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암살
죽은 악마의 시체에서 혈마석을 꺼내고 아린이 혈마석을 쥐고 추적을 시작했을 때 펠만 국왕이 성에서 나왔다. 부상 당한 수호 기사들을 내버려 둔 채 홀로 내려온 펠만 국왕은 바닥에 구르는 엘피아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루비처럼 결정화한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알던 아름다운 빈의 얼굴이 아니었다.
펠만 국왕은 그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린과 그녀를 지키고 서 있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저 둘은 악마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진짜로 악마를 찾아서 죽였다.
생각해 보니 잘못하면 악마의 손에 놀아나 왕국을 말아먹을 뻔하지 않았던가?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고맙군.”
자신의 빈이 죽고, 수호 기사 열 명의 허벅지에 화살을 박아 넣었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적어도 펠만은 그 정도 인성은 되었다.
왕후는 물론이고 다른 빈들에게조차 시선을 주지 못할 만큼 엘피아에게 빠져 살았다. 그게 알고 보니 악마의 꾐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아닙니다. 퇴마를 하도록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펠만은 쓴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허락해 준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 말 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얘기하게.”
“그리하겠습니다.”
펠만은 더는 보고 있지 못하겠다는 듯 뒤돌아 떠나갔고, 에드는 아린이 성화로 악마를 태우는 것까지 바라보았다. 아린은 신성력을 갈무리하며 에드를 돌아보았다.
“위치는 파악했어요. 그런데 남쪽을 향하는 걸 보니 국경을 넘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젤타 왕국이란 말입니까?”
“아마도요.”
마젤타 왕국이라고 아스트론 교단의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은 아스트론 교단보다 시트라 교단이 국교로 정해져 있는 곳이다.
켈베로스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고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말뿐인 상황이다.
어쩌면 라그록스도 그걸 알고 마젤타로 이동한 걸까?
“우선은 돌아가죠.”
“그래요.”
에드는 아린과 함께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걸으며 물었다.
“펠만 국왕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나요?”
“고맙다고 하고 갔습니다.”
아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걷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브란트는 어떻게 하죠?”
“형님이요? 폭주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우리 둘이 함께한다면 폭주해도 제압할 수 있을 거예요.”
아린은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폭주했을 때 피아를 구분 못 한다는 것도 충분히 문제가 되지만, 멀쩡한 기사단을 궤멸시켰다고 했잖아요.”
에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드에게 있어서 펠만 국왕 휘하의 근위 기사단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아린이 생각하기에는 다른가 보다.
“악마의 힘을 지닌 이가 악마를 상대로 그 힘을 써서 죄를 씻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악마의 힘에 홀려서 폭주한 채로 인간들을 죽였다면 과연 그와 함께 하는 게 옳을까요?”
아린의 물음은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브란트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
에드는 아린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다.
브란트는 자신이 영입을 부탁한 이였다. 그는 주인공이 될 운명이었던 이였고, 그 운명이 비틀린 것이 자신 때문임을 알았다.
그렇게 영입했던 이였는데 가는 길은 분명 아린의 길과 겹치지 않는다. 그는 말 그대로 악마의 힘으로 악마를 찢어 죽이는 수라의 길.
성기사의 길과 맞을 수는 없었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겠어요.”
아린은 에드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것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에드가 말을 이었다.
“힘의 폭주란 사고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형님의 죄업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형님은 폭탄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그 폭탄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저와 아린뿐이고요.”
아린은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일행 중 폭탄이 있는데 그를 놓아주는 순간 언제 어디서 기사단이 죽어 나간 것과 같은 혈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걸 막을 수 있으면서도 막지 않는 것은 과연 성기사다운 일일까?
그것까지 이해한 아린은 엠마를 떠올렸다.
일행에서 브란트가 나간다고 하면 그는 엠마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다시 폭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엠마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엠마도 엠마지만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인다면 정신이 들었을 때 브란트도 살아갈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알 수 있었다.
엠마를 위해서라도 일행에서 브란트를 내보낼 수 없음을.
