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감정의 골(1)
다음 날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헤드라인 뉴스로 청일 아파트 소식을 전했다.
<충격!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의 실체! 쓰레기 아파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부실 시공의 끝!>
<건설 자재를 아껴서 뭐에 썼을까?>
충격적인 소식이 나가고 나자 사방에서 제보가 쏟아졌다.
-김모 씨(36세): 장마에 지하실이 수영장이더라고요! 배수가 안 돼요!
-최모 씨(56세): 비 오면 물이 새요! 벽지마다 곰팡이 피고, 문틀은 떨어지고! 도저히 못 살겠어요!
-한모 씨(72세):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뭘 해? 움직이질 않아! 이 나이에 계단으로 9층까지 다녀야 해?
-이모 군(12세): 냄새! 진짜 집에 들어가면 사방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요! 설마 벽에 시체 집어넣은 거 아니겠죠?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청일 아파트에 대해 얘기했다.
방송과 신문 기사로 생생하게 본 엄청난 쓰레기 벽!
그 충격과 공포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청일 아파트는 대한민국 최초로 ‘쓰레기 아파트’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한청호가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 얻고자 했던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는 그렇게 물 건너갔다.
<청일 아파트 환불 요구로 전쟁터!>
<아파트 주민들! 시위단을 꾸려 청일 본사 앞에서 연일 시위!>
쾅.
이문복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대체 청일 아파트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쓰레기 자재로 부실 공사를 해요?”
한일권은 의자에 앉아 책상에 두 다리를 척 올렸다.
한일권의 책상 위에는 명패가 하나 올려 있었다.
<청일 그룹 회장 한일권>
한일권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팠다.
“난 몰라. 김재학이 한 거라니까?”
“김재학? 청일 화학 사장 김봉남 아들이자 전(前) 청일 건설 상무 말씀이십니까?”
“응, 걔 말이야.”
한일귄이 발끝을 까딱거렸다.
“몰라? 청일 건설 문제로 깜빵 갔잖아. 전부 걔가 그랬다고 전해.”
국빈관에서 나왔던 여러 범죄 증거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게 된 김재학이다.
국빈관 장부에는 ‘청일 건설’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지 ‘한일권’이라 적힌 건 아니었던 탓이다.
“지금은 잘잘못과 시비를 가릴 때가 아닙니다.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죠.”
“잘잘못과 시비를 가릴 때가 아냐? 그럼 넌 왜 나 찾아와서 따지는데?”
한일권이 구둣발로 책상을 쿵 내려찍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저기 앞에서 시끄럽게 구는 놈들 전부 치워 버리는 것.”
한일권이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위단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든 청일 아파트 분양을 성공리에 끝내는 것.”
청일 아파트 분양 계약은 완전히 사라지고, 분양 환불로만 연일 시끄럽다.
총 144가구 중에서 고작 23가구만 나갔다.
그런데 그놈들이 연일 시위를 해대는 게 아닌가.
그러니 나머지 121가구는 팔리지도 않는다.
“회장님, 청일 아파트에서 시작해 청일 그룹 전체 주가가 연일 폭락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 네가 해결해야지. 비싼 월급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따지긴 어디서 따져?”
한일권이 힐끗 본다.
“내가 네놈에게 왜 부회장 자리를 내줬는지부터 잘 생각해. 알았어?”
한일권의 말에 이문복이 입술을 깨물었다.
“죽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청일 건설 파산 직전인 것을 어쩝니까? 청일 호텔도 화재로 홀랑 타 버려서 운영은커녕 돈 들 곳만 수두룩하고!”
이문복은 골머리가 아파서 머리를 짚었다.
“당장 숨통을 틀 돈이 나와야 할 청일 아파트는 부실시공으로 난리! 저더러 어쩌란 겁니까? 신용이 바닥이라서 공사 따올 데도 없는데!”
“공사 따올 데가 없긴? 중동에 나가면 되겠네. 거기 오일 머니가 많다며?”
“허, 중동이요?”
“강태수는 공사 하나로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던데, 우리도 그런 공사 몇 개 따오면 될 것 아냐. 간단하네.”
이문복은 기가 차서 입을 떡 벌렸다.
중동 건설은 말이 쉽지 폐쇄적인 벽을 뚫고 공사 따내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그게 쉬웠다면 한청호가 기를 쓰고 사우디 장관에게 로비하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많은 돈을 들이고도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물 건너가지 않았던가.
이문복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청일 건설에 적자가 얼마나 쌓였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그룹 총수가 알지 않으면 누가 알아야 하는데!
이문복은 목구멍까지 치민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지금 청일 아파트가 분양되지 않으면 청일 건설은 파산하고 맙니다.”
