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어셈블
메르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크 엘프들의 호위를 받는 헬레나도 있었다.
그런데 헬레나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다치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헬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나보다 메르헨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여기 안개를 뚫는데 무리했더니 옛날 상처가 덧나서 그래요.”
악마의 시대 1에서 멀쩡히 대악마를 잡은 것은 펜드래건 밖에 없나 보다. 드레드는 크게 다쳤고, 헬레나도 멀쩡히 잡지는 못했었나 보다.
“그럼 이 사람들 인솔해서 대신전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쉬고 계시죠.”
에드는 메르헨을 돌아보았다. 메르헨의 성장이 눈부시다. 이 정도로 한 번에 성장해 버리면 지금까지 꾸준히 키운 아린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린에 비하면 메르헨이 부족한 것은 확실했다. 범용성이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에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린이다. 그녀는 일행의 방패니까.
하지만 메르헨도 확실한 한 방을 가지고 있다. 전력을 다한 것 같지도 않은데 상급 악마를 잡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분명 대악마에게도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이 됐다.
저것이야말로 신비술사의 능력이다. 특히 대인전이라면 악마 사냥꾼인 자신이 더 뛰어날 수 있지만, 집단전에는 신비술사의 위치가 남다르다.
게다가 메르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팀까지 함께 왔다.
충분히 대악마 사냥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이들.
마음 같아서는 아스트론 교단의 보물 창고라도 털어서 장비를 갖춰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에드는 대신전으로 이동하라고 전한 뒤에 다른 이들을 찾아 움직였다. 메르헨과 헬레나까지 함께 한다면 이들이 대신전까지 안전하리라.
에드는 빈민가를 벗어나 이번에는 상가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아린과 덱스, 디에고가 함께 간 곳이었다.
그들과 합류하려고 달려간 에드는 이미 사람들과 함께 대신전으로 이동하는 아린을 볼 수 있었다. 그녀를 향해 달려간 에드는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형님!”
제라드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에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넌 또 언제 왔냐?”
“사부가 엄청 서두르라고 해서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덕분에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지.”
제라드의 일행을 바라보던 에드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어서 물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야?”
에드의 물음에 제라드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아리혼. 이쪽은 우리 에드 형.”
아리혼이라 불린 여인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품이 넉넉한 옷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맨발에 길쭉한 비녀까지 꽂고 있었는데 긴 속눈썹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눈을 반개한 채 다가온 그녀는 에드의 앞에 서더니 씨익 웃었다.
“그대구나.”
“저를 아십니까?”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신비로운 모습은 처음이었다.
“에드. 숲의 주인이 만나라고 했다.”
“숲의 주인이요?”
에드가 도저히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돌아보자 제라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대 정령을 구하러 갔다가 만났어. 주술사 아리혼이야.”
“주술사?”
에드는 아리혼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테인이 처음에 말했었던 주술사만 아직 만나지 못했었다. 악마 사냥을 하는 주술사.
악마의 시대 2의 주인공이라고 여겼던 이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에드는 아리혼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주술사. 게다가 일행도 없는 것을 보니 노리스처럼 홀로 독존할 수 있는 실력자인가 보다.
어쨌든 고대 정령을 만나러 갔던 일도 잘된 것 같았다. 제라드도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보내기를 잘했던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 다가온 드레드가 에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 오기를 잘했군. 대악마들이 이곳에서 이런 미친 짓을 했을 줄은 몰랐군. 왕도의 이 많은 이들을 모조리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니.”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브란트의 몸에 있는 대악마까지 깨어나 다섯 대악마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에드가 혼자서도 대악마를 잡을 수 있다고 해도 그 군대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으니까.
지금 에드가 가지고 있는 화살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화살 자체가 성유물이다 보니 함부로 낭비할 수 없었다. 상급 악마 정도나 되어야 쓸 수 있었다.
하긴 그보다 못한 자들은 칠채 비도로 다 잡을 수 있다.
“가시죠. 대신전으로.”
에드는 아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만난 거예요?”
“사람들을 구하러 갔을 때 만났어요. 이쪽에 나타난 상급 악마와 싸우는 중에 난입했어요.”
“그래요? 실력은 어때요?”
아린은 뒤를 따라오는 아리혼을 흘끔 보았다.
“굉장해요. 혼자서 군대를 상대할 정도의 실력자더라고요.”
주술사라는 직업은 악마의 시대 1에서 언급 조차 된 적이 없어서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없었는데 실력이 그만하다면 충분히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잘됐네요.”
대악마의 군대와 싸우는 것이 조금은 할 만하겠다 싶어졌다.
대신전에 돌아왔을 때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펜드래건이 세실리아, 마틴과 함께 대신전에 와 있었다.
“어떻게 벌써 도착하신 겁니까?”
펜드래건이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틴이 회복 주문을 말에 계속 걸어줘서 시간은 줄일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애마가 다 죽었어.”
펜드래건의 하소연에 에드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고작 애마라고 할 수 있지만, 저 애마는 펜드래건이 자유 기사 시절부터 함께 했던 말이다.
그걸 알기에 에드는 펜드래건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했다. 펜드래건은 그 반응에 에드를 꼭 안아주고는 시선을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네.”
“오랜만이군.”
펜드래건은 16년 만에 만난 인연들을 보고 다가가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때는 각자 너무 바빴다.
