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전화위복
덱스의 상태는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런 덱스에게 신성 회복 주문을 걸어주는 것.
아린의 신성 회복 주문으로도 과연 살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덱스는 피를 왈칵 쏟으면서도 에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봤···냐? 내가 한 방 먹···이는 거?”
말하면서도 왈칵 피가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니 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말하지 말아요. 치료하는 거 안 보여요?”
에드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덱스는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덱스도 아린의 회복 주문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지만, 자신은 지금 죽음의 문턱을 밟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다. 이건 신이라도 돌아오지 않는 한 살아나기 힘들다.
그렇게 믿었기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싶은 거다.
노예로 잡혀 와 노예 검투사로 평생을 살아왔던 자신은 챔피언에 오른 이후로 더는 자극을 받지 못했다. 노예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도저히 상대되지 않았으니.
그런 그를 노예에서 구해주고 살 떨릴 상대들을 만나게 해준 이 일행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울컥 또 핏물이 올라와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덱스는 이것도 마지막에 어울린다고 여겼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쑥쓰러웠으니까.
그래서 눈을 감으려고 할 때 아린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죽겠다고?”
덱스는 아린의 눈이 푸른 하늘을 닮았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여긴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건 아린이 아니다.
아린의 몸속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와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아린의 손에서 몸으로 전해 들어오는 신성력의 질이 달라졌다. 어떻게든 상처를 수복하려고 아등바등 힘을 쓰던 신성력이 아니라 강제로 상처를 재생시키는 무지막지한 신성력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덱스는 강제로 끌려 나오는 중이었다. 믿기 힘든 기적이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상대의 격을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덱스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에 신성력이 깃들면서 단순히 회복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수련했기에 덱스는 알았다. 자신의 근육이 품은 힘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고 있다는 것을.
잠시 후 아린이 손을 뗐지만, 덱스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주먹을 꾹 움켜쥐며 자신이 얻은 힘에 몸서리쳤다.
진즉에 이런 힘이 있었다면 대악마 목도 벨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을 것을 깨닫고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덱스!”
다들 놀라서 외치는 소리에 덱스는 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린 건지 평상시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요?”
덱스는 이 기적을 자신만 안 것인가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다른 이들의 눈빛은 걱정만 가득했다. 그랬기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아스트론의 영광은 대낮에 푸른 하늘을 보며 떠올릴 수 있지만, 밤하늘을 보면서도 잠시 그의 이름을 되뇐 덱스는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의 피를 쓱 닦은 덱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덱스가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을 본 에드는 아린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신성력은 과연 놀라울 정도였고, ‘격리’가 풀리면서 한층 높은 연결을 통해서 덱스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 회복 주문으로도 상처를 회복하는 시간이 더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대악마에게 당한 상처가 그리 쉽게 치유가 될 리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린이 입을 연 순간 그녀의 신성력의 질이 달라졌다. 상처에 남아 있는 마기를 단숨에 밀어내고 회복을 시키니 덱스가 일어났다.
에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뭔가 달라진 것은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시트라처럼 자신을 찾아온 것도 아니고 아스트론은 아린의 몸에 들어와 덱스를 치료해주고 유유히 떠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행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에드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일행 중 다친 것은 덱스가 유일했다. 하긴 스쳐도 죽을 판에 라그록스에게 공격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덱스도 무리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위험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건 그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사경을 헤맨 덱스가 아스트론의 축복으로 살아났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누굴까?
자신이야 이미 경험치를 얻었으니 다음 공을 세운 이를 살펴보자고 여기니 아린과 론멜이 눈에 들어왔다.
론멜의 신기술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일행들이 이만큼 살아남았던 것은 아린이 전면에서 라그록스의 공격을 모두 받아냈기 때문이리라.
“아린. 론멜. 라그록스를 제물로 바치도록 하죠. 반으로 잘라서 하는 게 어떨까요?”
론멜은 그 말을 들었을 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건 처음부터 아스트론 교단의 예언에 따른 퇴마행이었잖아. 시트라께서도 이해해주실 거야. 아린이 제물로 바치면 좋겠어.”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시트라가 어떤 신인데 대악마를 제물로 바치는 걸 마다한단 말인가?
괜히 그랬다가 시트라의 분노라도 사면 어쩌려고.
에드가 아린을 돌아보자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번에는 론멜 경의 공이 컸어요. 같이 제물로 바치죠.”
론멜은 그 말을 듣고는 성검을 들어 죽은 라그록스의 팔을 잘라냈다.
“그럼 저는 이 정도로 하죠.”
사실 그 정도만 해도 굉장한 양이었다. 손가락 하나로도 많은 것을 얻어냈었으니.
에드는 성기사 둘이 나섰을 때 무한의 화살집에서 화살들을 잡아 뽑으며 말했다.
“대신 제물로 바치기 전에 이것 좀.”
에드는 그리 말하고 무한의 화살집에 들어있는 한철 화살들을 다발로 꺼내서 라그록스의 몸에 박아 넣었다.