“좋아요. 하지만 다시 폭주해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때는 브란트를 내보낼 거예요. 엠마는 내보내지 않고요.”
“폭주하지 않을지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폭주한다고 해도 사고 치지 못하게 잘 살필게요.”
에드의 대답을 들은 아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타박하려고 한 말 아니에요. 그때는 같이 잘해 봐요.”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성을 벗어나기 전에 테인과 덱스, 더그를 만날 수 있었다.
덱스는 팔짱을 낀 채 투덜거리다가 에드와 아린을 보고는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내성 안쪽에서 소란이 있던데 한바탕 한 거야?”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 하나를 잡았어.”
“아오! 그냥 탈옥하자니까. 영감이 말리는 바람에.”
테인은 뒷짐을 지고 걸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린이 와서 한 마디 한 덕분에 편하게 있다 나오지 않았나?”
“싸울 기회를 놓쳤잖아.”
덱스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에드의 곁으로 와서는 주위를 살피며 속삭였다.
“그래서 국왕은 언제 칠 거야?”
“그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우리가 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까.”
“진짜? 그럼 난 언제 싸워?”
“이번에는 참아 줘. 다음에는 네가 싸울 기회 팍팍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정면으로 들어가서 목을 딸 생각은 없는 거네.”
“미쳤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덱스는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그냥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말에 김이 샌 것 같았다.
“오늘은 술이나 퍼마시고 잠이나 자야겠다.”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떠날 거야.”
“뭐?”
에드는 덱스와 더 말하지 않고 테인에게 다가갔다.
“그보다 혹시 트라비아 왕국군에 연락 넣을 수 있습니까?”
“못할 건 없지. 그런데 왜 그러나?”
에드는 타로스의 탑을 공략할 때 브란트에게 다비드를 맡기고 그들이 모아놓은 정보를 열람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아낸 것이 있었다.
마젤타 왕국군은 이미 남부 귀족 연합의 인도로 들어와 매복한 상황. 그리고 정찰대를 몇 배로 늘려서 트라비아 왕국군의 이목을 가린 상황이다.
그냥 둔다면 트라비아 왕국군이 위험하다.
에드가 테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펠만 시로 오는 길에 있는 호른 숲에 마젤타 왕국군 5만이 매복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뒤에 도착한 것 같은데 트라비아 왕국군이 근처로 왔다가 매복을 당하면 피해가 클 거예요.”
“오호!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건가?”
“어제 타로스의 탑을 털었거든요. 그곳에서 나온 정보에요.”
“일단 바로 연락해 보겠네만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
테인이 그리 말하고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우리는 말을 인계받아서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란트는 이미 빈민가로 몸을 피한 상황.
디에고가 엠마와 함께 있다가 일행을 맞이했다.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당장 펠만 시를 떠나도록 하죠.”
“당장요?”
에드는 아린과 눈을 마주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펠만 국왕이 아끼는 빈을 죽였어요.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지만 국왕이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까 몸을 피해야죠.”
“브란트는 왜 여기 없는 건가?”
“어제 일이 조금 있었어요. 제가 빈민가에서 브란트를 찾아서 데리고 올 테니까 남문에서 만나도록 하죠.”
“알겠네.”
에드는 더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튼튼한 말 한 마리만 구해주세요. 브란트가 탈 말로요.”
브란트는 쇠사슬을 팔에 칭칭 감고 다니는 만큼 체중이 무거우니 어설픈 말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튼튼한 말로 구해달라고 전한 에드는 먼저 다크를 타고 빈민가로 향했다.
빈민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숨어서 나오지 않기에 어렵지 않게 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말을 몰아서 간 곳은 전에 묵었던 폐가.
그곳에 브란트가 로브를 눌러쓴 채로 앉아 있었다.
“형님.”
브란트가 부름에 고개를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드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브란트는 밖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간 일은 잘됐어?”
“악마를 죽였고, 다음 목적지도 알아냈죠. 그래서 지금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랬나?”
브란트는 에드의 곁으로 와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겠더군. 디에고가 정말 목숨을 걸었다는 것도.”
에드도 그 말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폐가 주위가 부서진 것을 보면 보통 흉험하게 싸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근처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까.
