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결착
덱스가 뿜어내는 피는 사경을 헤맬 정도다. 그걸 본 순간 에드는 이번 싸움을 길게 끌고 갈 수 없음을 알았다.
아린의 신성 회복 주문이라면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빠르게 놈을 죽이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에드가 화살을 쏟아냈지만, 본체로 변한 라그록스는 거침없이 손을 휘둘러 날아오는 모든 화살을 쳐냈다. 본체의 여섯 개의 팔은 눈에 보이는 대신 가공할 마력으로 감싸고 있어서인지 신성력을 두른 화살도 통하지 않았다.
라그록스가 입을 크게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흉측하게 보이는 미소.
“크흐흐흐. 벌레들이 발버둥 쳐봐야 벌레지.”
덱스가 피투성이가 되고 나자 일행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때 가장 후미에 있던 디에고가 닉과 퓨리를 자신의 곁으로 부르고는 말했다.
“제게 시간을 주세요.”
“얼마든지.”
어차피 사령을 부리는 디에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괜히 사령이 역소환되기라도 한다면 디에고가 입을 피해가 만만치 않았으니까.
에드가 아린에게 소리쳤다.
“가요!”
에드의 외침에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어 성검을 회수하고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방패를 들고 돌진하는 아린의 뒤에 따라붙으며 에드는 본체로 돌아간 라그록스를 보면서 자신의 능력이 돌아왔음을 느꼈다.
인간의 형태로 있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든 손이 거리를 보는 능력에도 잡히지 않더니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자 그 감각이 돌아왔다.
그러니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돌진하는 거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질 때 가장 먼저 아린이 재차 가속하며 방패 돌진을 펼쳤다. 급격하게 빨라진 아린을 향해 라그록스의 팔이 날아들었다.
측면에서 휘두르는 공격은 무척이나 빨랐는데 에드는 그런 라그록스의 팔꿈치 안쪽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에드가 쏘아낸 화살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드는 팔의 오금 부분에 꽂혔다.
그리고 아린은 날아드는 방패 돌진 중에 자세를 고쳐 잡고 방패를 바닥에 박아넣으며 몸을 그 아래로 숨겼다.
콰칵!
날아들던 팔이 방패에 맞고 사선으로 튕겨 올라갈 때 에드는 쇄폭시를 사용했다.
콰앙!
팔 안쪽 오금에 꽂혔던 화살이 폭발하며 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라그록스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며 폭풍처럼 팔을 휘둘러 왔다.
카캉!
거추장스러운 아린을 먼저 치우려는 듯 몰아치는 공격을 론멜과 노리스가 막아냈다. 성검과 석장을 이용해 좌우에서 아린을 노리지 못하게 막아내는 둘을 보며 에드는 칠채비도를 띄워 올렸다.
칠채비도가 떠오르자 라그록스가 코웃음을 쳤다. 인간 형태일 때 칠채비도에 당했던 것이 떠오른 탓이다.
“우습구나!”
라그록스의 전신에서 무서울 정도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힘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그 풍압에 뒤로 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에드는 굳건히 그걸 견디며 칠채비도를 조종했다.
극한에 이른 집중력은 활의 시위를 한껏 당긴 상태에서도 칠채비도를 일곱 방향으로 날릴 수 있었다. 칠채비도가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라그록스가 그것들을 잡아 부수려고 하는 데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고작 2초.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에드는 라그록스의 몸에 칠채비도를 모두 꽂아넣는 데 성공했다. 시트라의 권능이 담긴 칠채비도는 각자의 능력을 발현해서 라그록스의 힘을 깎아냈다.
그중에 에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흡혈과 파사였다. 흡혈로 잃었던 마력이 빠르게 차올랐고, 파사의 비도가 박힌 부위는 라그록스의 마력 갑옷에 구멍이 났다.
그곳이 곧 약점이다.
에드가 당긴 화살을 놓기 전에 노리스가 먼저 선공을 퍼부었다. 석장을 바닥에 꽂더니 양손을 합장했다가 펼치는데 그의 미간에 새겨진 쌍룡의 문신이 빛을 발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싶어서 잠시 대기했다.
노리스의 양손에서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그것은 높이만 4미터에 달하는 그의 손바닥을 닮아 있었다. 그렇게 커다란 손바닥이 그대로 라그록스를 향해 뻗어갔다.
라그록스가 코웃음을 치며 팔을 휘둘렀지만, 곧 불길의 손바닥이 라그록스의 본체가 휘두른 팔에 맞고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라그록스는 거세게 밀어붙이다가 결국 그 공격에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물러난다고 공격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팔은 길이가 무한정 길어지기도 해서 상식을 넘어선 방향으로도 공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리스의 불 손바닥이 라그록스의 움직임을 제한한 것은 맞았다. 그렇게 라그록스가 물러날 때 론멜이 그를 향해 성검을 앞으로 한 채 돌진했다.
얼핏 보기에는 미친 짓처럼 보였다. 검을 정면으로 내놓고 돌진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라그록스도 비웃으며 팔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어 론멜을 벌레처럼 짓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론멜의 움직임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아니,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돌진인 줄 알았는데 점진적으로 가속했다. 그렇게 돌진한 론멜은 성검으로 라그록스의 옆구리를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라그록스는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주먹을 휘둘렀다. 본체에 있는 여섯 개의 팔도 강력하지만, 가장 강한 공격은 결국 양손으로 하는 공격이다.
라그록스가 휘두른 공격을 론멜은 가뿐하게 피해냈다.
론멜의 성검은 상대를 베어낼수록 사용자에게 강한 힘을 주는데 라그록스를 베어냈더니 전해지는 힘이 상당했다. 그래서 론멜은 그 공격을 피하고는 바닥에 쓰러진 덱스를 집어 들고 몸을 빼냈다.
