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구원
시체의 산에서 고개만 내미는 사내의 이마에 문양을 본 순간 아린은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단편적인 기억.
저 문양을 한 자들에 둘러싸인 자신과 오빠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벌이던 끔찍한 의식.
사람들을 거꾸로 달아놓고 그들의 목을 갈라 피를 받아 만들어낸 연못. 그 안에서 꿈틀대는 어떤 존재.
그리고 그때 나타난 한 마리 곰.
4미터는 되는 곰이 나타나 그들을 쓸어버리고 자신과 오빠를 구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곰이 사람으로 변해서 오빠와 자신을 안아주는 것까지 떠올랐을 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아무것도 못 하던 그 시절의 자신이 아님을 증명하듯 던진 해머가 상대의 머리를 부쉈다면 가라앉았을 텐데 그 자는 시체들을 움직여 그 공격을 막아냈다.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는 자들.
그들에 대한 분노가 기억을 조금 더 깨웠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 모두가 그들의 손에 죽었음을 떠올랐다. 자신과 오빠를 지키기 위해서 나섰던 아빠와 자신들을 숨겨주려 했던 엄마.
그 둘을 기괴하게 엮어서 만들었던 끔찍한 형상. 그 둘에게서 쏟아지던 핏물.
그 핏물 속에서 몸을 일으키던 존재.
그 모든 것이 기억나며 아린은 정신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시체들이 부서져 나가면서 점점 기억이 선명해졌다. 끔찍한 기억.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던 오빠.
그리고 곰에서 사람으로 변했던 그 사내.
자신을 안아주던 따뜻한 팔.
그 기억들이 떠오르는 동안 들끓던 분노는 점점 거세어져 갔다. 그렇게 시체들을 때려 부수는 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냉기가 전해지면서 정신이 조금 돌아왔지만, 앞에 있는 것을 부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때 뒤에서부터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그제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린! 진정해요!”
점점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늪처럼 자신을 잠식하던 끔찍한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 줬다.
“하악! 하악!”
그제야 멈췄던 숨이 쉬어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과 어깨를 휘감고 있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저 새끼 숨통은 아린이 끊게 해줄 테니까 진정해요.”
아린은 그 말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아린의 호흡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는지 에드가 감싸 안았던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잠깐 묶어 놓는 정도밖에 안 돼요. 이제 곧 나올 거예요.”
빙결의 활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지만, 누더기 골렘을 통째로 얼린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수의 시체를 잃겠지만, 이곳에 있는 시체들은 이백여 구가 넘어가니 버틸 수 있으리라.
얼음 덩어리에 쩍쩍 균열이 가는 것을 보면서 에드가 물었다.
“놈이 어디 있는지 느껴지나요?”
“저 가운데에 있어요.”
“그럼 제가 길을 열게요.”
아린이 에드를 돌아보았다. 전위는 언제나 자신이 맡아왔는데 에드가 길을 연다는 말에 그를 보니 이미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었다.
“기회는 올 거예요.”
아린의 시선이 다시 누더기 골렘을 향했다. 얼음 덩어리에 간 균열이 커지더니 사방으로 폭발했다.
그걸 바라보던 에드가 화살의 시위를 놓았다. 빙결의 활은 강화가 되면서 재미있는 기능이 생겼다. 냉기를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통째로 얼리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한 방향으로 얼리는 것이 중심에 다가가기 쉽다.
에드가 쏘아 보낸 화살이 얼음 덩어리를 깨고 나오던 누더기 골렘의 가슴에 꽂혔다.
쩌저정.
중심을 향해 한 방향으로 냉기를 분출한 화살이 꽂힌 곳은 반경 1미터 정도의 크기만 얼어붙었다. 그리고 중심을 향해 냉기가 뻗어 나가며 시체들을 얼려버렸다.
아린은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해머를 던졌다. 신성력을 머금은 해머가 날아가면서 정확히 에드가 얼린 부위들을 박살 냈다. 에드는 추가로 두 개의 화살을 더 날렸다.
시체들을 아무리 많이 쌓았다고 해도 결국 전체를 시체로 두르려고 하다 보니 한 방향에서 중심을 향해 파고들면 시체를 많이 얼릴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시체들이 깨져나가며 단번에 그 중심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의 화살이 재차 날아들었을 때 그걸 막기 위해 시체들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뻥 뚫린 길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다급하게 시체를 이용해서 막지만, 두 개의 화살이 꽂히는 순간 뚫린 구멍을 막으려던 시체들이 모조리 얼어붙었다.
그때 이미 아린은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중에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집어 든 아린은 방패를 앞으로 한 채로 그대로 돌진했다.
시체들이 얼어서 열린 길로 아린이 돌진했다. 방패를 든 채 돌진하는 아린을 향해서 다급하게 옆에 있던 시체들의 뼈를 뽑아내 창을 만들어 날려보냈다.
하지만 날아오는 뼈의 창은 신성력을 두른 방패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대로 돌진한 아린의 검이 사내의 가슴에 박혔다.
“크윽!”
크로셀의 사내가 펼친 시체 조종술이 신성력이 듬뿍 담긴 성검에 찔리면서 깨져나갔다. 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던 시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그 시체들의 산 위에서 아린과 크로셀의 사내는 검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아린은 사내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크로셀이 어떻게 아직 남아 있는 거지?”
사내는 자신의 심장에 검이 꽂혀 있음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흐흐흐. 우리는 살아남았고, 그런 만큼 더 강해졌지.”
