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내기합시다(3)
한일권은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한일권이 두 손을 들면서 뒤로 빠져나간다.
비열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내가 어디서 공갈 협박 듣고 다닐 타입은 아닌데. 너도 참 간댕이가 커.”
“공갈 협박 아닌데.”
“그럼, 협박이야?”
“선전 포고.”
한일권이 눈을 반달로 접어 가며 웃었다.
“나한테 싸움을 걸어? 후회할 텐데.”
태수는 피식 웃었다.
“왜? 내가 못할 것 같나? 이번엔 내 차례야.”
날고 긴다는 한청호도 잡은 태수가 아닌가.
한일권이라고 두려워할 리 있나.
한알권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 가장 든든한 보호막부터 치운 태수가 아닌가.
“강태수, 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아주 많잖아. 괜찮겠어?”
한일권이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했다.
“어디 보자. 부모님이 두 명에 동생이 한 명. 아, 결혼은 안 했지? 애인은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고 다친다면 참 마음 아프겠다. 그치?”
태수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넌 어째 레퍼토리가 항상 똑같냐? 가족 갖고 협박하는 것 외에는 나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없나?”
전생에 가족들을 잃었으면 됐다.
이번 생에 가족들을 잃는 건 태수가 아니라 한일권의 차례다.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주던 네 아버지 한청호는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것이고.”
한청호는 끝났다.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청일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일생을 바쳐 가며 건설했던 왕국의 멸망을 봐야 하는 고통.
그것이 한청호에게는 죽음보다 더 큰 좌절이 될 것이다.
“허영심 많은 네 여동생은 이제 어디 가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없겠군.”
한청호의 딸은 허영심 많은 공주님이었다.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자들 사이에서 으스대는 것을 좋아했다.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소문내는 것을 좋아하고, 언제나 화려한 이슈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했다.
그렇게 청일 호텔의 홍보와 더불어 그녀가 결혼하는 모습이 전국 생방송을 타고 나갔다.
그런데 그녀의 결혼식에서 반란을 모의하다가 죽고 다치고, 청일 호텔은 개장한 날 도로 화재로 닫아야 했다.
“아니면 이번에도 소원대로 능력 없는 매제를 떠안게 된 것을 축하해야 하나?”
전두호의 동생은 형의 죽음과 모든 불행을 부인 탓으로 전가하며 망나니 남편으로 돌변했다.
마땅한 직업도 없이 술과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
술에 취해 걸핏하면 부인을 두들겨 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밑바닥 결혼 생활과 손가락질받는 현재의 위치.
한청호의 딸은 온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에겐 이 삶이 죽음보다 더 끔찍한 불행일 터다.
“졸지에 남편과 딸을 시궁창에 처박고 죽다 살아난 네 어머니. 요즘 반쯤 미쳐서 밤마다 날뛴다지?”
한일권의 어머니는 소식을 듣자마자 쓰러졌다.
그런데 그게 뇌졸중이었다.
발견이 빨라서 목숨은 건졌지만 반신이 마비되었다.
더구나 남편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고, 딸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됐다.
밤마다 서럽게 울부짖으며 자살 소동을 벌이다가 지쳐 나가떨어진다고 한다.
“난 이제 시작이야.”
이런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내가 당했던 그 고통, 몇 배로 돌려주지. 이번에 넌 내 손에 네 가족을 전부 잃게 될 거야.’
태수는 웃었다.
한일권이 언제 이런 위협을 느껴 봤겠나.
여유로운 기색이 사라진 한일권은 태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맹세하지. 네 뼛조각 하나까지 남김없이 씹어 먹을 테다.”
“넌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거다.”
한일권 뒤에서 용역 깡패들이 연장을 들고 살벌하게 이쪽을 노려본다.
태수의 뒤에서는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지지 않고 대치한다.
태수가 차갑게 말했다.
“꺼져.”
한일권이 먼저 등을 돌렸다.
한일권이 크게 외쳤다.
“뭐 하냐? 얘들아, 때려 부숴라! 오늘 내로 저 불법 건축물 철거해야지!”
한일권은 용역 깡패들이 터 준 길을 걸으며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가리켰다.
“주춧돌 하나, 기왓장 하나 남기지 말고 확실하게 때려 부숴 버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방해하는 놈들은 전부 박살 내! 우리 뒤에는 정부가 있다! 대통령이 직접 부탁한 일이다!”
“예, 알겠습니다!”
용역 깡패들이 크게 외쳤다.
용역 깡패들이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씰룩댔다.
“자, 철거할 시간이다.”
김광록이 울컥했다.
“저 새끼들이 뒈질라고!”
태수가 손을 들어 김광록을 막았다.
“놔두십시오.”
“태수야!”
“그깟 모델 하우스 천만 번을 부숴 봤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태수!”
넌 자존심도 없냐?
이 꼴을 보고도 놔두자는 소리가 나와?
태수는 김광록의 소리 없는 항의를 무시하지 않았다.
“저쪽이 이쪽 집을 부쉈으면 우리도 저쪽 집을 부수면 그만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김광록은 어리둥절했다.
태수는 등을 돌렸다.
“두고 보십시오. 당한 것 이상 몇 배로 갚아 줄 테니까.”
금전적 손실부터 명예, 미래, 모든 것을 몇 배로 불려 망가뜨려 주지.
태수의 곁에 바싹 따라붙은 비서 송창준에게 지시한다.
“청일 아파트 분양이 시작됐죠?”
“네, 그렇습니다.”
