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재능
치안대장 빌리안은 눈앞의 시체를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펠만 국왕이 관자놀이에 작은 구멍이 난 채로 의자에 고개를 뒤로 젖혀 기댄 채 죽어 있었다.
“총 몇 명이지?”
“스물두 명이 확인되었습니다.”
펠만 국왕과 그의 수호 기사들의 이마에도 저 짧은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내성 내에서만 죽은 이들이 스물두 명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예외 없이 저 짧은 화살이 박혀있었다.
쇠뇌를 이용해 쏜 거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쇠뇌를 이용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수호 기사들을 죽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내성의 요리사부터 시작해서 스물두 명의 머리에 박힌 이 짧은 화살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에 의해서 펠만 국왕이 죽었다. 그를 호위하는 수신 호위는 물론이고 도저히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이들까지.
낮에는 빈인 엘피아가 성기사의 손에 죽었다고 하더니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죽었다.
“성기사는 그대로 떠났다고 했었지?”
“예. 남문을 통해 낮에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빈을 죽인 것이 성기사였고, 그녀가 악마라고 했지. 그건 전하께서 인정하셨다고 했나?”
“예.”
빌리안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 빌리안의 뒤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옷을 반쯤 풀어헤친 채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이는 펠만 국왕의 아들, 벨드였다.
“그러니까 확실히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는 거지?”
빌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벨드는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내가 왕이네?”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그리되실 겁니다.”
“절차는 무슨.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그럼 치안대장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조사 열심히 해.”
벨드가 빌리안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옆구리에 낀 여자와 희희낙락하며 서재를 나섰다.
“이제 내가 국왕이래. 너 빈으로 삼아줄까?”
“정말요?”
“크하하하하.”
빌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펠만 국왕은 살아생전 뛰어난 장수였다. 그런 그가 반응조차 못하고 죽었다면 적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는 뜻.
그 공격은 외부에서 날아왔다. 술을 마셔서 반응을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화살이라는 무기를 쓴 이상 가까이에서 죽인 것은 아닐 터.
빌리안은 창밖으로 보이는 남쪽 탑을 바라보았다. 탑과의 거리를 생각한 빌리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활이 닿을 거리도 아닐뿐더러 이 거리를 날아와서 정확하게 관자놀이에 박힌다는 것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미치겠군.”
호른 숲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헤르셀 장군이 에밀리아에게 보고했다.
“지휘관님의 말씀대로 적군이 숲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숲에서 나올 수 있는 길들을 포위한 덕분에 적들이 화공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궤멸을 면치 못할 겁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에밀리아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고 은은한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불타오르는 호른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젤타 왕국군 5만이 저 숲에서 죽어 나갈 테지만, 마젤타 왕국에서는 그것을 따질 수 없다. 펠만 국왕이 베리코 왕국을 세웠다고 하지만 트라비아 왕국이 보기에는 그저 반역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마젤타 왕국군이 개입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들은 트라비아 왕국과 전면전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만한 병력이 타죽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병력이라고 밝힐 수가 없으리라.
연락을 받고 호른 숲을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해서 움직일 때 적들의 척후병 눈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매복하고 있던 병력은 움직이지 않았고, 화공은 성공적이었다.
호른 숲 전체를 태우는 끔찍한 일이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적들을 일망타진했다.
에밀리아는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호른 숲에 적들이 매복해 있다는 연락은 테인이 보냈지만, 말머리에 에드가 가지고 온 정보라고 했다. 그가 트라비아 왕국군에 전하라고 한 정보.
에밀리아는 그 정보를 받고 새삼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정보를 받지 못하고 숲에 진입했다가 매복을 당했다면 그 피해는 끔찍했을 터.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있었지만,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어쩌면 공주의 위를 박탈당했을 수도 있는 일.
하지만 그가 전해준 정보 덕분에 자신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이번 진압을 무사히 마무리한다면 왕위 계승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어째서인지 에밀리아는 이번에 얻게 될 공보다 그가 자신을 신경 써준다는 것이 더 기뻤다.
이곳이 게임이라면 그 게임의 흐름에 굵직하게 연관된 자들은 경험치가 많은 걸까?
펠만 국왕은 그를 죽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음에도 그를 죽이고 얻은 경험치는 역대급이었다. 중급 악마조차 우습게 볼 정도로 막대한 경험치.
덕분에 레벨이 오를 정도였으니까.
에드는 그것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했다.
왕들만 잡아볼까? 이런 식으로 레벨이 오른다면 대악마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펠만 국왕이야 아직 제대로 왕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서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고, 암살도 가능했다. 다른 왕국의 왕도는 그 방비가 남다르다.
왕궁의 크기만 해도 펠만 시만 한 크기니까. 그 안쪽에 왕의 방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엠마가 소리쳐 불렀다.
“모두 저녁 드세요.”
펠만 시에서 떠나온 지 사흘. 아직 마젤타 왕국까지 가려면 오 일은 더 말을 달려야 할 거리였다.
계곡을 끼고 쉴 수 있는 곳이 나왔기에 일행은 오늘 이곳에서 쉬고 가기로 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엠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모두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야영 중에 먹는 음식들이란 수준 높은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저 몸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스튜에 딱딱한 빵을 녹여 먹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밀가루 반죽을 해서 팬에 얇게 펴서 구운 후에 그 안에 야채와 햄을 썰어 넣었다. 햄도 살짝 숯불에 구워서 그런지 향이 마음에 들었다.
