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아론
에드와 아린은 마을을 뒤로하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정찰만 다녀온다고 했다가 디에고가 감각을 공유한 제리에 의해서 적을 만나 싸웠다는 얘기를 들은 일행은 둘이 말을 타고 돌아오자 몰려와 질문들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던 건가?”
테인의 물음에 이어서.
“어떤 놈이었어?”
덱스의 물음이 이어지고.
“다들 괜찮은 건가?”
브란트가 걱정했으며,
“이걸로 닦으세요.”
수건을 물에 적셔 가져다주는 엠마까지.
디에고는 감각 공유를 유지하다 지쳤는지 마차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가 소란을 듣고 정신을 차리는 중이었고, 그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다가와 걱정해주는 모습에 에드는 훌쩍 말에서 내려 엠마가 준 수건을 받아서 아린을 챙겨주며 답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크로셀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누더기 골렘을 만드는 시체조종 술사였는데 까다롭더군요.”
에드의 대답은 동시에 두 개를 답해준 것이었고, 아린은 에드가 건네준 수건으로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엠마에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
테인은 아린이 피를 닦은 모습을 바라보다가 에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크로셀이라고? 드레드가 대악마 네비로스를 죽였으니 그 종속자와 추종자들이었던 크로셀은 끝장났을 텐데?”
“잔당이라고 보기에는 강했습니다.”
“흐음. 크로셀이라···.”
테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다가 말했다.
“잔당들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잠잠하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지?”
에드가 말을 돌리려고 할 때 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요.”
에드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있어 크로셀은 어릴 적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아픈 기억이다. 자신 앞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해도 될까?
아린은 에드의 시선에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저와 오빠가 살던 마을 전체가 크로셀의 손에 죽어 제물로 바쳐진 적이 있어요. 기억을 잊고 살았는데 크로셀을 만나면서 기억이 되살아났죠. 당시에 드루이드 드레드님이 저희 남매를 구해줬어요.”
마을 사람들 전부가 죽고 제물로 바쳐졌다는 얘기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엠마가 조심히 다가와 아린의 손을 잡아 줬다.
아린은 그런 엠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저와 오빠를 그들의 지도자가 될 재목이라고 했어요. 아마도 저와 오빠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기억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린은 엠마의 손을 잡은 채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기사로서 예언의 완수가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크로셀이 저를 노리고 온다면 저는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완수가 아닌 제 개인의 복수에요.”
아린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아린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저를 도와주세요.”
테인은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가장 먼저 답했다.
“정말이지. 내 마지막으로 이만큼 잘 어울리는 파티가 있을까? 대악마가 둘에 아칼란, 이제는 크로셀까지라고? 복 터졌군.”
덱스도 휘파람을 휙 불었다.
“나는 마음껏 날뛸 수만 있으면 돼.”
브란트는 다가와 엠마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꼭 도울 수 있으면 좋겠군. 그래야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디에고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아린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다들.”
모두의 대답을 들은 아린이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에드도 다행이다 싶었다. 자신은 아린이 어떤 선택을 해도 받아줄 생각이었지만, 일행 모두가 한 마음일 줄은 몰랐다.
그때 테인이 입을 열었다.
“크로셀이 움직였다면 자네 오빠도 위험할 수 있겠군. 연락은 취했나?”
“아뇨. 그래서 먼저 다음 마을로 가야 할 것 같아요.”
“그거라면 내가 아스트론 교단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보는 것처럼 테인의 정보력은 남달랐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크로셀의 단원에게서 뭔가 나온 것은 없었나?”
에드는 그 말에 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이것밖에 없더군요.”
테인은 손거울을 받아서 뒤집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셀의 열 개의 손가락 중 하나였군.”
“열 개의 손가락이요?”
“크로셀에는 여섯 명의 사도와 열 개의 손가락이 있네. 그 밑에 있는 것들은 다 잔챙이들이고 그들만이 제법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알려졌지. 드레드의 손에 다섯 명의 사도와 일곱 개의 손가락이 찢겨 나간 것으로 알았는데 다시 채운 건가?”
“대악마를 갈아탔다면 머릿수 채우는 건 어렵지 않았겠죠.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크군.”
테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일단 크로셀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도록 하지. 다들 고생했으니 쉬도록 하게. 덱스와 브란트가 오늘 야간 경계를 맡으면 되겠군.”
“전 괜찮습니다.”
에드는 솔직히 이번 일은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싸운 것은 아린이었으니까.
덱스가 다가와 에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우리도 활약할 기회를 주라고.”
브란트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에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은 부탁드리죠.”
더그가 에드와 아린에게 데운 스튜와 빵을 건네주었다. 아린은 어딘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빵을 스튜에 찍어 먹었다. 에드는 그녀의 옆에서 빵을 찍어 먹으며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에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없으면 이 일행은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자신이 없어도 저들끼리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덱스와 브란트 둘 다 찾아오는 마물 정도는 우습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니 야습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들 크로셀의 무서움을 모르는 걸까요?”
아린이 걱정하듯 말하기에 에드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에게는 어렸을 적 트라우마가 되었을 적들.
크로셀의 악명은 지독했고, 그들의 움직임은 은밀해서 쉽게 처단하지 못했었다. 드루이드 드레드가 나서서 상대하지 않았다면 크로셀을 뿌리 뽑지 못했을 정도의 강적이었다.
“우리 일행이 대악마를 상대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에요. 그러니 고작 크로셀의 이름에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린.”