“그걸 막는 게 당신 일이고.”
“청일 자동차, 청일 해운, 청일 유통, 청일 시멘트 할 것 없이! 계열사 돈 전부 끌어 다가 청일 건설에 쏟아부었단 말입니다! 계열사 전부가 지금 적자!”
“그럼 네가 적자 대신 흑자로 돌려놓으면 되겠네.”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대체 뭐가 문제겠는가.
“계열사를 팔아야 합니다. 그 돈으로 적자부터 일부 탕감합시다.”
“청일 그룹 계열사 사겠다는 회사는 있고?”
없다.
청일 그룹은 신용을 잃었다.
한청호가 청일 정유에 쓰레기 같은 수작을 부려서 모두 청일 그룹 인수를 꺼려 한다.
그때보다 재정상태가 훨씬 악화된 지금은 더 볼 것도 없다.
“그럼 은행에서 대출이라도 더 받아야 합니다. 상환 기한도 늘려야 되고요.”
“그럼 그렇게 해 봐. 수고.”
한일권은 서랍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한쪽 눈을 감은 채 이문복을 향해 던질까 말까 조준한다.
이문복은 흠칫했다.
휙. 딱.
한일권의 손에서 떠난 나이프가 이문복의 관자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리고 벽에 걸린 다트판에 정확히 박혔다.
부르르.
이문복은 다트판에 꽂힌 나이프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나이프잖아?’
스친 피부가 따끔거린다.
이문복은 화들짝 놀라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장실을 나왔다.
“짜식, 쫄긴.”
한일권이 나이프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면서 웃었다.
“초명 은행 무룡이 삼촌부터 만나 볼까?”
한일권은 책상 위에 올려 뒀던 다리를 내렸다.
초명 은행에 가 봐야 할 것 같다.
청일에 대출을 더 해 달라고 말해야겠다.
* * *
초명 은행.
최무룡은 한일권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대출 10억? 그런 건 초명 은행이 내어 준 대출금부터 상환하고 말해야지. 순서가 틀렸잖아.”
“그래서 못해 주겠다?”
“우리 초명 은행 요즘 사정 어려운 거 알 텐데. 네 아버지가 몇 번 다녀갔었다. 난 해 줄 만큼 해 줬어.”
“뭘 원하는데?”
“초명 자동차. 그 정도는 줘야지.”
“이거 아주 날도둑놈이네?”
한일권은 손깍지를 끼며 소파에 등을 붙였다.
싱글벙글 웃는 웃음이건만 섬뜩했다.
“우리 아버지랑은 이런 대화를 나눴구나.”
“너 삼촌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삼촌? 웃기고 있네. 당신이 왜 내 삼촌이야?”
한일권이 혀를 찬다.
“우리 아버지가 참 사람이 좋아. 같잖은 새끼가 이렇게 기어오르는 걸 그냥 내버려 뒀다니. 쯧쯧쯧.”
한일권이 테이블을 발로 찼다.
넘어간 테이블이 최무룡을 덮쳤다.
기겁한 최무룡이 재빨리 몸을 피했다.
“난 부탁이나 협상 같은 건 안 해. 하려면 협박을 하지.”
“야! 한일권! 너 이 새끼가……!”
“사흘 준다.”
한일권이 차갑게 말했다.
“10억, 마련해 놔. 안 그러면 초명 은행 부도나는 꼴을 보게 될 테니까.”
“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같이 죽어 보자 이거지. 청일 계열사 하나에 적자 전부 몰아넣고 초명 은행이랑 같이 폭사시킨다. 줄도산이라고 들어 봤어?”
“미쳤어?”
“내가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왜? 못할 것 같아?”
할 것 같아서 무섭다.
청일 그룹과는 돈으로 얽힌 게 너무 많다.
‘한청호와 상부상조하며 악착같이 지분을 끌어모았더니. 이런 일이!’
식은땀이 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최무룡이 버럭 화를 냈다.
“넌 상도덕도 없냐, 새끼야?”
“난 도덕 같은 거 안 취급해. 어떤 것이든.”
한일권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내가 힘들게 키운 것도 아닌데 뭐. 난 아쉬울 것 없어.”
정말로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악착같이 계열사를 챙기던 한청호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그럼 사흘 후에 보자고.”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결정을 쉽게 하도록 도와줘야겠지?”
한일권은 찡긋 윙크했다.
“곧 연락이 갈 거야.”
한일권은 훨씬 더 비열하게 웃었다.
“야! 한일권!”
그때였다.
따르르릉. 따르릉. 따르르릉.
