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배신
달려오는 구울들을 보며 메르헨이 먼저 손을 썼다. 그녀가 머리 위로 손을 뻗자 그녀의 머리 위로 백염과 청빙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는 고작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였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힘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을 알았기에 에드는 조금 기대가 됐다. 저것의 위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
메르헨이 손을 휘두르자 그건 무시무시한 속도로 구울들을 향해 날아갔다.
화륵! 쩌저적!
두 가지 상반된 소리가 들리며 구울 군단이 달려오던 대로의 절반이 불타고, 절반이 얼어붙었다.
섬뜩할 정도의 위력.
그 한 번의 술법에 적어도 구울 수백 마리가 죽었다.
그렇게 길이 막혔다. 불타고 얼음덩어리가 되어 길이 막혔기에 짐이 될 것 같았지만, 앞장서 달려가던 아린이 방패를 앞으로 내미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녀의 등뒤로 두 가닥의 푸른 날개가 펼쳐졌고, 거대한 방패 형태가 만들어졌다.
콰드득.
그 앞에 닿는 모든 것이 부서져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굳이 메르헨의 신비술이 아니었어도 구울 따위는 일행의 진행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하면서 에드는 심안을 넓게 펼쳤다.
그런 에드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마리포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혼란은 대악마의 승리로 끝난다. 세계는 길고도 긴 암흑기를 거칠 터였다.
그럴 거였는데 인간들이 이렇게 모여 그것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보니 예정된 미래가 바뀔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룡이 되었을 아루스는 신수가 되었고, 대악마의 수도 줄었다.
이미 미래가 바뀌기 시작한 상황. 이대로라면 뭔가 기대를 품어도 될 것 같았다.
마리포사가 에드의 머리카락을 조금 더 강하게 쥐었다.
“아프다. 살살 잡아라.”
에드의 말에 마리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달려!]
에드는 이 미친 요정왕이 얼마나 경험치를 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화살의 시위를 당겼다.
쐐애액!
에드가 쏘아낸 화살이 하늘을 날며 그들을 지켜보던 상급 악마의 머리를 꿰뚫었다. 황급히 회피 기동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를 잃은 상급 악마가 떨어지는 동안 에드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구울들의 파도를 뚫고 나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 압도적인 수는 그 자체로 무기가 될 테니까.
그러나 일행의 앞에선 무의미했다.
돌진하는 아린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던 에드는 전방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대로를 지나 중앙 광장에 도달했을 때 좌측에서 밀려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물로 이뤄진 부대였다. 그것도 중형 마물들.
체고가 적어도 3미터 이상 되는 중형 마물의 집단. 저만한 마물의 집단은 그 자체로 어떤 군대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그것도 그 속도를 정확히 계산해서 아린이 받아낼 수 없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선 것은 아리혼이었다. 그녀가 피리를 꺼내 부는데 이 급박한 순간과 어울리지 않는 구슬픈 곡조였다.
그 소리가 닿자 달려오던 마물들은 감각을 잃었는지 갑자기 옆으로 몸을 돌렸고, 서로 부딪치며 우루루 쓰러졌다.
주술사라 그러더니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쓰러지는 마물들을 그냥 지나친 일행은 중앙 광장을 지나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로 접어들었다.
대악마들도 지금의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이제 보내는 것들은 그 수준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이곳에서 모은 수많은 원념을 그러모아 만든 것들. 구울들을 모아서 만들어 놓은 괴물들을 보고 에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린이 크로셀의 손가락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정도 괴물들이 떼를 지어서 오는 데도 아린의 돌진을 막을 수 없었다.
쾅! 쾅! 쾅!
튕겨 날아가는 괴물들을 보면서 에드는 왕궁을 바라보았다. 전에 왔을 때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숨어만 지냈던 대악마들은 저만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봤자 시간을 끄는 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들을 왜 계속 던지는 것일까?
그만큼 시간을 끌어서 무엇을 하려고?
에드는 옆에서 달리는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별의 악마는 어떤 존재죠?”
헬레나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이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거라면서.
그런 그녀가 에드의 물음에 답했다.
“미래를 보는 권능 덕분에 대악마의 머리 역할을 하던 자였죠.”
“그의 미래시는 어느 정도 능력인가요?”
“권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에요.”
“지금 상황도 예견했을까요?”
“아마도.”
브란트가 별의 악마 힘을 얼마나 깨우쳤는지 모르겠다. 그럼 지금 상황을 알면서도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뭘 위해서?
그때 에드는 문득 검은 안개들이 머리 위로 모여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회오리처럼 모여드는 검은 안개를 보니 뭔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하늘을 찢으려는 거야.]
“하늘을 찢어?”
[그래. 하늘을 찢어서 신들을 끄집어 내릴 생각인 거지.]
“신들이 그 정도로 끌어 내려져?”
[얼마든지, 조건만 맞춰지면.]
에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악마 다섯의 힘은 분명 강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신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만나본 에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대악마들의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저들이 하늘을 찢어 신들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이유가.
그리고 그 이유가 뭐든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닐 터였다. 지금 이것도 시간 계산을 철저히 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들이 모은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 갈려나가면서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려는 계획.
그렇다면 그 계획을 일그러트려야 했다. 그래야 저들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에드는 빠르게 말을 달려 아린의 뒤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아린. 속도를 높일 수 있을까요?”
