 그럴 것 같더라니.
3시간 정도면 모두 밝히고 적당히 워프핵을 뿌릴 생각이었던 도현은 계획을 변경했다.
1시간 동안 돌아다녔지만 선 긋듯 이어진 얇고 긴 길이 전부였다.
그것도 남쪽에서 동쪽, 북쪽을 찍어 서쪽, 농장까지 오는 데 만 딱 1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농장이라 해서 땅과 물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생물도 많았고, 몬스터도 많았다.
그저 사람이 없을 뿐이지, 하나의 세상이나 다름없달까.
특히 땅이 넓어서 방위와 해가 뜨고 지는 선을 경계로 환경이나 몬스터의 특성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게임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초보 유저 같은 느낌.
그렇다 보니 제브라드가 했던 ‘심시티’란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떠맡기고 잠수 타면 내가 이대로 조용히 움직여 줄 거 같아? 숨어서 지켜봐.”
보기만 해도 시원한 웃음이 도현의 얼굴에 서렸다.
제브라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커넥팅으로 웬만한 정보는 다 모았다.
이제 남은 건 그동안의 값에 이자를 쳐 제대로 갚아 주는 것뿐.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던 도현은 입맛을 다셨다.
“우선은 이것들 먼저 정리해야겠지.”
요리 준비로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워프핵을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자그락,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흥겨운 리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