각자 엮인 대악마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악마라는 존재는 그 추적부터가 말도 안 되게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서로 바빴고, 대악마를 죽인 소문은 들었지만,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던 인연이었다.
펜드래건은 헬레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안색이 왜 이래?”
“이 검은 안개 뚫고 들어오느라고.”
펜드래건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는가? 펜드래건도 일행을 몇이나 잃었는지 모른다.
스치듯 지나가며 만난 이들도 있었고, 함게 했다가 헤어졌던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저들 또한 그렇게 힘들게 대악마를 죽여왔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니 멀쩡하기는 힘들었으리라.
“메르헨. 인사해. 이쪽은 펜드래건. 엄마 친구.”
에드는 그 말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헬레나의 저 말이 가진 무게를 메르헨이 알까?
그녀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적은지 안다면 저런 인사가 얼마나 감회 어린가? 악마의 시대 1에서 그녀가 친구라 지칭하는 이들이 한 손도 넉넉히 남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그러고 보니 그때 썸 타던 남자가 둘인데 메르헨의 아빠는 누군가 궁금하기는 했다.
펜드래건은 그 소개를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인사 나눴어. 예전에. 그런데 아더의 딸이야?”
“미쳤어? 아니거든?”
보우먼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었구나.
에드는 메르헨의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을 그렇게 풀었다.
펜드래건도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거 헛소리했군. 미안.”
메르헨은 그런 펜드래건을 빤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그날 만났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괜히 괘씸해 보였다.
“괜찮아요. 종종 엄마에게 들었어요. 평상시에는 나사 빠진 것 같은데 싸울 때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라고요.”
“그럼. 내가 가장 믿을만하지.”
세실리아는 그런 펜드래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왜?”
“뭘 들은 거야? 나사 빠졌다고 복수하고 있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
“어? 그런 거야?”
그러면서도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메르헨도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펜드래건이 고개를 돌려 에드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구해온다는 생각은 잘한 것 같아. 보니까 전하와 공주도 구해냈고.”
펜드래건의 시선이 대신전을 돌아보았다.
“이정도 신성력이라면 악마들이 얼씬도 못 할 테니 이곳으로 공격해 들어올 일은 없을 것 같군. 계획은?”
펜드래건은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호탕한 성격이다. 그런 그가 주도권을 내주는 말에 에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의 시대 1의 주인공부터 악마의 시대 2의 주인공들까지 모두 모였다.
에드는 고개를 돌려 대악마가 있는 왕궁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계획을 무너트려야죠. 왕궁에 있을 대악마가 다섯. 그중 브란트는 그 안에 깃든 대악마만 죽여야 하니 어려운 상황이기는 합니다.”
에드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대악마들도 이미 당한 만큼 한곳에 뭉쳐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각개격파 당하지 않도록 뭉쳐서 적진을 뚫도록 하죠.”
대악마 하나하나는 충분히 상대할만한 강자들이지만,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모여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단숨에 뚫어서 대악마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렇게 대악마들을 만나서 결착을 봐야 한다.
에드의 계획을 들은 펜드래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시원시원한 계획이군. 언제 출발할 거냐?”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고는 결정을 내렸다.
“한 시간 동안 정비를 하고 출발하도록 하죠.”
“좋아.”
각자 일행들과 모여서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에드도 장비들을 꺼내서 점검을 시작했다. 꺼내 놓은 화살의 수를 다시 세보니 그동안 정말 많이 줄어서 316발 밖에 남지 않았다.
에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닦아서 무한의 화살집에 넣었다.
에드가 칠채비도까지 모두 정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아린은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에드는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말없이 옆에 앉았다.
그 기척을 느낀 것인지 아린이 눈을 떴다.
아린의 시선이 에드에게 향했다. 에드는 그런 아린의 시선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곧 끝이네요.”
“그러게요.”
아린은 손을 내밀어 에드의 손을 잡았다.
“다 끝나면 뭐 할 거예요?”
그 물음에 에드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처음에는 현실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일단 이 세계는 너무 심심하고 재미가 없으니까.
물론 살이 떨릴 정도로 치열하게 악마들과 싸우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가시간을 보낼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실로 돌아갈 생각만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현실보다 이곳에서 더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졌으니까.
“같이 여행 다닐래요?”
아린은 그 물음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에드와 만나기로 했으면서도 어딘가 불안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확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될까요?”
에드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스트론도 허락해 주실 거예요.”
마치 그러지 않으면 신이라도 사냥하겠다는 듯 하늘을 쏘아보는 에드의 말에 아린이 농담인 줄 알고 웃음을 터트렸다.
에드는 그런 아린의 손을 당겨서 꼭 안아 주었다.
“시간 다 됐어요. 가요.”
아린과 함께 나온 에드는 그곳에 모인 이들을 돌아보았다.
악마의 시대 1의 주인공인 펜드래건, 드레드, 헬레나.
악마의 시대 2의 주인공인 아린, 제라드, 노리스, 메르헨, 아리혼.
그리고 그들의 팀원들까지 다한 인원에 신전을 지킬 사제들을 제외한 수사들까지 모두 이번 전투에 나서기로 했다. 그들도 이번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어 보였다.
에드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서며 말했다.
“가죠.”
뭔가를 눈치챈 것인지 대신전 주위로 펼쳐진 신성 보호막을 향해 달려오는 수많은 구울의 군단을 향해 일행이 탄 말이 돌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