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양심
에드의 제지에 반사적으로 그들을 도우려던 전투 수사들도 정신을 차렸다. 자신들이 상대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잊고 있었다.
밤이었다면 에드도 이렇게까지 대응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제리를 소환한 채 악마의 힘을 가졌는지 확인하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악마의 힘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일단 막고 볼 일이다.
에드의 말을 들은 전투 수사들이 긴장한 채 무기를 뽑아 드는 모습을 보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기사와 경기병들도 말의 속도를 늦췄다.
에드는 그들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하고는 아론에게 다가가 물었다.
“볼 수 있죠?”
아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인과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편에 선 자들까지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누구도 악마와 관련된 힘을 지닌 자는 없습니다.”
“악마와 관련된 힘을 지니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니 그냥 돌아서 가죠.”
에드의 말에 말콤과 알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저들이 어떤 일인지 알고 도와주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은 무엇보다 아론을 안전하게 신전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괜히 다른 분란에 엮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때 화살에 놀라 뒤로 물러났던 여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저는 멜트 공의 딸인 세라라고 해요. 아스트론의 충실한 종으로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말콤은 그 말에 살짝 인상을 굳혔다. 지금 가야 하는 곳이 멜트 시의 신전인데 그곳의 영주인 멜트 공의 딸이 곤경에 처한 것을 도와주지 않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아론이 말에서 내리더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드는 그 모습을 보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비도를 뽑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론.”
아론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스트론의 충실한 종이 도움을 청할 때 거절한다면 어찌 사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에드는 그 말을 물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가 나선 이상 적어도 기사는 치료할 생각으로 보였으니까.
“손 안 대고 치료할 수 있죠?”
아론은 그 말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에드는 그리 말하고는 세라라고 자신을 밝힌 여인을 바라보았다.
“등에 박힌 볼트를 뽑기만 하면 치료가 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수호 기사의 갑옷을 벗기고 볼트를 뽑으십시오.”
“예?”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보지 않았을 터. 기겁하는 여인에게 에드는 단검을 던져주었다. 여인의 발치에 꽂힌 단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볼트가 박힌 곳에 상처를 째고 뽑지 않으면 살점이 뜯겨 나올 테니까 상처를 잘라내고 뽑으면 될 겁니다.”
“하, 하지만···.”
“그 정도 노력도 안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겁니까?”
세라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더니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기사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만 무사하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안 될 말이야. 갑옷을 벗도록 해.”
수호 기사는 세라의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갑옷을 벗었다. 그리고 등을 내보이자 그녀가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로 그의 등에 박힌 화살이 박힌 곳에 칼집을 내고 볼트를 뽑아냈다.
얼굴에 피가 튀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혼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는 의심을 거뒀다.
만약 그녀가 단검을 제대로 다루는 모습을 보였다면 에드는 그녀의 이마에 단검을 꽂아주었으리라.
혼절하는 것이 연기라면 인정해줄 정도로 뛰어났다. 에드는 수호 기사가 혼절한 세라를 살피는 사이에 에드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단검을 휘둘렀다.
“크윽!”
수호 기사가 반응하기도 전에 에드는 그의 등에 박힌 볼트를 모조리 뽑아낸 뒤에 아론을 돌아보았다. 아론은 에드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찍이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일어난 푸른 물결이 수호 기사에게 닿자 그의 등에 난 상처가 아물었다. 힐러가 전투에서 손을 대고 나서야 치료할 수 있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린처럼 전투의 최전선에 설 수 있는 성기사라면 상관없지만, 일반 사제라면 거리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이 정도 거리에서 회복 주문을 걸어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수직상승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해도 언제고 아론을 영입해야겠다.
마음을 굳힌 에드는 수호 기사의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론이 나서서 어쩔 수 없이 도와준 이상 정리가 필요했다. 에드의 시선이 멀찍이 서 있는 기사와 경기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세라가 도움을 받는 것을 보고 인상을 굳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기사와 전투 수사들이 함께 있으니 감히 함부로 못 하는 것이리라.
에드는 단검을 회수하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더 할 말이 남았소?”
기사는 그냥 물러날 수는 없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난 코룬 공의 기사 브론이라고 하오. 그분은 소영주님과 혼인했으나 초야를 치르지 않고 도망을 치셨소. 이건 소영주님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니 아스트론 교단이라 해도 끼어들 일이 아니오.”
에드는 수호 기사와 세라라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수호 기사가 세라라는 여인을 대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래서 초야를 치르지 않고 도망친 건가?
남의 사랑 이야기야 관심도 없지만, 저런 문제로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안 될 말이다.
그냥 돌려주고 말까?
에드가 그런 고민을 할 때 아론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어떤 상황이라 해도 아스트론의 충실한 종의 도움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만 물러나시지요. 저희는 마침 멜트 시로 가는 길이니 그 일을 따지시려거든 멜트 공에게 직접 따지시죠.”
브론의 인상이 잔뜩 굳어졌다.
