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믿음
알론의 조각난 팔은 아론이 치료해줬다. 알론은 아론의 치료를 받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조각난 뼈가 근육을 찢어서 치료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아론의 치료는 그 뼈조각이 원래 자리를 되찾게 해주었다.
근육이 먼저 회복되면서 뼈조각을 밀어냈고,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서 신성력으로 굳혀버리는 기상천외한 치료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신성력이 해낸 일이었다.
교단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다는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양도 순도도 모두 최고였는데 이것만 놓고 본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들겠다.
그 말은 교황, 마스터 팔라딘, 성녀 수준이라는 말이다. 이만한 수준의 신성력을 지닌 이의 치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된 일이다.
게다가 그런 그를 호위하고 있다는 것도.
아론이 알론을 치료하고 있는 사이에 에드는 말콤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고맙소.”
“아닙니다. 생각보다 사도가 상대하기 까다롭더군요. 조금이라도 빨리 도울 수 있었다면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말콤은 그 말에 장내를 다시 돌아보았다. 크로셀의 손가락이 성기사 존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도 믿지 않았는데 직접 붙어본 크로셀의 손가락들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했다.
자신도 혼자 상대했다면 어쩌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기사가 둘이나 붙어서 공격했음에도 그자를 제압하지 못했고, 오히려 전투 수사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에드는 그런 자를 멀리서 하나를 잡았고, 사도 또한 혼자서 상대했다. 그리고 그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입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그리고 크로셀이 어떤 각오로 이번 일에 임하는지 알았다.
에드가 없었다면 교회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었을 테고, 아론을 빼앗겼을 터였다.
“그래서 말인데 멜트 시의 신전까지만 호위를 부탁해도 되겠소?”
에드는 슬쩍 뒤에 서 있는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저 아이가 함께해야 합니다.”
“당신 일행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겠소. 그러니 호위를 부탁하오.”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대신에 아린 일행에게 연락해주시죠. 멜트 시까지 호위하고 합류하러 간다고 말이죠. 그리고 디에고도 무사히 잘 있다는 말을 전해주시고요.”
“물론이오. 곧 연락을 받을 수 있을 거요.”
“고맙습니다. 그럼 저희는 물러갔다가 내일 합류하도록 하죠.”
“그럼 내일 뵙겠소.”
에드는 인사를 마치고 디에고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왔다. 에드는 침대에 앉은 디에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잘했다.”
“그죠?”
“그렇다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하냐? 그러다 목 부러져 죽으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잖아.”
디에고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밑에 나무 있는 것 확인하고 뛰어내렸죠. 위험하기는 했는데 요즘에 몸이 튼튼해져서 괜찮더라고요.”
에드는 그 말에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고 앉으며 말했다.
“말콤 경에게 말했으니 아린도 우리 소식을 들을 거다.”
“이제 걱정 안 하겠네요.”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
“예.”
디에고가 침대에 눕자 에드는 오늘 얻은 장비들을 꺼내 보았다. 크로셀이 사용하는 단검들과 반지, 거울이 있었다.
손거울이 그들을 나타내는 증표이자 연락용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쓸 줄은 모른다. 이걸 쓰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총 네 개를 얻었으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들은 그저 손거울만 가지고 다니는 것 같다. 저만한 조직에서 이렇게 아이템을 박하게 주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에드는 에밀리가 가지고 있던 반지를 꺼내 살펴보았다. 저주가 걸린 아이템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성기사인 말콤과 아론 모두 그렇게 얘기를 해주었기에 에드는 그 반지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뭔가 화려하거나 하지는 않은 검은색의 반지.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왼손 검지에 반지를 껴보았다. 어떤 능력인지는 확인해 보면 알 일이다.
그렇게 반지를 낀 에드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스탯창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반지를 낀 순간 마력이 크게 오르는 것을 보았다.
다시 반지를 빼보니 마력이 확 줄어든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 반지는 마력의 총량을 늘려주는 반지다. 그것도 퍼센트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량을 올려주는 것. 마력이 많은 이에게는 퍼센트로 올려주는 아티펙트가 좋지만, 에드에게는 이게 딱 필요한 반지였다.
적어도 마력 스탯을 몇 개나 올려야 얻을 수 있을 마력이었다. 이것만 있어도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에드는 손을 들어 반지를 바라보았다. 마력이 충분하면 이기어시도 더 많이 쏠 수 있고, 빙결의 활 위력도 더 높일 수 있다.
경험치도 짭짤했지만, 진짜는 여기 있었다.
에드가 흡족해할 때 디에고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형. 악당 같아요.”
“응?”
“그 미소가 인형극에서 악당들이 짓던 미소를 닮은 것 같아서요.”
에드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너무 티냈냐? 괜찮은 물건을 얻어서.”
“형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굉장한 물건인가 봐요.”
“유물급 장비이긴 한데 나한테는 꼭 필요한 거라서.”
“잘됐네요. 축하해요!”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디에고를 보고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디에고의 마력과 사령의 기운, 악마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중이다.
그러니 이 반지는 디에고보다는 자신에게 더 필요했다.
“나중에 좋은 거 얻으면 너도 주마.”
“벌써 많이 받았어요.”