아린이 돌아보기에 에드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린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아린은 강하다. 하지만 어렸을 적 트라우마는 상대를 더 강하고 크게 느끼게 해준다.
아린이 크로셀의 열 개의 손가락 중 하나를 상대하는 동안에 분노에 사로잡혀 성기사가 아니라 광전사처럼 싸웠던 것도 그 두려움에 따른 반발작용이었으리라.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그 정도는 아린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강해졌다.
그러니 그녀가 두려움을 이기게 해줘야 했다.
아린은 에드의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요. 두려워하지 않을게요.”
다시 크로셀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이순간 저렇게 그 이름 앞에서 웃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햄튼 시의 교회에서 기도를 올리던 아론의 옆에서 함께 기도를 올리던 엘리스는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오는 이를 보고 기도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이. 그의 갑옷에 그려진 아스트론의 문양을 보면 그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아스트론의 성기사였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성기사는 아론에게 다가와서는 물었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길. 아론 주임 사제 되십니까?”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길. 제가 아론입니다만 무슨 일로 성기사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성기사가 이런 벽지까지 올 일은 없었기에 아론은 솔직히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성기사는 품에서 봉인된 편지 하나를 건넸다. 아론이 그걸 받아들자 성기사가 설명했다.
“성기사 존입니다. 그리고 이건 본단 귀환 명령입니다.”
아론은 봉인을 열고 안의 내용을 읽었다. 무려 교황의 인장이 찍힌 귀환 명령서였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호위만 명받았을 뿐입니다.”
아론은 가만히 앞에 선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는 교단의 인원에 비해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만큼 최정예였다.
그런 귀한 성기사를 고작 자신의 복귀 호위에 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준비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오래드릴 수는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아론은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엘리스를 돌아보았다. 켈피를 만나 목숨이 위험했다가 에드에게 구함을 받고 나서 신실함이 더해진 그녀였다.
에드가 무사하기를 바라서인 건지 아니면 아스트론에 대한 믿음이 커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교회에 살다시피 해서 많이 가까워졌기에 작별 인사는 하고 싶었다.
오늘 헤어지면 아마 다시 만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엘리스 자매님. 곧 새로운 주임 사제께서 오실 겁니다. 그때도 믿음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아론 사제님. 본단으로 가시면 대사제로 오르시는 건가요?”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고 본단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저를 찾아오세요. 엘리스님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내겠습니다.”
“그 약속 잊으시면 안 돼요.”
아론은 엘리스를 향해 축원을 남겼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기를.”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엘리스와 인사를 나눈 아론이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도 넷이나 되었고, 마차를 모는 이 또한 훈련된 수사로 보였다.
성기사 존이 다가와 말했다.
“마차에 오르시죠.”
아론이 마차에 오르자 존이 그를 따라 마차에 탔다. 존이 마차에 타자 마차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제야 존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
존은 잠시 아론을 바라보다가 아는 선에서만 답해주기로 했다.
“크로셀이라고 아십니까?”
아론은 그 이름에 사색이 됐다. 아린이 당시의 기억을 잊었기에 자신도 기억을 잊은 척하고 살아왔던 이름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드루이드 드레드님이 궤멸시키지 않았습니까?”
“그 잔당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론 사제님의 신변 보호를 요청해 오기도 했고요.”
“누가 제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는 겁니까?”
“아린 경이 요청했습니다.”
아론은 그 말에 살짝 인상을 굳힌 채 물었다.
“그럼 아린 경도 보호를 받는 겁니까?”
“그녀는 성기사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성기사의 자부심을 잘 알고 있지만, 아론이 기억하는 크로셀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끔찍했던 자들.
인간의 탈을 썼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마차가 햄튼 시를 나와서 대로를 달리던 중에 극에 달했다.
마차가 갑자기 멈추기에 앞으로 쏠렸던 몸을 똑바로 한 아론을 잡아준 존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길이 막혀 있습니다.”
존이 밖으로 나오니 그들이 가는 길에 나무가 쓰러져 막혀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나무를 쓰러트린 것을 알아본 존이 무기를 뽑으며 말했다.
“적이다.”
존의 말에 기사들이 검을 뽑고 사방을 경계할 때 대로의 뒤편으로 로브를 걸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열 명.
존은 그 모습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성기사가 지키고 있는데 고작 저 인원으로 자신들을 잡으려고 한 건가?
“고작 이 인원으로 아스트론의 성기사 앞을 막는 거냐?”
존의 물음에 대한 답은 대로를 막은 나무 위에 나타난 여인이 답했다. 이마에 크로셀의 문양을 새긴 여인은 눈을 붉게 물들이며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런 맛있는 것들을 남한테 양보할 것 같아?”
여인의 등장에 시선을 돌렸던 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붉은 눈의 여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아론은 성기사 존이 밖으로 나가고 적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타난 이들이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곧 싸움이 시작됐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소란이 잠잠해졌다.
아론은 긴장한 채 마차의 문을 바라보았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이가 존이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들어온 여인의 이마에 그려진 크로셀의 문양을 본 순간 아론은 참담함을 숨기지 못했다.
여인은 아론의 맞은편에 앉아서 잘린 자신의 오른손목을 핏빛 실로 꿰매며 아론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성기사라고 실력이 제법이야. 이렇게 다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여인은 꿰맨 오른손을 움직여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모시고 오라는 말을 듣고 찾아오기는 했는데 완전 내 이상형이네. 반가워. 난 여섯번 째 마야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