이번에 그가 애용하던 화살들이 모두 박살 났다.
아펠라의 이빨과 아스트론의 성유물, 시트라의 성유물이 모두.
남은 화살이라고는 시트라의 화살뿐이니 이번에 화살을 강화해볼 생각이었다.
에드가 라그록스의 몸에 수백 발이 넘는 화살을 박아 넣는 것을 보고 론멜과 아린은 서로를 돌아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드가 왜 저걸 하려는지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가 쓰는 기술을 보니 화살이 폭발했는데 성유물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니 이번에 성유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린과 론멜이 각기 대악마의 시체 조각을 가지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대악마의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하늘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축복이 내려질 터.
에드는 그래서 모든 화살을 이번에 성유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적어도 이번에 잃은 화살 세 개 수준까지는 올라오리라 믿었다.
둘의 기도와 함께 푸르고 검은 불꽃이 라그록스의 육체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밤하늘을 밝히는 푸른 빛의 기둥과 어둠조차 잡아먹을 만큼 검은빛의 기둥이 동시에 떨어졌다.
그걸 보면서 에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시트라가 분명히 기분 나빠할 것 같았다. 아스트론과 사이도 좋지 않아 보였는데.
에드는 그런 빛의 기둥을 보면서도 살짝 불안했다.
여러 신 중에 에드가 도움을 받는 것은 시트라와 아스트론.
그 둘의 사이가 안 좋아 보여서 안타까웠다. 둘이 합심해서 도와주면 대악마를 잡기 더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빛의 기둥들.
에드는 가만히 그 기둥들을 바라보았다. 그 빛의 기둥 안에서 아린과 론멜의 몸에 깃드는 신성력은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질도, 양도.
에드가 얻었던 경험치만큼 저들도 얻는 것이 아닐까?
에드는 론멜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성검도 검은빛을 빨아들이는 것을 보니 이렇게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성검은 상대의 힘을 빼앗아 전해주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보니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론멜이 펼친 찌르기는 점진적 가속을 통한 찌르기. 대악마에게도 통하는 기술이었는데 이번 일로 통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론멜이 입고 있는 풀플레이트 아머도 검은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작 팔 하나라고 해도 대악마의 팔이다. 손가락도 아닌 팔. 그것도 본체의 팔.
기대해볼만 하리라.
그리고 아린도 푸른빛에 휘감겨 있으니 그녀의 성유물도 성장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화살들도.
덱스는 두 개의 빛의 축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축복이 그려내는 동심원이 서로 만나고 있었다.
마치 싸우듯 서로 맞물린 빛의 축복을 바라보던 덱스는 그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 보았다. 검은빛은 덱스의 발을 타고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푸른빛은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덱스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전해지는 빛이 자신의 상처를 수복하며 새로운 힘을 주었던 것과 같은 빛이라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그 빛이 전해주는 것을 만끽하고 있는데 그를 스쳐 지나갔던 검은 빛도 돌아와 몸으로 스며들었다.
덱스는 경쟁하듯 들어오는 힘에 눈을 감고 그 힘들을 인지했다.
자신이 성기사도 아니다 보니 이걸 받아들여 봐야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몰랐지만, 강해질 방법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덱스는 자신의 몸에 휘몰아치는 두 개의 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까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해왔었는데 이 힘은 자신을 단숨에 끌어 올려주고 있었다.
덱스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빛의 기둥이 사라졌고, 두 명의 성기사가 기도를 올리는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왜?”
“어떻게 된 겁니까?”
당황한 건 에드가 더 당황했다. 둘이 기도를 하던 중에 쏟아져 내리던 신성력이 주위로 흩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덱스가 갑자기 받아들였다.
그것도 한 사람의 몸에 두 가지 신성력을.
성기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는 둘째치고 그가 무사한지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덱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미소를 짓고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뭔진 모르겠는데 신들의 마음에 들었나 봐. 덕분에 몸이 가벼워졌어.”
에드는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덱스가 강해진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 고개를 돌린 에드의 시선은 라그록스의 시체가 성화에 타서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놓인 수백 발의 화살들이었다.
그 화살들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스트론이 받아간 몸이 컸기에 그쪽이 더 많았는데 그쪽은 한철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시트라에게 제물로 바친 팔에 꽂은 화살촉은 모두 검게 빛나고 있었다.
성유물을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해도 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좋은 무기를 손에 넣었다.
에드가 화살 하나를 집어 들다가 뒤로 돌아 화살을 날렸다. 레벨이 오른 스텟을 찍지는 않았지만, 감각이 좋아져서 심안의 범위가 넓어졌기에 뭔가가 그 끝에 걸려 화살을 날렸다.
상대가 상관없는 이라면 이기어시로 방향을 틀 생각으로 화살을 날렸는데 상대가 사라졌다. 마치 자신이 잘못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잘못 느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날린 화살이 부러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