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드레드
일격에 ‘격리’에 쓰인 나무를 쪼갠다는 것은 드루이드가 직접 펼쳤을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단 ‘격리’에 쓰인 나무는 그 종 자체가 특별해서 어지간하면 그렇게 쉽게 벨 수가 없을 텐데 제라드가 해낸 덕분에 라그록스를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 에드가 쏜 화살이 유달리 빛난 것은 아스트론이 힘을 실어준 것으로 생각되니까.
에드는 화살들을 모두 수거하고는 제라드를 만나러 갔다. 제라드는 미소를 지은 채 에드를 바라보았다.
“결국, 형이 잡았네.”
에드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기도를 올리는 두 명과 자신이 얻은 새로운 힘에 방방 뛰고 있는 덱스가 눈에 들어왔다. 디에고도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는 강력한 마법을 써서인지 지쳐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리스는 석장을 옆에다 꽂아놓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들 모두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라그록스를 잡는 것은 요원했을 일이다. 그만큼 라그록스는 강했다.
대악마가 게임 상에서도 보스답게 어려웠는데 이번에 직접 만나보니 그들은 뭔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스킬보다도 더 중요하게 사용하는 거리를 보는 능력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으니.
심안을 개발하고 모든 감각이 발달해 거의 육감처럼 발동된 것이 아니었다면 보이지 않는 라그록스의 공격에 몸이 조각 났을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일행이 필요했다. 특히나 대악마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내 줄 수 있는 아린이.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모두가 잡은 거지.”
“결정타는 형이 날렸잖아.”
막타는 양보 못 하지. 덕분에 레벨이 3이나 올랐는데.
“네 덕분이다.”
“흐흐. 봤지? 나도 이번에는 처음 써 본 기술인데 시르케가 도와줬어.”
신비술사의 도움까지 얻어서 펼친 일격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야만 전사는 힘만으로 싸우는 것 같지만, 신비술사 시르케와의 조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에드는 제라드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잘했어. 호텔로 돌아가면 잔금 치를게.”
노리스나 아린에 비하면 분명 부족해 보이지만, 제라드도 성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자신이 함께 하면서 키워주지 않는 데도 이만큼이나 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녀석도 주인공급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역시 계산이 깔끔해서 좋아. 그런데 시르케가 이 나무 가지가 필요하다는데 가져도 좋아?”
“그렇게 해.”
‘격리’에 사용되는 나무들은 모두가 보통 나무들이 아니다. 그걸 이용하면 좋은 무기들을 만들 수 있다.
제라드가 대지 파괴자를 들고 가서 가장 중요한 가지를 찾아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고 해도 모든 나뭇가지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시르케가 잘 알아서 고를 것 같았기에 그들에게는 신경을 끄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어째서인지 아린의 기도가 무척이나 길어지고 있었다.
“여긴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먼저들 호텔로 돌아가 있어요.”
“그래. 먼저 간다.”
닉과 퓨리를 타고 모두 돌아갔고, 제라드도 가장 중요한 가지를 잘라서 돌아갔다.
에드는 아린의 곁에 앉아서 무기들을 살폈다. 이번에 화살들이 모두 성유물로 올라갔고, 레벨도 올랐기에 전과는 비할 것 없이 강해졌다.
에드는 스텟을 민첩에 투자하며 옆에서 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아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기도를 마친 그녀는 눈을 떴다가 옆에 에드만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어요?”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요.”
에드는 태연하게 답했지만, 아린은 쓴웃음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에드는 그런 그녀에게 물주머니를 꺼내서 건넸다.
아린은 물주머니가 텅텅 비도록 벌컥거리며 물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새로운 예언을 받았어요.”
“새로운 예언요?”
퇴마행은 아스트론이 내린 예언에 따라서 움직인 결과였다. 대악마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 라그록스를 잡아냈지만, 노리스의 예언에 따르면 이번에는 대악마 전부가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고작 기둥 하나 잘라내는 정도로 종말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16년 전에 대악마 셋이 죽었다. 그렇게 여겼는데 어째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아 걱정되었다.
특히 라그록스가 어째서인지 드루이드 드레드의 ‘격리’를 사용한 것을 보니 어떤 식으로든 이번 일과 연관이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에드의 화살을 부러트린 자도 조사해 봐야 했다.
아무리 먼 거리에서 쏘았다고 해도 에드가 쏜 화살이다. 아무나 그걸 부러트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스탯을 아직 찍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그 화살은 눈으로 좇기에도 어려울 만큼 빨랐으니까.
이 화살을 그리 간단히 막아낸 것은 물론이고 에드가 다가갔을 때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그 자도 보통 내기가 아니었다.
여러모로 암담한 상황에서 내려온 예언이라고 하니 오히려 갈 길을 제시해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만약 퇴마행이 끝났다고 그녀의 여정이 끝나버렸다면 오히려 곤란했으리라.
자신도 얼마나 많은 대악마를 잡아야 할지 몰랐으니까. 그녀가 아스트론 교단으로 돌아가 버리기라도 했다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대악마와의 싸움은 끝난 게 아닌 것 같아요.”
에드는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리스의 예언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상대해야 할 자 중에 네프사엘도 있으니까.
네프사엘은 또 얼마나 강할지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예언이었나요?”
아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답했다.
“우릴 찾아올 이가 있다고 했어요.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신들은 예언할 때 왜 이런 식으로 하는 걸까? 마치 다 알려주면 뭔가 문제라도 된다는 듯이.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천기누설은 원래 힘든 일이었으니까.
