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각성
아마 악마의 시대 3가 있다면 이 아이는 주인공 확정이라고 할 정도로 넘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크 엘프는 고대의 종족 중 하나.
대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움직였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확실히 유의미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종족이 움직였다는 것이니까.
이들이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으니 다음에 다시 나오기 좋지 않을까 싶었다.
에드가 품고 있는 아이를 돌려주자 글렌시아가 아이를 품에 안고는 물었다.
“아이의 이름은 뭐가 좋을까요?”
에드는 그 질문에 머쓱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지어줄 만큼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그런 에드를 향해 헬레나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됐잖아요. 수르판을 죽여준 당신에게는 그 아이의 이름을 붙여줄 자격이 있어요. 다크 엘프는 은원이 확실하니까요.”
에드는 글렌시아의 품에 안겨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릴리아나.”
문득 떠오른 이름이었기에 그리 말해주었다. 그 별빛을 닮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떠오른 이름이었다.
글렌시아가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릴리아나. 어떻니?”
릴리아나라는 이름에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는 모습에 글렌시아가 에드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릴리아나도 좋아하네요.”
에드는 릴리아나를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아이들이 마음에 들었던 적은 없었는데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심안을 인지할 정도의 재능을 지녀서 그런지 몰라도 괜히 예뻐 보였다.
에드는 릴리아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그보다 이곳 정리 좀 하죠.”
대악마 수르판은 제물로 바치기 전에 나침반을 올려서 확인해 보았다. 나침반을 통해서 대악마 수르판을 기록했으니 앞으로는 대악마에게만 나침반이 향할 터.
수르판이 몸이 약해져서 대악마 중에 가장 약한 녀석이었다고 하면 최소한 이에 비견되는 대악마만이 나침반에 잡힐 터였다.
나침반을 기록하고 수르판을 잘라서 아스트론과 시트라에게 각기 제물로 바쳤다.
아론도 아스트론의 옆에서 같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화가 타올라 검푸른 불빛이 마을 전체를 비췄다.
헬레나는 메르헨과 손을 잡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성기사랑 함께 한 적 있니?”
“아뇨. 처음이에요.”
“나도 성기사라면 만나봤지만, 저만한 수준의 성기사는 처음이구나.”
“그렇게 대단한가요?”
메르헨은 추방 술식에 집중하느라 아린이 어떻게 싸우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린이 얼마나 대단한 성기사인지 몰랐는데 지금 저렇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또 다른 힘을 보니 감탄이 절로 일었다.
메르헨은 신비술사로 세계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신비를 이해해 신비술을 펼치는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은 확실히 달랐다.
마력과는 완전히 다른 힘.
그 또한 새로운 신비와 마찬가지였다. 그걸 바라보면서 메르헨은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헬레나는 메르헨의 몽롱한 시선과 그녀의 전신에서 넘실 거리는 마력의 흐름을 읽고는 눈을 크게 떴다.
신비술사들에게도 크게 성장하는 기회가 종종 있다. 그건 일종의 깨달음인데 그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헬레나는 수많은 악마를 잡으면서 마력의 질이 크게 높아진 덕분에 벽을 만나지 못하고 수월하게 강해졌다. 그렇기에 이런 깨달음조차 겪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그 어머니로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대로라면 벽을 넘는 순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가문 내에서도 그 경지에 오른 이는 한 명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메르헨이 벽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헬레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돌려 하늘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의 폭포를 바라보았다.
같은 것을 봐도 깨달음을 얻는 자는 정해져 있다.
딸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새삼 부러우면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물을 모두 바쳤지만, 다시 신이 강림하는 일은 없었다. 아린과 론멜이 눈에 띄게 성장한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아니, 없어 보였다.
갑자기 주변의 마력이 한곳으로 쏠려가지 않았다면 에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몰려간 가공할 마력이 한점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에드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잡아끌었다.
다들 마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기에 지금 보는 장면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세계를 이루는 근간 중 하나인 마력이 이렇게 한 점으로 모여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마력은 메르헨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마력은 돌고 돌며 메르헨에게 스며들었고, 그녀의 몸이 점점 떠올랐다. 그것은 신비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기도를 올리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메르헨은 허공에서 마력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에드의 곁으로 다가온 디에고가 물었다.
“형. 저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물음에 에드는 쉽게 답해주지 못했다. 그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으니까. 저런 건 악마의 시대 1에서도 나온 적이 없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지?
그렇게 마력을 흡수하던 메르헨이 허공에서 편안히 눕혀지더니 천천히 내려왔다. 그렇게 내려온 메르헨의 주위로 마력이 순환하고 있었다.
에드가 다가가자 헬레나가 그 앞을 막아섰다.
“더 다가가면 안 돼요. 벽을 넘는 중이니까요.”
에드는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메르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공으로 마력이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시간은 그녀에게 필요한 시간이에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군이 강해지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니까요.”
시기나 질투 없이 순수하게 아군의 성장을 기뻐해 주는 모습에 헬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메르헨은 소중한 인연을 얻었네요.”
“제게 소중한 인연이죠.”