아린은 에드의 말에 되묻지 않고 신성력을 더 끌어 올렸다. 그런 아린의 뒤편에서 아론이 그 말을 듣고는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아론의 지팡이가 뿜어낸 신성력이 더해지며 아린의 날개가 더욱 거대해졌다.
에드는 그렇게 함에도 속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런 에드의 곁으로 펜드래건이 치고 나가며 말했다.
“더 빨리 가자는 거지?”
“예.”
“내가 길을 열지.”
펜드래건이 대검을 뽑아 들고 말의 속도를 높였다. 아린보다 앞으로 나선 펜드래건의 검 위로 검강이 덧씌워지더니 그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을 조각냈다.
아린은 앞을 막던 적들이 조각나자 부담이 줄어서인지 속도를 더 높였다. 그렇게 그녀가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하자 적들이 더 많이 몰려왔다.
그중에는 검은 마력을 뿜어내는 기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격 자체는 낮지만, 힘만큼은 중급 악마도 넘어섰다.
그건 아마도 그 기사의 바탕이 되는 존재들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왕궁의 근위기사와 친위대등 죽은 기사들의 육신을 이용해 만든 존재들. 그만큼이나 강한 존재들이 고작 시간을 끌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펜드래건이 그것들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미안하다. 내가 늦어 너희를 구하지 못했으니.”
그리 말한 펜드래건의 옆으로 제라드가 뛰쳐나갔다. 처음 보는 배틀 액스를 들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나무로 만든 도끼였다. 고작 저런 게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제라드가 그걸 던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어떤 힘이 담겨 있었는지.
쿠콰콰콰.
제라드의 배틀 액스가 날아가는 길을 따라 태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태풍은 단숨에 어둠의 기사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어둠의 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휘말려 날아가는 것을 보고 에드는 그 도끼에 깃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고대 바람의 정령이 깃든 물건이었다. 고대 정령이 깨어날 거라 하더니 그 도움을 받아왔는지 제라드의 무기는 그 위력이 전에 쓰던 것들과는 수준을 달리했다.
저건 그 자체로 성유물 이상의 위력을 내고 있었다.
에드는 덕분에 수월하게 길이 열린다고 여겼다. 과연 그들의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는지 다급하게 중급 악마 이상이 달려들었지만, 그들 또한 어이없을 정도로 죽어 나갔다.
그렇게 달려가던 중에 왕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곳에서 일어나는 존재가 있었다.
이제는 대악마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저들도 알았나 보다. 대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대악마는 그 신장만 50미터가 넘어갔다.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하늘이 금세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인원 앞에 고작 대악마 하나가 나서서 어쩌자는 건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시간이나 끌 수 있을까?
에드가 말을 꺼낼 것도 없었다.
아리혼이 피리를 부는 순간 나타난 대악마의 발밑에 커다란 늪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악마가 늪에 비틀거릴 때 늪에서 솟구친 것은 악어였다.
그 크기가 악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벌린 입의 크기만 2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악어.
악어는 단숨에 대악마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대악마의 다리가 사라졌고, 그런 대악마를 향해 메르헨의 신비술이 날아들었다.
대악마가 양팔을 휘둘러 백염과 청빙을 막았지만, 덕분에 팔이 타오르고, 반대쪽 팔이 얼어붙었다.
그렇게 상처 입은 대악마에게 제라드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대악마의 가슴에 박힌 도끼에서 일어난 바람이 그 가슴을 쩍 하고 갈랐다.
에드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화살을 날렸다. 에드가 날린 화살이 단숨에 대악마의 머리에 꽂혔다.
이번에 날린 화살은 시트라의 화살.
아스트론은 이미 충분히 강해진 것 같았기에 날린 화살이었다.
시트라의 화살은 그 가진 힘만으로도 충분히 대악마에게 통할 무기였다. 그러나 에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시트라의 화살을 터트렸다.
콰아앙!
크기가 워낙 커다란 대악마였고, 무엇을 이용한 것인지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아 확실한 죽음을 내리려고 한 일이었다.
에드가 터트린 화살에 대악마의 머리가 사라졌고, 경험치가 들어왔다.
시트라의 화살을 날려버린 덕인지 대악마의 몸이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시트라가 알아서 데리고 가는가보다 싶었지만, 에드는 얻은 스탯을 민첩에 투자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서둘렀지만, 늦은 걸까?
에드는 인상을 굳힌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안개가 모두 말려 올라가고 밤하늘에 균열이 생긴다. 별이 떠있는 밤하늘에 균열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대낮보다 세계를 밝힐 빛이었다.
밤이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
그리고 그 일을 왜 벌였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신의 무리한 강림은 세계의 균형을 깬다. 그리고 강제로 강림하는 신 때문에 지금 세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7신이 하늘에서 강림하는 데 그들의 선두에서 가장 뛰어난 신성력을 뿜어내는 것은 아스트론이었다. 그가 뿜어내는 가공할 신성력이 밤하늘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미친···.”
신은 신계에 있어야 한다. 그들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 있는.
그들이 세계에 개입한 순간 세계의 규칙이 비틀리고, 비명을 지른다.
가만두면 저들의 무리한 강림만으로도 세계가 죽을지 모른다.
대악마들의 계획이 그거라고 여긴 순간 생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아스트론의 가슴이 갈라지고 그의 가슴에서 성혈이 쏟아져 내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성혈을 보며 아린과 아론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달리던 수사들도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에서 신이 죽었다. 아스트론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가슴을 가른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시트라가 빙긋 웃었다.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