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감정의 골(2)
어둑하게 어둠이 깔린 한남동 대저택은 마치 감옥처럼 보였다.
5미터가 넘는 돌 벽 위에는 뾰족뾰족 날카로운 유리와 철조망으로 잔뜩 무장했다.
크고 두꺼운 철문으로 입구를 틀어막은 대문에, 망루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들이 보인다.
웅장하고 거대한 저택이 주는 위압감에 보통 사람들은 기부터 죽는다.
도둑조차 얼씬하지 못할 집이다.
끼익.
자동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눈을 감은 최무룡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은행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으로 진입해.”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젠장.”
망루에서 경비를 서는 놈들이 대문 앞에 선 자동차를 못 봤을 리는 없다.
한청호가 있을 때는 잘만 열어주던 문이었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차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나더러 돈만 가지고 조용히 들어왔다 가라는 거지?”
최무룡이 이를 갈면서 대저택을 노려봤다.
어쩔 수 있나.
아쉬운 사람이 치욕을 감수하는 수밖에.
“내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 한일권.”
최무룡은 돈 가방을 들고 자동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최무룡은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 * *
딸을 부축한 최무룡이 발로 대문을 뻥 찼다.
쾅 소리에 운전기사가 놀라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해파리처럼 축 늘어진 채 침을 질질 흘리는 딸.
운전기사의 부축을 받아 딸을 뒷좌석에 실었다.
최무룡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한일권, 이 개 같은 새끼가!”
남의 집 금지옥엽에게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
“내가 누구 때문에 여태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살았는데.”
잔혹하고 야비한 최무룡에게도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 약쟁이로 만들어 놔?”
딸을 건드려 약물에 절여놨으니, 시집은 다 갔다.
한 사람과 한 집안의 미래를 망쳐버린 것이다.
“싸움은 네가 먼저 걸었다, 한일권. 넌 나를 매정하다 욕할 자격이 없어.”
최무룡은 싸늘한 눈으로 대저택을 노려봤다.
“네 가족도 내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두고 봐라!”
명동을 중심으로 강남 사채업계의 큰손이 장말동이라면, 강북엔 최무룡이 있었다.
종로에 둥지를 틀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했던 최무룡이 앙심을 품었다.
사채업 껍데기를 뒤집어 쓴 독립 운동가 집안 장말동이랑은 차원이 다른 독한 남자였다.
부르릉.
어둠 속으로 최무룡의 차가 달려갔다.
* * *
한청호의 서재.
한일권은 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뒷머리를 깍지로 받친다.
세상 이리 편할 수가 없다.
“최무룡, 늘 나를 한심하다고 깔봤겠다. 어디 그 잘난 딸 때문에 너도 골치 좀 아파봐라. 클클클.”
약에 길들여진 딸은 금단증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약을 찾아 헤매고 다닐 것은 자명한 일.
딸의 망가진 모습을 보면서도 최무룡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청일 자동차를 달라고? 지 까짓게 삼촌을 자처해? 웃기고 있네.”
책상 위에는 최무룡이 내놓고 간 10억이 있었다.
한일권은 촤라락 돈다발을 튕겨보다가 웃었다.
“저금통은 그냥 닥치고 앉아서 돈이나 토해내면 그만일 것이지. 쯧쯧.”
10억이라.
이것으로 일단 급한 불이나 꺼야지.
“청일 건설부터 틀어막는 게 순서인데 말이야.”
청일 자동차나 청일 해운이 요즘 많이 불안하다.
하지만 야심차게 준비했던 청일 호텔과 청일 아파트가 전부 날아가게 생긴 청일 건설만큼 급하진 않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내가 손을 댄 청일 건설이 무너지면 내 체면이 뭐가 돼?”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이미 한 번 내쳐졌던 한일권이 아닌가.
어떻게 이 자리에 돌아왔는데.
다시 실패자로 낙인찍힐 수는 없다.
“그룹의 위기 상황을 번뜩이는 기지로 타파한 청일의 새로운 총수! 얼마나 멋져? 클클클.”
한일권이 초명 은행에서 거액을 뜯어낸 이유였다.
-그룹이 위태로운 순간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하다!