초명 은행장실에 놓인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었다.
“뭐해? 중요한 전화니까 받아야지.”
한일권의 재촉에 떨떠름한 얼굴로 전화기를 받은 최무룡.
-아빠…….
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최무룡은 머리털이 쭈뼛 섰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 돈이… 돈이 필요해, 아빠, 제발…….
“돈? 갑자기 돈이 왜 필요해? 얼마나 필요한데?
-10억이래. 나한테 약을 안 준대. 나 외국으로 팔아 버린대. 아빠, 나 돈 좀 줘.
“약?”
최무룡은 저도 모르게 한일권을 보았다.
한일권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상태로 웃어 보였다.
“10억. 일단 그거면 돼.”
전화기를 든 상태로 최무룡은 굳어 버렸다.
* * *
휘이잉-
종로의 고층 빌딩 옥상에서는 바람이 휘날렸다.
넥타이와 옷이 펄럭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태수는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명 은행>
태수는 간판을 내려다보며 도청기에서 나오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새로 태양 그룹으로 받아들인 전(前)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이 분야에는 최고다.
-10억을 내어 줄게. 그러니 내 딸을 풀어 줘.
-그건 돈부터 주고 말해야지. 순서가 틀렸잖아.
-무려 10억이야! 내게도 돈 마련할 말미는 줘야지!
-고작 사흘이네? 며칠 안 본다고 딸이 그리워 죽을 나이도 아니잖아?
김광록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 새끼 아주 쓰레기구만?”
동의한다.
‘한일권, 실제로는 훨씬 더 극단적이었군. 내 앞에서는 일부러 이빨과 발톱을 숨겼던 거였어.’
초명 은행과 청일 그룹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협박부터 하다니.
전생에 태수 앞에서는 한 번도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태수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송 비서님 말대로 내가 고삐 노릇을 한 게 맞구나.’
청일을 뒤에서 이끌 총수이자 한일권의 고삐 노릇.
그게 바로 태수의 쓸모였다.
덕분에 한일권은 더욱 은밀하고 음흉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지금처럼 뒤 없이 일부터 저지르기보다는 태수의 눈치부터 보았다.
그 와중에도 몰래 교묘하게 살인을 일삼던 놈이 아닌가.
‘한일권, 널 보호할 모든 울타리와 무기들을 하나씩 떼어 놓겠다.’
태수는 말없이 빌딩 아래를 내려다본다.
“태수야, 너 대체 어떻게 하려고?”
“10억짜리 내분.”
초명 은행은 청일 그룹과 이권과 돈으로 얽힌 게 아주 많다.
한청호와 최무룡은 오랫동안 손을 잡았고, 함께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전생에 태수가 죽기 전까지도 청일 그룹과 초명 은행은 끈끈하게 얽혀 있었다.
이해관계 때문에 쉽게 손을 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아주 철천지원수를 만들어 놓을 생각입니다.”
돈 앞에선 감정 따윈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돈보다 복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바로 태수가 그러하듯이.
“태수야, 저놈들은 지금도 충분히 감정 상한 것 같은데?”
이번 협박으로 최무룡은 한일권에게 이를 갈 것이다.
딸에게 약을 썼다는데, 분통이 터지지 않을 아버지는 없다.
“한일권도 감정이 상해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한일권이 그걸 감수하고 얻고자 하는 건 10억이다.
그 10억을 도중에 강도에게 갈취당한다면?
최무룡의 딸과 10억을 교환하기로 한 것을 최무룡과 한일권, 둘밖에 모르는 상황이라면?
돈을 잃게 된 한일권은 과연 누구에게 이를 갈까?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지 난 하나도 모르겠다.”
김광록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태수가 마음먹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분명 다 계획이 있을 것이다.
“난 뭘 어떻게 하면 돼?”
“강도짓 가능합니까?”
“강도오오오오?”
“저런 쓰레기 짓거리로 갈취한 10억. 강도한테 도로 빼앗겨도 할 말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김광록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거라면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겠는데?”
“대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끈질기고 추잡한 놈이라서.”
“북한 간첩 새끼들보다 더 한 놈일 리 없겠지.”
치지직.
도청기에서 최무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10억. 금고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반드시 오늘 밤까진 준비해 놓지.
-좋아, 통금 시간 전까지 귀가하는 착한 딸을 보게 됐네?
-어디서 만날까? 국빈관? 대운각? 아니면 이곳 초명 은행?
-우리 집까지 배달해 줘야지.
-그럼 내 딸은?
-그때 와서 데려가면 되겠네.
태수가 김광록을 돌아봤다.
“우리도 준비합시다.”
“좋아!”
김광록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