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반가운 얼굴
숲의 원혼들을 모조리 사라지게 한 덕분에 굳이 정화하지 않아도 자연히 회복될 터.
에드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라 길을 떠났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펠만 시였다. 트라비아 왕국 내에서 칭왕을 했던 펠만 국왕이 다스리던 펠만 시.
그곳에는 트라비아 왕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에드 일행이 도착하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여 보고를 올렸고 성문이 열리고 나온 것은 기사와 기병들이었다. 아스트론의 신성력을 뿜어내는 마차를 보는 그들의 눈에 적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앞을 막아섰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아린이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상대했다.
“아스트론의 검인 아린이라고 합니다. 마젤타 왕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기사는 그 말에 오른 주먹을 가슴에 대고는 답했다.
“저는 반란 진압군의 찰레스라고 합니다. 성기사님이라 죽음의 숲을 건너올 수 있었군요.”
“죽음의 숲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예. 그것 때문에 아스트론 교단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워낙에 대규모 정화 작업이 필요한 터라 준비해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꽤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죽음의 숲에 있는 원혼들을 모두 거뒀으니 위험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자연적으로 숲이 정화되기를 기다리기보다 대규모 정화 마법을 한 번 거친다면 숲이 회복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 터.
아린은 다행이라 여겼다.
“귀한 분들이신데 안으로 드시죠. 지휘관께서도 아스트론의 성기사님을 뵙는다면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신세 지도록 할게요.”
기사가 인도해주었기에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에드는 다크에 탄 채 그 성을 바라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애기살을 이용해서 펠만 국왕을 죽였던 곳.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돌아오게 됐다.
반란 진압군의 지휘관을 만나러 가는 길. 마젤타 왕국에서는 론멜의 도움이 없으면 높은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지만, 이곳에서는 아린 덕분에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궁에 들어서니 트라비아 왕국의 군대가 들어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약탈 따위는 없었던 것을 보면 진압군의 지휘관이 군을 잘 통솔하고 있었나 보다.
왕궁의 대전으로 들어간 일행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를 볼 수 있었다.
“에드?”
“에밀리아?”
에드도 그녀가 이곳에 지휘관으로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왕도에 있으셔야 할 분이 여기는 왜 와 있는 거죠?”
불쑥 끼어들어 질문을 던진 것은 아린이었다. 어딘가 날 선 것 같은 질문에 에드가 돌아볼 때 에밀리아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반란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왔어요. 에드님 덕분에 마젤타 왕국군을 막을 수 있었죠.”
“호른 숲이 불타오르고 5만의 병력이 죽어 원혼이 된 것은 알고 있죠?”
“예.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스트론 교단에서 마틴 대주교님이 죽음의 숲 정화 의식을 맡아주신다고 하셨어요.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돈은 왕가에서 지급하기로 했어요.”
에밀리아는 전에 만났을 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해졌고, 어딘가 여유가 있었다.
에드는 아린과 에밀리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애써 주신 점 고맙습니다. 저희는 퇴마행을 가던 중이라 오늘 하루 쉬고 떠날 예정입니다.”
에밀리아는 그 말에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셨군요. 그럼 편히 쉬시도록 궁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 호텔도 괜찮거든요.”
“그럼 저녁에 제가 찾아가죠.”
“그래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네요. 그럼 저녁에 보도록 하죠.”
에드의 대답에 에밀리아는 활짝 웃었고, 아린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펠만 시는 마젤타 왕국과 트라비아 왕국의 교통로와 같은 곳. 두 왕국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시절에는 펠만 시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지만, 죽음의 숲이 생겨나 서로 교류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 활기가 많이 죽었다.
마젤타 왕국과의 교류가 끊어져서 도시가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했다. 여행에 쓸 건량을 비롯한 요리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서 마차에 실은 후에 식당에 모여 앉았다.
에드는 어딘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아린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주문해 주었다.
“아린. 이 호텔의 양갈비 스테이크를 마음에 들어 했었죠?”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요?”
아린이 물어보자 에드가 씨익 웃었다. 원래 기억력이 좋았지만, 이곳에서 레벨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점점 기억력이 좋아졌다. 게다가 아린이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고기다 보니 외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죠. 우리가 간 호텔이나 여관에서 아린이 먹고 맛있다고 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요.”
사실 아린의 입은 고급지지 않아서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다고 했다. 고기면 되니까.
아린은 에드의 대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에드가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아린이 양갈비 스테이크를 잘라 먹는 사이에 에드는 이 호텔에서 아린이 시켰던 술도 주문해 주었다.
그것에 아린의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것을 보고 에드가 다행이라 여겼을 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린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에드를 한 번 보고는 나온 술을 술잔에 따르고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후에 호텔에 들어온 에밀리아는 수호 기사만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에드가 일어나서 반기자 에밀리아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에드의 옆에 앉았다.
