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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악마 사냥꾼이 되었다-85화 (85/202)

#85

개입

세라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녀도 자신이 염치없는 부탁을 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면전에서 대놓고 하는 것은 귀족들의 화법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에드의 직설적인 말에 그녀는 당황했다.

수호 기사 판이 그녀의 뒤에서 인상을 굳힌 채 일어났다.

“이보시오.”

에드가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앉아요. 말로 할 때.”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을 돕고 싶은 것은 알겠지만, 지금 에드의 기분이 더러웠다. 물에 빠진 이들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에드와 눈을 마주친 판은 흠칫 몸이 굳어졌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선을 넘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에드는 판이 다시 자리에 앉자 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족가의 영애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누구보다 잘 알 거로 생각합니다. 염치가 있다면 여기서 교단에 더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시겠죠?”

세라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얼굴을 더욱 붉히는 것을 보고 에드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스트론의 충실한 종이라면 말이죠.”

그녀는 그 말을 스스로 내뱉으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그 말이 그녀 스스로를 묶는 족쇄가 되리라.

에드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말콤과 알론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도 눈치가 있었다. 아론이 이곳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아 그에게 부탁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는데 에드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분위기는 성기사들까지 에드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다. 여기서 무슨 말이든 잘못 꺼낸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리라.

차라리 몰래 몸을 빼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때 에드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밤에는 마물이 들끓을 테니 허튼 생각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일행에서 벗어났다가 마물 손에 죽는 일은 없도록 말이죠.”

에드의 말에 세라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저런 엄포를 놓는다고 해도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몸을 빼내는 것이 안전할 테니까.

가문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다시 코룬 가의 소영주에게 돌려보낼 테고, 이 사달을 일으킨 수호 기사 판은 죽는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알겠어요.”

세라가 판과 함께 물러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성기사와 전투 수사들. 이들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마물은 굳이 자신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을 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늘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

세라의 잠자리를 봐주고 옆에 앉아 있던 판은 자신의 손을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세라가 누운 채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판. 밤이 깊어지면 몸을 빼내야 해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차라리 멜트 공에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문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죽어요.”

“알고 있습니다.”

“당신 없이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거죠?”

판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라의 눈길에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그녀의 말을 거절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더욱 쉬셔야죠. 눈을 붙이시죠. 때가 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오늘 밤 밖에 시간이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판의 말에 세라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었다. 코룬 가에서의 탈주가 치열했던 만큼 그녀는 피곤해서 금세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판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이상 그녀 앞에서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까 싶어서 더 살아남아야 했다.

판은 성기사들도 잠을 청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에드라는 자만이 홀로 남아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이쪽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잠들기만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그는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화살이 나오는지 숫돌을 꺼내 화살의 날을 날카롭게 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판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 보았다. 날에 이가 나간 것을 확인한 판은 품에서 숫돌을 꺼내 날을 갈았다. 조용히 날을 갈던 판은 에드가 문득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에드는 주저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화살을 날렸다.

뭐하는 건가 싶었는데 어둠 속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뭔가가 다가왔다.

판은 그 소란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판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물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휘둘러 달려드는 마물의 날카로운 이빨을 받아내는 순간 검이 박살 났다.

달려든 마물은 놀. 하이에나의 머리를 단 괴물은 놀라운 치악력으로 검을 잘라내 버렸다. 판이 놀라서 기겁할 때 그의 어깨너머로 날아온 화살이 놀의 머리에 박혔다.

놀의 눈이 뒤집히더니 바닥에 쓰러졌고 고개를 돌릴 때 뒤에서 날아온 화살들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마물들의 단말마가 들렸다.

어찌나 빠른지 화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몇 발의 화살 이후로 더는 마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기사와 일행들도 잠이 완전히 깬 것을 보고 에드가 태연히 말했다.

“잠시 화살 좀 회수해 오겠습니다.”

“마물은 다 죽은 것이오?”

“예. 그러니 이제 편히 쉬셔도 됩니다.”

마물의 습격을 받고 자란다고 해서 잠이 들 수 있는 이들이 있을까?

성기사와 일행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을 보고 판은 오늘은 몸을 빼내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알았다. 에드는 그런 그를 지나쳐 마물의 머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가며 중얼거렸다.

“밤에는 마물이 들끓는단 말이지.”

놀 정도의 마물이라면 어떻게든 죽일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검이 부러진 상황에서 괜히 섣불리 움직이다가 죽을 수는 없었다.

판이 고개를 돌리니 소란에 깨어났던 세라의 낯빛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판은 그녀의 곁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마물이 많으니 몸을 빼내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세라는 그 말에 판의 손을 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멜트 시의 성벽을 바라보며 세라는 판을 돌아보았다. 둘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보고 에드는 고개를 슬슬 내저었다.

“저 둘이 어제 도망치려고 한 거죠?”

“알았냐?”

“제가 밤에는 제리를 소환해 두잖아요.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요.”

에드는 그 머리를 슥슥 문질러 주었다.

“일부러 말 안 한 거죠?”

“뭘?”

“마물들이 몰린 이유요.”

“그걸 뭐하러 가르쳐 줘?”

에드는 디에고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는 말했다.

“저들을 생각해서 그런 거야. 도망쳤으면 다리에 화살을 박아줄 생각이었거든.”