청일의 영웅은 이래야 하니까.
“일석이조네. 내가 봐도 난 참 똑똑하단 말이야?”
자금난에 허덕이는 회사에 무려 10억이나 투자금을 투척할 수 있는 회장이 어디 흔한가?
더구나 눈엣가시 같은 초명 은행을 제대로 엿 먹이면서.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다.
“최무룡, 앞으로 내 앞에서 나대지는 못하겠지.”
최무룡이 악감정에 나대면?
딸을 경찰서에 끌고 가버릴 것이다.
약물 검사를 진행하면 저건 빼도 박도 못 한다.
“초명 은행장의 딸은 약쟁이라고 청일 일보가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버린다.”
대한민국은 약물이 금지된 국가가 아니던가.
더구나 아편이나 대마초 같은 마약류에 대해 사람들의 터부가 심했다.
초명 은행은 이미지가 완전히 깎여서 주가도 곤두박질 칠 것이다.
“약점 하나 잡고 있으니까 이렇게 든든한 것을. 클클클.”
그러니까 아버지가 치부책을 적어두는 거겠지.
아주 마음에 든다.
다음에도 은밀하게 초명 은행 딸에게 약을 건네서 꾀어내면 또 써먹을 수 있다.
약에 절여진 인간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팔아서라도 약을 사고 싶어 한다.
그게 설사 가족이라도 약과 바꿀 것이다.
“나머지는 금고에 두고 딱 1억만 꺼내 써야겠군.”
돈이 생겼으니 입을 막아야 할 곳이 있다.
아깝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입이 있으니까.
“잘 먹여둬야지. 내 대신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닐 놈들이니. 어쩔 수 없지.”
약을 잘 쳐둬야 뒤가 든든한 법이 아닌가.
한일권은 9억을 서재 금고에, 나머지 1억을 돈 가방에 담아들고 일어섰다.
* * *
아무 말 없이 한청호의 대저택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태수였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었지.’
감회가 새롭다.
한청호는 태수 가족에게 별채를 내줬다.
어머니는 가정부로, 태수는 청일 그룹 비서로, 한수는 안기부에서 일했다.
한청호가 설계한 대로 들어가서 평생 청일을 위해 개처럼 살았었다.
청일의 충성하는 개들을 잡아두고 키우던 곳.
한 씨 일가 개새끼들이 개소리를 짖어대던 곳.
개집이다.
‘개집을 다시 보니 기분이 참 더럽군.’
목줄을 채워서 절대로 도망갈 수 없게 했다.
송 비서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끝내 벗어날 수 없던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내 어머니와 송 비서님이 이곳에서 돌아가셨지.’
태수가 주먹을 쥐었다.
위압감을 흘려대는 대저택을 노려본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 손으로 이 곳을 철저하게 부숴주지.’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김광록이 말했다.
“저택 경호 체계가 느슨해졌다.”
최무룡과 딸이 돌아간 후 벌써 30분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태수가 뒤를 돌아봤다.
검은색 옷, 검은색 모자, 검은색 군화, 검은색 복면, 검은색 허리띠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김광록 뒤에는 똑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따랐다.
태양 그룹 경호원과 전(前) 중앙 정보부 요원들로 구성된 태양 그룹 정보원들이다.
태수가 말했다.
“잠입 목표는 모두 셋입니다. 첫째, 한청호의 서재에 잠입해 금고를 털어올 것.”
최무룡이 준 돈 10억이 들어있을 것이다.
청일 건설의 숨통을 틔워줘선 안 된다.
또한 10억을 받자마자 잃어야지만 한일권이 최무룡을 의심할 것이 아닌가.
‘내가 즐겨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10억이란 거액이 내일 당장 청일 건설을 위해 쓰일 것이다.
손 놓고 두고 볼 시간은 없다.
또한 한일권의 눈을 돌리기에 최무룡만큼 적합한 상대는 없다.
‘나는 둘이 상잔하길 바란다.’
태수가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한 이유였다.
가장 효과적이니까.
“둘째, 집안 곳곳에 도청기를 설치할 것.”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한일권의 집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성능 좋은 도청기를 개발한 태양 전자가 아닌가.