이것도 대악마를 제물로 바쳤으니 새로운 예언을 내려준 건지도 모른다.
에드는 아린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찾아온다는 두루뭉술한 예언이었지만, 찾아올 이가 있다고 한다면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까지는 혈마석을 쫓아서 계속 돌아만 다녔으니까.
“그럼 호텔로 돌아갈까요?”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는 말에 에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와 함께 폐가를 떠났다. 먼저 떠난 이들이 조치했는지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렇게 걸어간 일행은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린을 방에 데려다준 에드는 제라드를 찾아갔다. 제라드는 어쩐 일로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에드가 그에게 가지고 온 금패를 내줬다. 약속했던 대로 남은 금패를 모두 건네주자 그걸 받은 제라드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짭짤한 데?”
“그래서 앞으로 뭐할 거야?”
“뭐하긴 계속해서 악마를 잡아볼까 생각 중이야. 고래보다 비싼 건 놈이 유일하니까.”
바다 사나이들인 야만 전사들은 고래 사냥을 주로 한다. 하지만 고래보다도 돈이 되는 것은 역시나 악마 사냥이기는 하다. 악마 사냥이 큰돈은 안 됐었는데 등급이 높은 악마들은 잡아서 교단에만 가져다줘도 많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에드는 잠시 제라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퇴마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 한 번 더 대악마를 잡으러 갈지도 모르는데 같이 갈래?”
“보수는?”
제라드는 능숙한 협상가가 되어 물었다.
“선금 1만. 잡으면 2만 더.”
“3만짜리 보수라. 대악마 잡는 거 쉽지 않던데?”
“다른 놈들은 조금 덜할 수도 있고, 더할 수도 있고.”
“무슨 뜻이야?”
“대악마는 자신의 계파를 가지고 있어. 상급 악마도 데리고 있고, 중급 악마들도 데리고 있지. 수로 따지자면 이번에 상대한 라그록스의 수하들이 더 많기는 한데 격은 그들이 더 높을 거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제라드는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싸우면서 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르케가 감을 잡은 것 같아. 다음에 만나는 놈들은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제라드의 팀도 전보다는 조금 더 강해지려나 보다.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어때?”
“그 정도 가격이라면 싸워야지.”
야만 전사는 싸움과 역경을 좋아한다. 그러니 바다에 도전하는 미친 짓을 즐기는 자들이지. 고래 사냥하며 바다에 빠져 죽더라도 웃으며 죽는 자들이니까.
그런데 바다만큼이나 위험한 악마와 싸울 기회를 돈까지 받고 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드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제라드는 분명 강해지고 있지만, 아린과 론멜의 성장 속도는 따라오지 못한다. 이번에 그 둘은 크게 성장했으니 제라드의 도움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처럼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에드는 자신의 방에 도착해서 장비들을 점검했다. 무한의 화살집에 넣어두었던 화살들을 꺼내서 침대 위에 수북히 쌓아 놓으니 벌써 배가 부른 느낌이다.
이것들의 위력은 전에 애용하던 아스트라와 시트라의 화살급이다. 그만한 화살이 수백 발. 라그록스에게 쇄폭시를 써보니 이 정도로도 즉살은 힘들어 보였다.
‘격리’가 끝났을 때 아스트론이 화살에 신성력을 보태주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공격.
하지만 양으로 때려 부으면 된다. 라그록스의 팔도 넝마로 만들 정도의 위력을 지녔으니까. 몇 발만 제대로 맞추면 대악마도 죽일 수 있으리라.
궁수가 가장 빨리 강해지는 법은 돈지랄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살에 투자하는 법인데 최고의 화살을 다발로 얻었다.
“이거면 될까?”
그게 문제다. 대악마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들을 상대하려면 이게 부족할지도 모른다.
에드는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화살들을 살펴봤다. 라그록스의 몸에 꽂아 넣고 성화로 제련된 거라 그런지 손댈 곳이 없었다.
에드는 화살들을 살피며 하나씩 무한의 화살집에 넣었다. 그렇게 화살들을 모두 화살집에 넣었을 때 에드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심안에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 흐릿한 존재감이라고는 해도 갑작스레 나타난 이가 있었다.
에드의 주위로 어느새 칠채비도가 떠 있었다. 그런 에드의 시선이 닿는 곳.
창문에 걸터앉아 있는 사내가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
펜드래건과 함께 3영웅에 이름이 올라있는 드루이드 드레드가 그곳에 있었다.
붉은 눈을 한 채로.
활을 집어 들며 칠채비도를 날렸다. 그런데 칠채비도가 허공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드루이드의 환영술식이다. 에드는 인상을 굳힌 채 창문을 향해 활을 겨눈 채 칠채비도를 회수했다.
그때 다시 불쑥 나타난 것은 조금 전과 같은 흐릿한 존재감의 드레드였다.
[이제 대화를 할 준비가 됐나?]
에드는 문득 아린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군가 찾아올 거라는 예언.
그게 설마 악마에게 물든 전작 주인공일 줄은 몰랐지만.
“악마에게 홀린 건가?”
[···아직 싸우는 중이지.]
“네비로스?”
[나에 대해 잘 아는군.]
그때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는 일행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방에 들어오자 방이 좁아터질 것만 같았다. 에드는 드레드의 환영을 보며 물었다.
“대화를 나눠보지.”
환영의 존재감이 뚜렷해지더니 그가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드루이드 드레드.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