초야를 치르지 않고 신부가 도망간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될 일. 이 사달을 일으킨 수호 기사를 죽이고 세라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멜트 공에게 데리고 간다면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체면이 깎이는 일.
“혼인을 치른 이상 코룬 가의 사람이니 가문 내의 일에 아스트론 교단이 개입할 수는 없소.”
에드는 이대로 가서는 얘기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고는 아론의 앞을 막아섰다.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고 물러나시오. 따지려면 멜트 공에게 따지라는 말 못 들었소?”
멜트 공이 알게 된다면 오히려 브론이라는 자의 말을 들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귀족들끼리의 혼사라면 양가에서 허락했을 일.
그런 결혼을 파하고 돌아온 딸은 귀족인 멜트 공도 반길 사항은 아니리라.
브론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에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우리를 공격이라도 하겠소?”
브론은 그 말에 에드를 쏘아보았지만,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마른 침을 삼켰다. 그건 마치 무기를 뽑고 공격하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어차피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가 함께 하는 일행은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해도 무력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코룬 시가 박살 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교단에 따져 물을 테니 그리 아시오!”
귀족과 교단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사이이니 이건 분명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아론은 그런 것 따위 전혀 연연하지 않고 있었지만.
브론이 수하들을 데리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에드는 수호 기사를 바라보았다. 혼절한 세라를 안고 조심스럽게 얼굴의 피를 닦아 주는 모습을 보니 참 대단한 인간이다 싶었다.
“말을 하나 내줄 테니 아가씨를 모시고 앞장서시오. 아직 그대들에 대한 의심을 온전히 거둔 것은 아니니 허튼짓을 한다면 내 화살이 빗나가길 바라야 할 것이오.”
수호 기사는 에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코룬 공의 수하들에게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한 셈이다.
수호 기사 판은 에드가 전해준 말을 타고 혼절한 세라를 앞에 태운 채 말을 몰아 앞장서 갔다.
에드는 디에고와 함께 말에 오른 채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아론. 함부로 사람을 믿고 그러지 말아요.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으니까요.”
“거짓되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에드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론. 그 눈이 악마의 힘을 볼 수 있고, 그 진실을 알게 해준다고 하지만 사람의 진심까지 볼 수는 없어요. 그러니 함부로 그 눈만 믿고, 사람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고 돕지 말아요.”
말콤과 알론은 그 말에 말을 타고 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다친 수호 기사와 함께 달려오면서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들도 의심하지 않고 도우려고 했다.
그건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에게 감히 사기를 칠 대담한 자들은 없다는 생각이 짙게 깔렸던 것이지만, 그것만 믿어서는 안 됨을 알았다.
에드가 일깨워 준 덕분에 그들도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기로 했다.
에드의 앞에 타고 있던 디에고가 물었다.
“형은 어떻게 여자가 도와달라는 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아요?”
“아론이 있으니 악마의 힘을 지닌 녀석들이 저렇게 태연하게 속이며 다가오지는 않았겠지만, 그것만 생각해서는 안 돼. 크로셀에서 암살자들을 사서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
디에고도 솔직히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사령인 제리를 꺼내면 감지 범위가 많이 늘어나지만, 그게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악마의 힘은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드의 말을 듣고 보니 조심해야 할 것이 단순히 그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예로부터 여자와 아이는 특히 조심하라고 했어. 사람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모습이니까. 그래서 암살자들도 그 모습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니까 조심해.”
디에고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게요.”
에드는 그런 디에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만 봐도 그렇지. 누가 너를 중급 악마도 때려잡을 사령술사로 보겠냐?”
디에고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에드는 그런 디에고의 머리를 만져주며 저 앞에 걸어가는 수호 기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이 그저 여기서 마무리 지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멜트 시까지는 하루 만에 도달할 수 없었다. 밤이 되어서 말을 묶어 놓고 다들 야영 준비를 했다.
깨어난 세라는 일행에게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도움을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아론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아스트론의 가르침이시니까요.”
“판에게 들었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셨고, 지금 멜트 시로 가시고 있다는 얘기를요.”
“예. 멜트 시의 신전에 가는 길입니다.”
“그랬군요.”
세라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청 하나를 해도 될까요?”
“말씀해 보세요.”
“저희는 멜트 시로 갈 수 없습니다. 저희가 이대로 떠날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론이 그 말에 입을 열려고 할 때 에드가 그의 입을 막았다. 말콤과 알론도 이제 아론을 알았는지 에드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저들을 구해서 이미 코룬 공과 척을 졌다. 세라를 멜트 공에게 데려다주면 그들끼리 해결할 문제지만, 그에게 데려다주지 않는다면 책임을 고스란히 아스트론 교단이 져야 할 일이다.
가만두면 아론이 그리하라고 말할 것 같았는데 에드가 그 말을 막아줬으니 감사할 일이다.
에드는 아론의 입을 막고는 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지간하면 귀족가의 여식에게 못된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여자 염치가 없다.
“저기요.”
에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