청일 호텔에서 잘 써먹은 도청기를 구태여 아낄 필요는 없다.
“셋째, 한청호의 치부책을 찾아야 합니다.”
중앙 정보부에서 한청호가 태수에게 마지막으로 협상에 써먹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치부책이다.
‘한청호가 회심의 한 수라고 생각하는 이상,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다.’
한청호가 제 목숨과 바꾸려고 했던 최후의 거래 대상이었다.
말을 꺼내는 그 순간까지 집착과 탐욕을 숨기지 못했던 물건이 아닌가.
태수 역시 그 존재만 알았지,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다.
‘이왕 집에 잠입한 이상 한 번은 뒤져봐야 한다.’
아마도 한청호의 집안에 있으리라.
‘청일 그룹 본사에는 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만에 하나 언제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계열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중요한 물건이라면 집안에 숨겨뒀을 것이다.
특히 한청호의 서재가 가장 유력하다.
‘집안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태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광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는 확실히 완수해야지.”
“맞습니다.”
복면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광록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예.”
그때였다.
“잠깐!”
김광록이 목소리를 굳혔다.
“멈춰! 숨어!”
검은 복면들이 일제히 멈췄다.
순식간에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긴 복면인들.
쿠구궁.
대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 한 대가 유유히 밖으로 나온다.
태수는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한일권?’
한일권이 이 밤에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태수는 직감했다.
‘돈이 생기자마자 가는 곳이다. 아주 중요한 곳.’
태수가 김광록을 돌아봤다.
김광록도 의아한 눈빛으로 태수를 봤다.
쿠구궁.
대문이 닫히자마자 태수는 급히 자동차를 향해 달렸다.
김광록 역시 재빨리 태수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차문을 닫지 않고 김광록이 크게 외쳤다.
“작전 변경! 1조는 나를 따르고, 2조와 3조는 원래대로 간다.”
“예,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1조가 태수를 따랐다.
나머지 2조와 3조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은 로프를 걸자마자 대문을 넘어간다.
눈 깜짝할 새였다.
철컥.
열린 대문 사이로 나머지 복면인들이 유유히 들어간다.
태수는 말없이 차를 돌렸다.
* * *
김광록이 보조석에서 복면을 벗어들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왜 튀어 나가?”
“한일권이 돈 가방을 들고 나섰습니다.”
“뭐?”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애들은? 지금 헛짓거리 하는 거야?”
“아뇨. 그건 반드시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한일권이 집을 비웠으니 좀 더 일이 수월할 겁니다.”
한청호의 서재는 여러 개의 방을 넘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저택 지리에 익숙하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다.
태수가 미리 도면을 그려주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일이었다.
간첩 수색에 도가 튼 특수부대원들이 아니었으면 투입하지도 않았다.
“금고를 털고, 도청기를 달고, 치부책을 찾는 것. 잠입 목적은 확실합니다.”
“그럼 갑자기 왜 달리는데?”
“한일권의 뒤를 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놈의 뒤를 왜?”
부우우웅-
태수가 액셀을 밟아 속력을 올린다.
끼이이이익-
빠른 속도를 줄이지 않고 커브를 꺾느라 들어가는 드리프트!
김광록은 저도 모르게 보조석 손잡이를 잡았다.
“한일권, 그동안 국빈관 놈들이랑 깊은 연을 맺었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김광록이 직접 국빈관 놈들을 때려잡았다.
하지만 국빈관은 80년대 전두호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삼청 교육대로 끌려가 해산됐다.
한일권이 그걸 수수방관했다는 말은 그놈들은 그저 쉽게 이용하고 버리는 패였다는 뜻이다
“그놈들 말고 다른 놈들! 한일권이 정말로 공들이는 놈들! 진짜 한일권의 힘!”
전생의 태수는 모르는 한일권의 힘.
한청호 부자의 비밀을 덮으라는 송 비서의 충고에 따라 태수가 알아보지 않던 세력.
“돈 가방을 들고 그놈들에게 가고 있는 걸 겁니다.”
한일권의 비밀을 엿보러 갈 생각이다.
전생에서는 태수가 알지 못했던 비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