에드는 그리 말했지만, 실제로 도망갔다면 과연 화살을 다리에 박았을까? 모를 일이다.

세라와 판을 확인한 병사들이 안쪽에 연락을 넣자 일단의 기마가 달려 나왔다. 그들의 분위기가 흉흉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코룬 가에서 사람을 보냈나 보다.

치부라면 치부랄 수 있는 일. 그들은 쉬쉬하는 대신 멜트 공에게 알리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과연 그들의 선두에 선 중년인이 멜트 공인지 세라와 판이 말에서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판이 한쪽 무릎을 굽혔고, 세라는 그의 앞에 나섰다.

멜트 공은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세라.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것이냐?”

세라는 말에 탄 멜트 공의 눈빛에 어린 살기를 읽었다. 그 눈빛이 판을 향한 것을 알고, 세라는 양팔을 벌려 판의 앞을 막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사랑도 없이 코룬 가의 소영주와 함께 할 수 없었어요.”

“귀족이 어찌 사랑 타령이냐! 귀족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부끄러울 일이나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리라.

“판! 딸아이를 지키라고 수호 기사를 맡겨놨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멜트 공이 말에서 내리더니 검을 뽑아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세라가 양팔을 벌리고 판의 앞을 막았다.

“안돼요!”

“비켜라! 저자는 자신의 책무를 지키지 않고, 선을 넘은 자다! 저자를 벌하지 않으면 내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느냐!”

세라는 혹시라도 빈틈이 있을까 판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이라 에드도 오래간만에 눈요기하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추시죠.”

에드가 돌아보니 아론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기 전에 에드는 훌쩍 말에서 뛰어올라 아론의 뒷목을 가격했다.

아론은 뭔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혼절했고, 그의 뒤에 올라탄 에드는 넘어지는 그를 부축한 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담담히 말했다.

“하시던 일들 마저 하세요. 저희는 신전에 볼일이 있을 뿐입니다.”

더 구경하고 싶지만, 괜히 아론이 깨어나서 허튼 소리하면 안 되니 그만 떠나기로 했다.

멜트 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 다른 곳에 화를 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에드의 뒤편으로 성기사 말콤과 알론이 따라붙으니 화를 풀어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하고 검을 거둔 후에 물었다.

“아스트론의 성기사들이 멜트 시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대답은 말콤이 했다.

“본 교단의 일 때문에 온 것이니 신경 쓰실 일 없습니다. 하시던 일 마저 하시죠.”

말콤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던 멜트 공은 세라와 판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뭣들 하느냐? 판은 뇌옥에 가두고, 세라는 방에 구금해라.”

좋은 구경 하나 싶었지만, 멜트 공도 김이 샌 모양이다. 에드는 그 모든 원흉인 아론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뒷목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니 살짝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맞을 짓을 했다.

이 오지랖에 대해서는 단단히 일러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니면 때때로 이렇게 기절시키든지.

오죽하면 그를 호위하는 성기사인 말콤과 알론도 아무런 말이 없을까?

그때 뒤편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브란이라는 기사였다.

이곳에서 코룬 시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그가 그곳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리는 없을 터.

아마 코룬 가에서도 바로 출발해서 이곳으로 달려오던 중이었나 보다. 그러니 중간에서 만났을 터.

그들은 멜트 공 앞까지 다가와 말을 멈췄고, 그들이 일으킨 먼지 바람이 좌중을 휩쓸었다. 그리고 멈춘 말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말이 버거워할 정도로 뚱뚱한 사내. 얼굴은 또 심각하게 못생긴 추남이 콧김을 훅훅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는 세라가 왜 초야를 치르지 않고 도망쳤는지 알 수 있었다.

“멜트 공. 신부를 되찾으러 왔습니다.”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는 자의 외침에 멜트 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일을 다 처리하고 저들을 만났다면 할 말이라도 있겠으나 이 자리에서 코룬 가의 사람들을 만난 것은 문제가 됐다.

“세라는 내가 다시 코룬 가로 보낼 것이니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게.”

코룬 가의 소영주 프롤은 콧김을 훅훅 내뿜고는 등에 차고 있던 대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 뜻은 멜트 공을 따르겠으나 저자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머리를 쪼개줘야 마음이 풀리겠습니다. 그자라도 내놓으시죠.”

원래 하려고 하던 일도 누군가 강요하면 하기 싫어지는 법이다. 하물며 같은 귀족도 아니고 사위가 될 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내킬 리가 없다.

“본가의 가법대로 다스릴 테니 그만 물러가게.”

“하! 제대로 가법이 섰다면 수호 기사가 모시는 이를 탐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처리하죠.”

흥분한 프롤의 눈 깊은 곳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프롤이 위협적으로 말을 앞으로 모는 모습에 멜트 공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딸의 일 때문에 짜증이 나는데 지금 이 자가 뭐라 하는 건가?

“감히!”

멜트 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마디 하려는데 프롤의 이마에 화살이 하나 솟아났다.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프롤이 뒤로 넘어가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그걸 보고 멜트 공은 놀라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돼지 새끼가 왜 악마랑 붙어먹어서.”

멜트 공이 뒤를 돌아보니 사제와 함께 말에 타고 있던 에드의 손에 활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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