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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악마 사냥꾼이 되었다-105화 (105/202)

#105

의뢰

박살 난 갑옷과 바닥에 길게 깔린 핏자국들.

인간의 육신이 이렇게까지 갈려 나갈 수 있나 싶을 정도다.

펠만 국왕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감히 자신의 왕궁에 들어와서 정보 단체인 타로스를 박살 내고, 기사단 하나를 갈아버린 자.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그제야 성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성기사가 말하길 악마를 쫓아왔다고 하더니 이건 정말 악마의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 현장에 있던 병사 중 제정신을 못 차리고 두려움에 떨며 교회를 찾아간 자들이 태반이다. 그만큼 끔찍했던 상황.

그런데 자신의 손발이 되어 주던 다비드가 사라졌다. 갑자기 찾아와 자신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던 자가 사라지니 그 빈자리가 확실히 느껴진다.

이 일을 조사하려고 해도 조사할 정보 단체가 사라졌다.

병사들은 분명 그 악마가 기사단을 갈아버리고, 쓰러지던 중에 그를 데리고 도망친 자가 있다고 했다. 악마를 구해간 자.

악마의 조력자까지 있다. 그들이 어째서 왕궁으로 들어와 타로스를 박살 내고, 기사단 하나를 갈아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펠만 국왕은 돌아서며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성기사를 불러라.”

“예.”

펠만 국왕은 곧장 자신의 셋째 부인을 찾아갔다.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치솟을 때는 그녀만 한 회복제가 없었다. 그렇게 셋째 부인의 방을 찾아간 펠만 국왕은 창백한 안색의 엘피아를 보았다.

낮에까지 멀쩡했던 그녀의 창백한 모습을 보고 펠만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빈! 무슨 일이오?”

“몸이 조금 안 좋아요. 전하. 무슨 일이시죠?”

펠만 국왕은 엘피아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교회의 사제를 불러올까?”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잠시 쉬면 나을 거예요.”

펠만 국왕은 그녀를 침대로 이끌어서 눕혀주고는 의자를 가져와 옆에 놓고는 말했다.

“왕궁 안에 악마가 쳐들어왔다가 도망갔다고 하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 성기사를 불러서 도움을 요청할 테니.”

엘피아는 그런 펠만 국왕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전하. 두렵습니다. 오늘 밤은 곁에 있어 주세요.”

“그러지.”

펠만 국왕이 엘피아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릿결을 넘겨줬다. 엘피아는 자신의 옷장의 열린 틈으로 보이는 찢어진 옷을 보고는 슬쩍 눈빛을 줬다. 그러자 열린 옷장 문이 스르륵 닫혔다.

정신을 차린 디에고가 눈을 깜빡이다가 에드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형. 저 죽은 거 아니죠?”

“아니야.”

“엠마는요?”

“네 덕분에 살았다.”

디에고가 시선을 돌리다가 아린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린이 그런 디에고의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넌 회복 주문도 못 받아. 그냥 누워 있어.”

디에고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누나가 온 거죠?”

“맞아.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그래도 네 덕분에 엠마가 무사할 수 있었어. 고생했어.”

디에고는 그 말에 안심한 듯 몸이 축 처졌다. 에드는 그런 디에고의 머리를 쓱쓱 만져주고는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는 몸이 들썩이다가 지금은 그래도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폭주한 채로 깨어난다면 그를 묶은 밧줄 따위는 간단히 뜯겨 나갈 터였다. 그래서 에드와 아린이 그의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저기 누워 계신 거예요?”

“일어나 봐야 알 수 있겠어. 지금은 폭주 후의 후유증 때문에 이러고 있어. 문제는 폭주가 단발성인지 아니면 폭주가 계속될지 모르는 게 문제지.”

디에고는 그 말에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라면 분명 제어하실 거예요.”

아린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테인님이라도 있어야 조언을 구할 수 있을 텐데.”

확실히 이런 일에서는 테인의 박학다식함이 필요하다. 그가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해내실 거야.”

그리 말하면서도 에드는 믿지 않았다. 세상일이란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아니까.

아직 깨어나지 않은 브란트를 바라보는 아린의 눈빛은 긴장감에 혼란스러움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폭주한 상태라고 해도 브란트가 벌인 일은 악마가 벌인 일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 기다림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브란트가 눈을 떴다. 브란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입을 열었다.

“엠마는?”

“무사해요.”

브란트는 아직도 숙취라도 있는 것처럼 멍하니 말을 이었다.

“에드.”

“저 여기 있습니다.”

“다행이군.”

에드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아마도 눈이 돌아갔을 때 자신을 어떻게 했을까 봐 걱정했나 보다.

“형님.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압하기는 힘들어도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브란트도 그 말에는 픽 웃었다. 에드가 한 말의 뜻도 이해했다. 브란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눈이 돌아가서 엠마를 해하려고 하거든 주저하지 말고 날 죽이게.”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엠마 데리고 도망갈 거예요. 유지력이 생각보다 짧아서 잠깐 몸을 피했다가 돌아오면 될 문제니까.”

끝까지 죽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모습에 브란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브란트는 몸을 가볍게 움직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

“정말요?”

진짜 환골탈태라도 한 걸까?

브란트가 몸을 일으켜보더니 인상을 굳혔다.

“확실해. 몸이 가벼워졌어.”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브란트는 고개를 돌려 디에고를 바라봤다.

“고맙다.”

엠마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전후사정 듣기 전에 고맙다고 먼저 말한 브란트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호텔에 돌아와도 되는 거야?”