전병처럼 말아서 준 음식이었는데 다들 하나씩 받아들자 엠마가 디에고의 옆에 앉았다. 브란트는 그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의 눈치를 보는 건 디에고뿐이다.
“드셔 보세요.”
에드는 옆에 앉은 브란트의 손을 두드려주었다. 사실 브란트도 자신이 폭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 가능하면 엠마의 곁에서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엠마가 디에고와 함께 앉았다.
에드는 브란트가 디에고에게 눈을 부라릴 때 한입을 먹어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계곡이 있으니 물을 구하기 쉬웠다고 해도 밀가루를 반죽해서 이렇게 준비해 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마을이나 도시도 아니고 야영 중에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맛이라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형님. 그렇게 눈에 힘주지 말고 먹어봐요. 맛있어요.”
그 말에 브란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에드는 빵을 먹으며 말했다.
“더그에게 요리를 배우는 것 같더니 역시 손재주가 남달라서 그런지 맛있어요.”
“이건 더그에게 배운 게 아닐세.”
에드가 바라보자 브란트는 가만히 빵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아련해서 에드는 먼저 말을 건네지 못했다.
브란트가 그 빵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돌이 빵이라고 내 아내가 만들어주던 빵이지.”
브란트의 시선이 디에고와 마주 보고 웃으며 빵을 먹는 엠마에게 향했다.
“고작 다섯 살 때 일이었는데 아직도 기억하다니 놀랍군.”
브란트에게도 이건 추억의 빵이다. 그 기억을 되살려 빵을 만든 엠마를 바라본 브란트는 빵을 한 입 베어 물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걱우걱 빵을 입에 우겨 넣었다. 그렇게 빵을 모조리 씹어 삼킨 브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간 나면 대련하지 않겠나?”
브란트의 물음에 에드가 답하기도 전에 덱스가 일어났다.
“나랑 합시다. 온몸이 근질거리니까.”
브란트가 그런 덱스를 보며 잠시 주저했다. 브란트는 아직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악마의 힘을 사용할 때만 강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근력 자체가 크게 오른 상황이었으니까.
“괜찮아요. 어디 부러져도 아린이 있으니까요.”
덱스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나야 치료받으면 되지만, 브란트는 치료도 못 받는데 괜찮을까?”
“형님은 회복력이 많이 올라가서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붙어 봐.”
덱스가 검을 뽑아 들고, 손목을 휙휙 돌리며 말했다.
“한 판 붙어봅시다.”
브란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드는 어딘가 불안했다. 지금 브란트는 디에고에게 쌓인 분노를 터트릴 곳을 찾고 있었으니까.
에드라면야 다 받아줄 수 있지만 덱스가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마주한 둘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둘의 대결에 시선을 주던 에드의 곁으로 테인이 다가왔다. 테인은 에드의 옆에 앉아서는 입을 열었다.
“소식이 늦지 않게 전해졌네. 마젤타 왕국군 5만은 전멸했다고 하더군.”
“다행이네요.”
“내가 왕국군의 지휘관이 에밀리아라고 말했던가?”
“에밀리아가 지휘관으로 나왔다고요?”
테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매복을 당했다면 큰 피해를 봤을 텐데 자네 덕분에 큰 공을 세우게 됐으니 왕위 계승권을 공고히 했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차기 왕위는 그녀가 갖을 것 같군.”
에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왕위에 오르면 여러모로 편해진다.
“끄아악!”
잠시 테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이에 브란트에게 일격을 허용한 덱스가 훨훨 날아 계곡물에 빠졌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뻗은 건가 싶어 보는데 브란트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악마의 힘을 사용할 때나 예지력을 발휘했는데 지금은 인간형일 때도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근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브란트에게 덱스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푸! 나 수영 못 해! 구해 줘!”
덱스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브란트가 사슬을 던졌다. 브란트가 던진 사슬을 덱스가 잡자 단번에 그를 끌어올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덱스가 기침을 하는데 피가 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가온 아린이 그의 가슴에 대고 신성 회복 주문을 걸어주었다. 덱스는 신성 회복 주문으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나더니 브란트에게 다가갔다.
브란트가 빤히 바라보자 덱스가 활짝 웃으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형씨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완전 반했어!”
브란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포옹을 푼 덱스가 검을 들며 말했다.
“다시 붙어 봅시다.”
브란트는 자신에게 갈비뼈가 으스러져 버렸음에도 회복하자마자 다시 달려드는 덱스를 보고 마음 편히 상대해주기로 했다.
“다시 붙어보자고!”
예지력을 가진 브란트에게 다시 일격에 나가떨어진 덱스는 아린의 치료를 받고 다시 달려들었다.
예지력을 가진 브란트에게 공격이 통하기는 요원한 일이라고 여기고 바라보는데 뜻밖에 이번에는 덱스도 브란트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건 브란트도 보고 있던 이들도 놀라게 했는데 덱스는 그 뒤로 브란트와 공방을 이어갔다.
금세 나가떨어질 거로 여기고 회복 주문을 준비하던 아린이 놀라서 빤히 바라보는 동안 에드도 감탄하고 있었다. 브란트는 예지력으로 덱스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는데 덱스는 그런 것도 없이 브란트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피하면서 반격을 넣고 있었다.
능력이 아닌 재능이다.
오직 재능만으로 덱스는 브란트의 능력에 대응하고 있었다. 사실 유물급 장비의 능력만으로 이 일행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검투사 챔피언이었던 그의 재능은 에드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투쟁심과 맞물린 재능이 지금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