시체를 조종할 줄 알아서 그런지 몰라도 사내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할 말을 다하고 있었다.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쉽군. 제대로 준비하고 싸웠다면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나?”
“물론이지. 이 근처에 내가 있어서 너희를 죽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강하군.”
사내는 키득거리다가 아린을 바라보며 저주를 내뱉듯 말했다.
“성기사 아린. 너는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아린이 그 말에 사내의 가슴에 박았던 검을 뽑아내며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크로셀.”
아린은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목을 잘라버렸다. 목이 바닥에 구르면서도 사내는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넌 우리를 이끌게 될 것이다!”
아린은 그런 사내의 머리에 성검을 꽂아 넣고 신성력을 일으켰다. 신성력에 사내의 머리가 타오르자 그제야 원하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끄아아아악!”
신성력에 타버린 사내의 머리를 부순 아린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시체들의 산 위에서 기도하는 그녀를 중심으로 푸른 빛의 물결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에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활을 내렸다. 한참을 기도 올리던 아린이 시체의 산을 걸어 내려와서는 에드 앞에 섰다.
“이들을 묻어주기는 힘들 것 같으니 화장이라도 해주고 싶어요. 도와줄래요?”
“물론이죠.”
에드와 아린은 교회 안에 있던 시체들을 모두 꺼내 교회 앞에 쌓았다. 그리고 시체들을 화장했다. 사람이 타는 역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아린은 말없이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 옆에서 죽은 크로셀의 사내의 품에서 나온 물건을 살펴보았다. 그 흔한 반지 하나 없는 거지였다. 나온 것이라고는 꼴랑 손거울 하나였다.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아린이 입을 열었다.
“크로셀에 대해 알아요?”
“드루이드 드레드의 업적 중에 악마 종속자와 추종자들의 연합체인 크로셀을 궤멸시킨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저랑은 아무런 연도 없다고 여겼고요.”
딱 봐도 사연이 있어 보였다. 에드가 거울을 품에 넣고 돌아보자 아린은 에드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 기억은 오빠나 저나 잊어버려서 기억 못 하고 있었어요. 처음 기억이 베네딕토 대주교님과의 것이니까요. 그래서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 못 했어요.”
아린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조금 전에 그자의 이마에 그려진 크로셀의 문양을 보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크로셀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고, 그들의 피를 이용해서 연못을 만들었어요. 그때 저와 오빠를 지키려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에게 잡혀서 기형적으로 엮인 후에 제물로 바쳐졌죠.”
아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에드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자 그녀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후우. 그때 저희를 구한 것은 한 마리 곰이었어요. 크로셀을 찢어발기고, 저희를 구해주었던 탄탄한 팔이 기억이 나요.”
어? 이거 아는 이야기다. 드루이드 드레드로 플레이할 때 크로셀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방해하는 퀘스트가 있었다.
그때 남매를 구해냈던 것도 기억났다.
“아마도 3영웅의 한 명인 드루이드 드레드였던 것 같아요.”
당시 드레드 손에 죽던 크로셀의 장로 하나가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가 될 이들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남매가 설마 아론과 아린일 줄은 몰랐다.
아린이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리고 에드를 돌아보았다.
“크로셀은 부활했고, 그들은 저를 노리고 있어요.”
“남매를 모두 붙잡았다면 아론도 위험한 것 아닙니까?”
아린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에드는 그녀가 당황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단 다음 마을에 도착하는 대로 교회를 통해 연락을 취하도록 하죠.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예요. 크로셀이 이렇게 작정하고 움직인 것은 의외이기는 한데 그들이 이렇게 움직인 이상 교단에서도 그들을 파악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크로셀이 움직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요?”
“무엇보다 그들이 우리를 노렸다는 것이 중요한 거겠죠.”
아린은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저를 노리는 걸지도 몰라요.”
크로셀의 사내가 죽기 전에 지껄인 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하지만 그녀 혼자를 노렸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준비 상태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자의 능력이다. 크로셀의 장로도 아닌 자의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강했다.
누더기 골렘이 수많은 제물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그 위력이 상당했다. 아무리 아린이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고 해도 가만두었다면 위험했을 정도였다.
최소 중급 악마 이상의 힘. 상급 악마에는 미치지 못해도 혼자서 상대하기 힘든 자였음은 틀림없었다.
아린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성기사들의 지원을 받아야겠어요.”
에드는 중얼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아린이 고개를 들자 에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성기사들은 저희 일행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겁니다. 아린이나 되니까 받아들인 거지 다른 이들이라면 오히려 우리를 잡아 죽이려고 하겠죠.”
아린이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면 제가 따로···.”
“그리고 아린을 따로 보낼 생각도 없습니다.”
아린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에드가 그녀의 두 눈을 직시한 채 말했다.
“제가 대악마 네프사엘과 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아린은 제 곁에 남았습니다. 고작 크로셀 정도를 상대하는데 아린을 떠나 보낼 생각은 없어요.”
아린은 에드의 말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억의 늪에 빠져들어 갈 때 자신을 건져 올렸다. 자신을 구원해준 남자.
지금까지 자신의 이정표가 되어준 남자.
그런 남자가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날 떠나지 말아요.”
아린은 시체들을 태우면서 끔찍했던 기억을 되씹고 있었다. 그 기억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어둠 속에서 끌어올려 지는 느낌이다.
아린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안 떠나요.”
아린은 에드에게 성큼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에드의 몸이 긴장으로 경직될 때 아린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함께 싸워요.”
에드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에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린이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