이 녀석 마음의 부담감을 안겨주는 솜씨가 제법이다. 아무래도 다음에 좋은 게 나오면 디에고를 줘야겠다. 디에고에게 준 건 이스페르토의 물건들이라 그 수준이 그렇게 뛰어난 것들은 아니었으니까.
“얼른 자라. 내일부터 또 바빠질 거다.”
탁자 위에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양손을 깍지 낀 채 그 위에 턱을 기댄 노인은 그 눈빛이 한없이 날카로웠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의 위엄을 느끼게 하는 눈빛.
일어서서 검을 든다면 전장을 호령하는 장군이 될 인물.
“그래서 왕가에서 우리를 견제한다는 건가?”
남부 귀족 연합의 수장 펠만 공은 자신의 앞에 선 사내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카르엔 공이 마젤타 왕국과 내통한 것이 발각되었고, 재산이 몰수된 것은 물론이고, 영토도 환수됐습니다.”
“그래서?”
“그 뒤는 뭐가 될 것 같습니까?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게 된다면 남부의 귀족 중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분이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러니 먼저 움직여야죠.”
펠만 공은 그 말에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의자가 뒤로 기울어지자 그는 느긋하게 앞에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칼란의 한축을 담당하던 자. 태자파의 실세인 카르엔과 한배를 탔던 자였다.
“듣자 하니 아칼란이 자네를 쫓는다고 하던데?”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왕도에서 멀리 있는 만큼 그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지.”
펠만 공은 사내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끈 떨어진 자네의 말을 따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군. 사실 왕도에서는 우리를 쉽게 내칠 수 없을 걸세. 뭐 적당히 진상 좀 하고 자세 좀 낮추면 우리를 건들지는 않겠지.”
사내는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이 노회한 귀족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남부 귀족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지가 오래됐다. 그런 귀족들을 전처럼 다시 쓸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태자가 죽고 새로운 왕위 계승권자에게는 이게 좋은 업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 쉽게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제게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 보군요.”
펠만 공은 사내를 빤히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 아는 내용을 들으시려고 귀한 시간을 내주시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펠만 공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자네는 말이 통할 줄 알았네. 다비드.”
사내, 다비드는 아무런 말 없이 펠만 공을 바라보았다. 펠만 공은 의자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카르엔 대신에게 들은 게 있네. 자네에게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하던데.”
다비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이 영감이 원한 게 그거였군.
다비드는 품에서 검푸른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하나 꺼냈다. 그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다비드를 바라보던 펠만 공이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이게 그건가?”
“예. 그게 그겁니다.”
“그냥 마시면 되나?”
“복용 방법이 잘못되면 죽게 됩니다.”
펠만 공은 병을 책상 위에 다시 내려놓고는 말했다.
“좋아. 이제 거래할 준비가 됐군. 원하는 게 뭔가?”
다비드는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왕이 되어 주십시오.”
펠만 공은 무슨 소리냐는 듯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마젤타 왕국과 트라비아 왕국 사이에 왕국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펠만 공은 그 말에 다비드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저 아칼란의 요원이라고만 여겼던 자가 지금 상상도 못 했던 제안을 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군.”
펠만 공은 다비드가 그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몸을 의탁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에게서 악마의 피를 얻고 그들을 부리면서 살아남을 그늘이 되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에게 왕이 될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좋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다비드는 펠만 공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손쉽게 그의 마음을 얻었다.
고작 몸이나 의탁하고자 이 자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이곳에 왕국이 세워지면 자신은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디에고는 태연히 말을 몰고 있었다.
멜트 시까지 가는 길은 마차를 이용하면 느리다고 여겨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말을 준비해 왔는데 디에고는 처음 타는 말도 능숙하게 타고 있었다.
“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하긴 사령인 톰은 태생이 표범이라 자세가 낮고 불안정한데 그걸 타던 디에고에게 말을 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에드가 픽 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론도 말을 처음 타는 것은 아닌지 제법 능숙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성기사 둘이 아론의 앞에서 걷고 아론의 뒤편으로 에드와 디에고가 말을 몰고 있었다.
넷이서 아론의 말을 포위하듯 걷는 형태.
그리고 전방에는 전투 수사들이 탄 말과 뒤에는 수습 성기사들이 탄 말이 호위하고 있었다. 아론을 노리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리고 아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고 난 후에 그들은 아론을 호위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전과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이번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임을 깨달은 것만으로 달라진 분위기였다. 그렇게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저 앞에서 도망쳐 오는 여인과 기사가 있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에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딱 봐도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녀였다.
여인은 그나마 멀쩡했지만, 그 뒤를 따라 달려오는 기사의 등에는 볼트가 세 발이나 박혀 있었다. 대로를 따라 달려오는 이들이라서 성기사들도 그들을 발견했고, 그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와주세요!”
그런 그들의 뒤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척 봐도 기사와 경기병들로 보이는 무리들. 전투 수사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서 말을 달렸다.
에드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활을 들어 화살을 날렸다.
퍽!
화살은 달려오던 여인의 앞에 박혔다. 여인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그런 여인을 부축한 기사가 에드를 바라보았다.
달려가던 전투 수사들도 놀라서 뒤돌아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에드에게 향했을 때 에드는 담담히 말했다.
“처음 보는데 뭘 믿고 다가오게 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