“청일 아파트에서 가장 비싼 로열층으로 한 채 매입하라고 지시했었죠.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지시하신 대로 진즉 매입했긴 합니다만…….”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TBS 동인 방송국, KBC 한국 방송국, MBS 문학 방송국 할 것 없이 전부 부르십시오.”
“네?”
“동방 일보, 지라시, 중세 일보, 조석 일보, 한강 일보, 한마을 일보, 남국 일보. 전부 부르세요.”
“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는 비서 송창준이다.
우당탕탕. 콰작. 쿵.
뒤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거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제야 송창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펜과 수첩을 들었다.
눈에서는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우리 모델 하우스가 어떤 곳인데! 이 새끼들이 진짜! 다 죽었어!”
행정부에서 위임을 받은 놈들을 막무가내로 막을 수도 없고.
송창준은 속이 쓰라렸다.
“아!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문득 깨달았다.
태수가 왜 기자와 방송국을 부르라고 했는지.
“회장님, 뜻을 알겠습니다. 기자들과 방송국 사람들을 이곳으로 부르겠습니다.”
분명 이 현장을 보여 주고 고발하려는 것이리라.
그래서 송창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의 억울한 강제 철거 현장을 보면 다들 울분을 토할 겁니다. 정권의 횡포가 이렇게나 심하다고 널리 알려야죠!”
순진한 생각이었다.
용역 깡패 뒤로 숨은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이 눈이라도 깜짝할 것 같은가.
그게 무서웠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수가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장소가 틀렸습니다.”
“네?”
태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가 매입한 청일 아파트로 오라고 하세요.”
“네에?”
송창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가 아니라 청일 아파트라니.
“신문 기자와 방송국 사람들을 전부 모아서 남의 아파트 홍보를 해 주겠다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럼 왜요? 우리가 청일 아파트에 갈 일이 뭐가 있다고!”
송창준은 절로 입술이 삐죽 나왔다.
지금 저 행패를 보시고도 참 속도 좋구나 싶다.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나 한 편 찍어야죠.”
“네?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요?”
“기자들을 불렀으면 먼 길 온 수고는 확실하게 보답해 줘야죠. 아마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겁니다.”
송창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태수는 김광록을 돌아봤다.
“오함마와 그라인더, 드릴 같은 거나 잔뜩 챙겨서 따라오세요.”
“어? 그런 건 왜? 뭐에 쓰게?”
“청일 아파트, 부수는 데 쓸 겁니다.”
“아, 그런 거라면 왕창 가져가지.”
단순한 김광록은 별생각 없이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비서 송창준은 속이 터졌다.
“비싼 돈 주고 산 청일 아파트를 부수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래서야 화풀이해도 속만 쓰리잖아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오해하고 있군요.”
태수는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청일 건설이 자금난 때문에 자재를 많이 아꼈다죠?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 벽 속에서 어떤 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진즉 청일 아파트 건설 총 책임자를 불러다 확인한 일이다.
증거 사진까지 봤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어? 그럼 설마…….”
“서두르세요.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 철거 끝나기 전에 우리도 그 집 철거는 끝내야지 않겠습니까.”
비서 송창준은 그제야 주먹을 꽉 쥐며 비장하게 외쳤다.
“1시간만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장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 테니까요!”
부르릉.
태수를 태운 차가 먼저 출발했다.
* * *
청일 아파트 로열 하우스.
11층에 위치한, 32평에 2천만 원짜리 최고급 아파트였다.
보도국 방송 카메라맨들과 신문 기자들이 웅성댔다.
“대체 무슨 일이야?”
“태양 그룹 총수가 왜 청일 아파트를 사서 우리를 불렀대?”
“지금 태양 아파트 모델 하우스인가 견본 주택인가 하는 곳에는 청일의 차기 총수가 용역 깡패를 불러서 개판을 치고 있다던데.”
정보가 모이자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기자들은 서로를 보았다.
두 재벌 그룹 총수들의 싸움에 불려 다니는 신세라니.
그때 태수가 기자들 앞에 섰다.
“이곳에 여러분들을 모으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이 집을 소개하기 위해서죠.”
태수가 품에서 분양 계약서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었다.
웅성대던 사람들이 집중한다.
촤촤촤촤촤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신문 기자들이 펜과 수첩을 꺼내 필기를 시작한다.
방송국 카메라도 돌아간다.
마이크를 따기 위해 긴 봉이 쑥 들어오기도 했다.
“청일 아파트 광고는 다들 아시겠죠?”
“톱스타 강부자가 선전하는 광고 말이죠?”
기자들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청일 아파트 광고는 쫄딱 망한 광고로 남았지만 코미디 프로에서 풍자로 히트를 쳐서 아직도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태수가 그들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파트는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쉬는 곳, 가장 편안해야 할 보금자리죠.”
집에 대한 정론이 펼쳐졌다.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아이가 자라고, 사랑을 나누고, 음식을 만드는 곳.”
기자들은 가만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우리 집이 쓰레기로 꽉 찼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끔찍한 기분일 것이다.
세상에 그 누구도 집이 쓰레기로 가득 차길 바라지 않는다.
“지금부터 이 집을 한 번 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태수가 손을 뻗자 김광록이 오함마를 내어 준다.
태수는 오함마를 단단히 잡고 거실 벽 앞에 섰다.
쿵.
쾅.
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실 벽이 부서졌다.
싸구려 시멘트를 이용했고, 철근도 아주 조금만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부스스.
드러난 벽을 보고 기자들은 경악했다.
“이게 뭐야?”
“이게 최고급 아파트 시공 자재라고?”
벽 안을 채워야 할 철근과 자갈, 시멘트 따위는 별로 없다.
대신 산업용 폐기물과 비닐 같은 쓰레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