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에밀리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술잔을 에드에게 내밀었다. 에드가 술병을 집어서 술을 따라주려 할 때 아린이 그 술병을 낚아채서는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라줬다.
에밀리아는 아린이 따라준 술잔에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린 경. 고마워요.”
에드는 둘의 사이에 껴서 어쩐지 부담스러운 식사를 이어가야 했다.
그런 에드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테인이 둘 사이에 꼈다.
“에밀리아 공주. 진압이 끝났으니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는 거요?”
에밀리아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압군은 이제 달리아 왕국으로 떠나야 해요. 그 일은 굳이 제가 가지 않아도 되어서 저는 먼저 떠나기로 했어요.”
“먼저 떠난다니 무슨 말이오?”
에밀리아는 술잔을 비우고는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행을 쭉 둘러보더니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런데 가시는 길까지 같이 가는 건 어떨까 싶네요.”
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에드가 먼저 말을 잘랐다.
“그건 안 됩니다.”
“예?”
에드가 나서서 안 된다고 할 줄은 몰랐기에 에밀리아도 당황스러워했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악마와 싸우는 중입니다. 트라비아 왕국은 네프사엘의 영역이며 대악마인 네프사엘은 죽음의 숲에서 이미 저희 일행을 노렸습니다. 빙의한 채로 나타났지만, 굉장히 위험했죠.”
에밀리아가 그 말에 인상을 굳힌 채 에드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왕국 내에서 대악마가 설치고 다니는 건가요?”
“예. 네프사엘은 물론이고 새롭게 대악마의 위에 오르고자 트라비아 왕국과 마젤타 왕국을 오가면서 사고를 치는 라그록스라는 악마도 저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주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에밀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에드가 자신을 말리는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아린의 입가에 서린 저 승자의 미소가 속을 긁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의 옆에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저 성기사다. 자신은 싸우는 것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공주이자 왕위 계승 서열이 제일 높다. 여왕이 될 수만 있다면 성기사가 해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들어줄 수 있다.
“어쩔 수 없죠. 하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해주세요.”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왕가에 연락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술이나 마실까요?”
에밀리아가 호기롭게 외치는 말에 에드는 순순히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에밀리아도 에드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말했다.
“같이 마셔요.”
“그러죠.”
에드와 에밀리아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고 아린은 픽 웃음을 흘렸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에드와의 술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는데 호기롭게 그와 대작하는 모습을 보니 오래지 않아서 뻗을 것을 알았다.
창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을 찔러왔기에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에밀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나셨습니까?”
“계속 옆에 있었어?”
“예. 여기 물 좀 드시죠.”
에밀리아는 쓴웃음을 짓고는 잔을 받아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에드와 대작하던 기억은 있는데 중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에밀리아는 반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뭐 실수한 건 없지?”
“정신 바짝 차리고 계시더군요. 그냥 기절해서 테이블에 머리 박은 것 외에 실수하신 것은 없습니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큰 실수는 안 한 것 같지만, 창피해서 다음에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에드님은?”
“아침 일찍 떠났습니다.”
에밀리아는 창문을 열고는 펠만 시의 도로를 바라보았다.
“바로 가실 겁니까?”
“아니. 에드님과 같이 갈 수 없으니 마틴 대주교가 오면 대정화 작업까지 마치고 왕도로 갈 거야.”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에밀리아는 귀밑으로 내려오는 남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는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먼저 떠난 에드를 만날 길은 없지만, 자신이 여왕이 된다면 어떻게든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에밀리아는 아린보다도 술을 못 마셨다. 굳이 잠들어 버린 그녀에게 인사하기보다 그냥 계획대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아린은 뭔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그녀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말을 몰던 에드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어떤 대화도 없이 그냥 걷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말을 몰던 에드는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요.”
“저도 들었어요.”
마차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말발굽 소리까지 들렸는데 아린이 갑자기 말을 달려나갔다.
“아린!”
에드가 그녀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고 하나 굳이 그녀가 그렇게 달려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녀를 쫓아갔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니 알겠다.
이쪽에서 달려가니 반대편에서도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스트론의 성기사였다.
“아린 경!”
“막내야!”
반갑게 인사하는 둘을 보고 아린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그 둘은 에드도 낯이 익은 이들이었다. 아론을 구할 때 만났던 성기사 말콤과 알론이었다.
에드와 눈이 마주친 둘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에드도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다가오는 일행을 볼 수 있었다.
아린이 만든 마차보다도 뛰어난 신성력을 내뿜는 마차. 대주교급 이상이나 탈 수 있다고 한 마차였다. 마차가 멈추고 그 안에서 내리는 이가 눈에 띄었다.
중년에 이른 실눈의 사내. 그를 본 순간 에드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펜드래건으로 플레이할 때 함께 한 신관. 대악마를 죽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대주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기억하기로 최연소 대주교가 된 이였다.
그런 그의 뒤로 마차에서 내리는 이도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에드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에드님! 아린!”
활짝 웃는 아론이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