“일단은요.”

에드가 뭐라고 설명하려고 할 때 문이 열리며 엠마가 들어왔다. 엠마는 멀쩡히 앉아 있는 브란트를 보고는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빠!”

브란트는 엠마를 안으려고 손을 들면서도 긴장했다. 자신이 폭주했던 것을 떠올리면 힘 조절이 안 될까 봐. 그래서 조심스럽게 엠마의 등을 토닥여줬다.

엠마가 브란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서 디에고를 확인하고는 디에고도 몸을 일으켜 앉은 것을 보더니 후다닥 달려가 디에고를 안아줬다.

디에고의 갈색 얼굴이 붉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브란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엠마가 고개를 들더니 디에고의 양뺨을 손으로 잡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물었다.

“괜찮아?”

“으응.”

엠마는 괜찮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표정이 싹 변했다. 그리고 디에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디에고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입 밖으로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엠마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나 지키겠다고 목숨 걸면 가만 안 둬! 알겠어! 그러고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라고!”

엠마의 외침에 디에고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어.”

엠마가 다시 디에고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에드는 창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매 기사단의 델마가 붉은매 기사단원들과 함께 호텔 앞에 와 있었다.

브란트의 손에 갈려 나간 것은 아마도 근위 기사단. 붉은매 기사단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오늘 저렇게 볼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저들이 왜 온 것일까?

왕궁에서 어제 벌어진 일이 자신들이란 것을 알아낸 것일까?

“아린. 붉은매 기사단장 델마가 왔어요.”

“제가 나가볼게요.”

아린은 브란트가 깨어나 폭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판단을 미루기로 했다. 그러기에 붉은매 기사단이 찾아온 것은 좋은 핑계거리였다.

아린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에드는 디에고와 엠마를 쏘아보고 있는 브란트에게 말했다.

“어제 혈마석의 악마가 디에고와 엠마가 있는 곳을 습격했습니다. 디에고가 목숨을 걸고 엠마를 지킨 덕분에 지금까지 쓰러져 있었던 거고요.”

에드의 설명을 들은 브란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악마는?”

“놓쳤다고 하더군요. 아린이 폭음을 듣고 쫓아가기는 했는데 디에고의 상태가 나빠서 쫓을 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랬군.”

브란트는 어젯밤에 자신만이 사고를 친 줄 알았다.

“그보다 형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다비드가 죽기 전에 수작을 부렸네. 악마의 피를 내게 주입했지.”

“악마의 피요?”

별의 악마의 피를 가지고 브란트를 실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악마의 피를 추가로 주입했다면 살아남은 것이 용했다.

악마의 피를 주입했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극악이었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브란트가 강해질 방법은 그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이 전화위복이 되기를 바라며 에드는 감각을 일으켜 아린과 델마의 만남에 귀를 기울였다. 델마의 말은 간단했다. 왕궁에 악마가 등장했으니 펠만 국왕이 아린을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에드는 그 악마가 누군지 알았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좋은 기회다. 펠만 국왕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서 왕도를 조사할 수 있게 된 것도 있었고, 이걸 빌미로 감옥에 갇힌 일행들을 풀려나게 할 수도 있었다.

다만 폭탄이나 다름없는 브란트가 걱정이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브란트고 그런 그를 제압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은 에드뿐이다.

아린과 함께 한다면 큰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린이 자리를 비운다면 문제다. 게다가 펠만 국왕은 자신까지 찾고 있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브란트가 에드의 시선을 읽고는 답했다.

“왕궁에 가봐야 하는 거야?”

“예. 그런데 그게 들렸습니까?”

브란트의 감각이 이렇게 뛰어났나? 브란트는 에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빈민가에 있을 테니 이곳에서 디에고가 엠마를 지켜줘. 대낮에 악마가 다시 습격하지는 않겠지.”

악마가 아무리 겁이 없다고 해도 빈민가도 아니고 도시의 호텔을 습격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디에고도 그 말에 엠마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제가 엠마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브란트가 그 모습을 보고는 한마디 했다.

“디에고.”

“예?”

“손은 놓지?”

디에고가 얼른 손을 놓자 엠마가 그런 디에고의 손을 잡고는 눈을 부라렸다.

“아빠는 왜 디에고에게 뭐라고 해요?”

브란트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만, 디에고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엠마가 디에고의 편을 들어준 것은 그를 두 번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에드는 잠시 후에 아린이 돌아왔기에 물었다.

“국왕이 찾는 거죠?”

“예. 준비하고 들르기로 했어요.”

“함께 가죠. 이걸 빌미로 감옥에서 모두 나오게 해야죠.”

브란트가 한 행동이 일행에게도 전화위복이 될 판이다.

다시 한번 찾아간 왕궁.

펠만 국왕은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노기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어제 왕궁 안에 악마가 잠입했네. 그를 돕는 자도 있다고 하던데 그자를 잡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나?”

아린은 그 말에 가만히 펠만 국왕을 바라보았다. 대신 옆에서 에드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하지만 저희 일행이 억울하게 치안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펠만 국왕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보고받지 못한 내용이다. 아마 다시는 보고 받지 못할 테지만.

“그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풀어주지. 대신 악마를 찾아주게.”

펠만 국왕의 말에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아린은 일행을 풀어준다는 말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눈이 푸르게 빛나는 모습에 펠만 국왕이 관심을 보였다. 성기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또 처음 봤다.

그때 아린이 시선을 돌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

“무슨 일인가?”

아린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왕궁 안에 악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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