“어쩐지 악마 상태가 별로더라니 디에고가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혔나 보네요.”
“그러니 엠마가 그렇게 챙겨주는 거군.”
뭔가 서운해하는 말투에 에드가 웃으며 말했다.
“타요. 남문에서 모두 만나기로 했어요.”
“걸어가도 되네.”
“제 다크가 생각보다 튼튼해요. 타세요.”
브란트는 에드가 하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말에 올랐다. 에드는 그를 뒤에 태우고 말을 몰아 빈민가를 벗어났다. 남문에 도착하니 이미 일행의 마차와 함께 새로운 갈색 말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브란트가 그걸 보고 에드에게 물었다.
“저건 누구 말인가?”
“형님 말이요. 마차에 함께 타고 있으면 위험하니까요.”
에드의 말을 들은 브란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말은 탈 줄 아세요?”
브란트는 대답 대신 다크에서 훌쩍 뛰어내린 후에 달려가 갈색 말에 올랐다. 능숙하게 말에 오른 그가 말고삐를 잡아채더니 곧장 앞장서 달려갔다.
척 봐도 보통 기마술이 아니기에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일행은 앞장선 브란트를 따라 남문을 벗어났고 그렇게 펠만 시를 떠났다.
그날 밤. 에드는 디에고와 함께 펠만 시로 돌아왔다. 가는 도중에 에드는 디에고와 함께 따로 몸을 빼냈고, 숲속에 몸을 숨겼다가 날이 어두워져 다시 펠만 시로 돌아왔다.
브란트만이 아니라 디에고도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빠른 속도로 몸을 회복했다. 마력의 양도 크게 늘었지만 당장 후안을 재소환하지는 못했다.
디에고는 톰을 타고 있었고, 에드는 다크를 펠만 시 근처의 숲에 숨겨놓고는 함께 펠만 시의 성벽을 넘었다.
반지를 되찾은 디에고는 기척을 흘리지 않았기에 둘은 어렵지 않게 다시 성벽을 넘었다.
에드는 디에고를 돌아보며 물었다.
“위치는 다 파악할 수 있겠어?”
“제리가 다 알아봐 줄 거예요.”
외눈 안경을 끼고 있는 제리가 디에고의 어깨에서 앞발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디에고는 에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형 그건 뭐예요?”
에드는 디에고의 물음에 손에 들고 있던 대롱을 가볍게 흔들었다. 사실 이걸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국왕 암살을 기획한 지금 이걸 쓸 생각이었다.
“나중에 보여줄게.”
“어디부터 갈 거예요?”
“따라와.”
에드는 먼저 움직였다. 병사들이 움직이지만, 지붕 위를 소리 없이 달리는 에드를 볼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둘은 내성의 성벽을 넘어 잠입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에드는 심안으로 펠만 국왕을 찾았다. 아직 심안의 범위가 넓지 않았지만, 성 가까이 다가간 에드는 펠만 국왕을 찾을 수 있었다.
서재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는 펠만 국왕을 찾은 에드는 그곳을 살필 수 있는 탑을 찾았다. 남쪽 탑에서 펠만 국왕의 서재를 내려다볼 수 있어 탑 꼭대기 위에 선 에드가 활을 잡은 손에 대롱을 함께 쥐었다.
그리고 대롱에 들어갈 작은 화살 하나를 꺼냈다.
“그 쪼그만 화살은 뭐예요?”
대롱 안에 화살을 넣고 시위에 걸어 잡아당기며 에드가 답했다.
“애기살.”
“애기살이요?”
에드는 대답하는 대신 시위를 놓았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는 애기살은 그 짧은 길이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았지만, 에드는 그 안에 이기어시까지 담았다.
술잔을 기울이던 펠만 국왕의 관자놀이에 깃조차 남기지 않고 애기살이 그대로 박혔다. 펠만 국왕의 고개가 의자 뒤로 넘어가고 손에 쥔 잔이 떨어지며 붉은 와인이 핏물처럼 흘러내렸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경험치가 밀려 들어오며 레벨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