악마의 시대 1을 즐겼고, 이제 악마의 시대 2를 살아가는 그에게 주인공 역의 인물들은 다 소중한 인연이다. 이들이 있기에 악마의 시대에 종말을 선고할 수 있을 테니.
아린은 에드가 함께하면서 급성장하고 있다고 여겼다.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서 월등한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노리스는 쌍룡사에서 나올 때부터 혼자 무쌍을 찍었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으니까.
그랬던 것이 메르헨이 이렇게 기연을 얻으면서 폭풍 성장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고 있었다.
도고일척 마고일장(道高一尺 魔高一丈)이라는데 메르헨이 이렇게 강해지고 있다면 대체 악마들은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군이 강해지는 것은 언제나 반길 일이다.
메르헨은 하루가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하긴 신비술사로서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경지에 오르는 일이 하루아침에 될 리가 있겠는가?
어디까지 경지가 오르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미 대륙은 대혼란에 들어간 상황.
나침반이 북동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면 대악마가 또 나타났다는 뜻. 놈을 잡기 위해서 일행들이 움직여야 한다.
에드는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신비술사로서 이미 정점에 올랐던 그녀가 곁에 있다면 적어도 메르헨이 위험할 일은 없을 터.
“저희는 이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헬레나는 그걸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도움은 잊지 않겠어요.”
에드는 그 말에 씨익 웃었다.
“다아! 빠아!”
에드는 글렌시아의 품에 안긴 릴리아나를 보았다. 다크 엘프의 성장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그래도 고작 하루 만에 말을 트더니 에드만 보면 손을 바동거리며 말을 건다.
에드는 솔직히 미안했다. 만약 릴리아나에게 악마의 잔재가 남아있었다면 손을 썼을지도 모르니까.
“아빠!”
에드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쉿. 누구 앞길 막을 일 있어?”
에드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린도 웃으며 다가와서는 에드의 옆에 섰다.
“한 번 안아줘요.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에드는 그 말에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밀고 있던 릴리아나를 안아 준 에드는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 입으로 가져가는 릴리아나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일반 아기와 달라 보이지만, 그래도 세균이 득실거릴 에드의 손가락을 빨아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에드는 릴리아나의 코를 슥슥 만져주며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릴리아나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에드에게도 릴리아나는 특별했다. 그러니 한 번 정도 만나러 가는 것도 좋겠지.
에드는 릴리아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화살통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꺼냈다. 수백 발 중의 하나지만, 그 자체로만 본다면 총본회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의 성유물이었다.
에드는 그 화살과 샐러맨더의 검까지 꺼내서 릴리아나의 품에 안겨줬다.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 대악마를 다 잡거든 좋은 선물 주마.”
에드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에드는 릴리아나를 화살과 샐러맨더의 검과 함께 글렌시아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메르헨의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카일.”
남부 귀족의 아들이었던 그는 에드가 남부를 휩쓸고, 트라비아 왕국에서 그곳의 귀족들을 정리했다. 아마도 왕국에 알린다면 그의 귀족 작위가 복귀될지도 모를 일.
하지만 그는 메르헨을 따라 악마 사냥을 해왔다. 헬레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끝났으니 이제 저들이 어떻게 할지는 메르헨의 뜻에 달린 일.
“메르헨을 부탁해.”
메르헨은 뛰어난 신비술사지만, 사회 경험이 적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나 할까?
그런 메르헨을 이곳까지 이끌고 온 것이 카일이니 그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돌보겠습니다.”
에드는 카일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디에고가 소환한 닉에 올라탔다. 아린의 뒤에 탄 에드가 남은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닉이 날개를 펄럭이며 솟구쳤다.
글렌시아는 날아오르는 닉과 퓨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헬레나. 너도 떠날 거지?”
“메르헨이 깨어나거든 그래야지.”
글렌시아는 릴리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해. 릴리아나 때문에 나는 못 도와줘.”
헬레나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멀어지는 에드와 아린 일행을 보면서 말했다.
“릴리아나를 잘 도와줘. 에드도 느낀 것 같았지만, 그 아이의 재능은 상상 이상이야.”
글렌시아는 헬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못 도와준다고 했지. 갈리우스가 도와줄 거야.”
헬레나는 고개를 돌려 다크 엘프 무리를 이끄는 갈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만한 실력자가 도와준다면 대악마를 상대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리라.
“고마워.”
“네가 날 도와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릴리아나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헬레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헬레나가 글렌시아의 어깨를 안아줄 때 뒤편에서 마력의 폭풍이 일었다. 헬레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폭풍이었고, 그 끝에서 메르헨이 눈을 뜨고 있었다.
헬레나는 자신의 최전성기 시절보다 더 강한 마력을 품은 메르헨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직도 멍한지 고개를 돌리다가 헬레나를 보고는 말했다.
“엄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벽을 넘은 거지. 축하한다. 메르헨.”
메르헨의 왼손에서는 새하얀 백염이, 그녀의 왼손에는 푸른 색의 청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제야 메르헨은 자신이 벽을 넘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생각하는 대로 신비술을 펼칠 수 있었다.
에드와 아린, 노리스를 보면서 느꼈던 좌절감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다.
이거야말로 세계의 신비 중 하나에 접속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