대신 그렇게 달리느라 일행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라그록스가 론멜을 향해 팔을 뻗으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칠채비도에 의한 노화의 저주로 느려져 론멜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게 론멜이 몸을 빼내는 것을 보고 절로 탄성이 터졌다. 론멜이 이 정도로 잘해줄 줄은 몰랐다.
“크흐흐흐. 이것 봐라?”
본체로 현신하고도 제대로 손을 못 쓰고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라그록스는 더는 힘을 아낄 때가 아님을 알았다. 라그록스가 자신의 옆구리에서 나는 피를 훔쳤다.
라그록스의 피는 결정이 되었다. 그걸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게 혈마석이라는 것을.
어쩐지 혈마석이 계속 나온다고 했더니 라그록스의 피가 혈마석이 된다면 그 혈마석의 악마들이 그렇게 많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때 라그록스가 손을 들어 자신의 손에 들린 혈마석을 삼켰다.
그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라그록스의 전신에 붉은 핏줄이 일어나더니 마력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자신의 피로 만든 혈마석을 삼켰는 데도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저 혈마석에는 대체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때 아린이 해머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
해머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바닥을 타고 라그록스를 향해 밀려갔다. 라그록스는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신성력을 그냥 발로 짓밟았다.
라그록스의 단단한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솟구쳤지만, 놈은 그대로 돌진해 와 아린을 후려쳤다.
아린이 황급히 방패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날아갔다. 흘려내려고 했지만,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괴력 탓이었다.
아린이 튕겨 날아오는 것을 노리스가 받아내었는데 그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쏟아낸 불 손바닥도 상당한 내력을 소모하는 기술로 보였으니까.
에드는 라그록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이미 앞을 막았던 이들은 하나둘 전선에서 물러난 상황. 지금 당장은 아린도 노리스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에드가 한껏 당기고 있는 화살은 시트라의 성유물인 화살. 밀러가 가져다주었던 이 화살로 라그록스를 죽일 생각이다. 대악마는 어지간한 것으로는 쇄폭시를 써도 치명타는 입힐 수 있지만, 확실한 죽음을 내리기 어려우니 내린 선택이었다.
에드가 화살을 쏘기 전에 뒤에서 디에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에드는 심안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디에고는 후안을 소환한 후에 긴 시간을 들여서 만들었던 마법을 발현했다. 크리스탈 해골까지 꺼내서 준비한 마법이 펼쳐졌다.
디에고가 펼친 마법은 커다란 마법진을 라그록스의 발아래에 만들어냈다. 라그록스가 그걸 보고 코웃음을 치며 발을 들어올려 짓밟으려고 할 때 바닥에서 원혼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사슬이 튀어 올랐다.
그 사슬은 라그록스의 몸을 휘감았다. 원혼을 이용한 사령술. 그 위력은 대악마조차 붙들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렇게 붙들린 라그록스를 향해 에드가 당기고 있던 화살을 놓았다. 시트라의 성유물이 검은 선을 그으며 날아갔다.
라그록스가 황급히 움직이려고 했지만, 원혼으로 만든 사슬은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에드는 그런 라그록스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뒈져.”
에드가 쏘아낸 화살이 라그록스의 가슴에 박혔다. 라그록스의 가슴에 박힌 화살이 쇄폭시로 폭발했다. 성유물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위력은 확실했다.
콰앙!
큰 폭발음과 함께 라그록스의 가슴에 구멍이 났다. 머리를 들이밀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덩치가 커서 그 정도 구멍이라고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라그록스가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혔다.
“크흐흐흐. 이건 꽤 아프네?”
그리 말한 라그록스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주변의 모두를 압살할 정도로 강력한 마기였다.
지옥의 문이 열렸을 때 맡았던 것만큼 강력한 마기였다. 에드는 다시 보이기 시작한 간격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을 짓누르는 마기는 그것만으로 위험했다.
라그록스를 휘감고 있던 원혼들이 그 마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마기가 아니다. 이 마기는 이 ‘격리’된 곳을 지옥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이곳에 지옥이 열린다는 얘기다.
“미친 새끼가.”
자신의 마기를 제물로 지옥의 문을 열려고 하는 거다. 마기를 잃은 악마는 그 격이 낮아진다. 그걸 알면서도 일을 벌이는 중이다.
그 전에 놈을 죽여야 했다. 에드가 아스트론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쏘려고 할 때 뒤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꾸아앙!
뭔가 싶어 그쪽을 본 에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라드가 휘두른 도끼가 일격에 ‘격리’시킨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쪼개진 나무가 넘어가면서 ‘격리’가 해제된다.
‘격리’가 해제되면 이 정도 마기의 농도로는 지옥의 문을 열 수 없다. 그걸 깨달은 라그록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제라드가 그 시선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난 내 할 일 했다!”
제라드가 일행과 함께 물러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라그록스가 흥분해서 쫓아올 것을 염려해 물러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잘한 일이었다.
에드는 한껏 당겼던 아스트론의 화살을 쐈다. 그 화살이 라그록스에게 날아들었다. 라그록스가 팔을 들어 앞을 막았지만, 그 모든 팔을 뚫어냈다.
이 정도 위력은 나올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을 때 화살촉이 유달리 푸른 빛을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날아든 화살이 라그록스에게 꽂히는 순간 쇄폭시를 사용했다. 지금은 성유물이라고 아낄 때가 아니었다.
콰아앙!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력한 폭발. 그것도 한 지점이 아니라 사방으로 터져나간 쇄폭시에 라그록스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사람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
그리고 레벨이 올랐다. 단번에 3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