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성공
에드는 아린이 소녀를 치유하는 동안 브란트를 견제하고 있었다. 대충 상황은 짐작했지만, 확신이 들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저 눈빛이 과연 거짓일까?
그렇다면 희대의 사기꾼, 아니면 희대의 연기자라고 해도 되리라.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레벨이 더 오른 지금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테지만, 이곳에는 그 여파에 휩쓸리는 것만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이들이 몇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켜보는 가운데 디에고가 에드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물었다.
“저 아저씨 괜찮은 걸까요?”
딱 봐도 전신 화상을 입은 브란트의 상태도 심각해 보였다. 하지만 그 또한 악마의 힘을 다루는 만큼 브란트는 회복 주문도 걸어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회복하리라.
“괜찮을 거야.”
디에고는 에드의 대답에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전신의 피부가 타서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에드 일행과 뭔가 사연이 있어 보여 더 캐묻지 않고 아린이 치료하는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는데 아린의 신성력이 뿜어내는 빛 때문에 더욱 창백해 보였다.
디에고가 홀린 듯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슬그머니 옆에 나타난 테인이 흘흘 웃으며 말을 꺼냈다.
“크면 나라를 기울게 할 미인이 되겠구나.”
“그쵸? 엄청 예쁠 것 같죠?”
“흘흘. 그래. 다만 애비가 만만치 않은 자라서 그게 걱정이구나.”
디에고는 테인의 말에 별생각 없이 답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갈색의 피부 때문에 그나마 티가 덜 났다.
테인은 외눈 안경을 반짝이며 흘흘 거렸다.
“좋을 때구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당황해하는 모습에 테인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에드가 활로 겨누고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칼란의 비밀 병기.
그가 자신들을 찾아와 딸을 부탁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알고 온 것인지 아니면 아린의 신성력을 느끼고 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딸이 저리 심한 중상을 입고 찾아왔다는 것은 팽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테인의 시선이 아린을 향했다.
아린은 성기사치고 사고가 유연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고 해도 과연 브란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굉장한 전력이 될 인물이지만, 그건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대략 30분이 지나서야 아린은 신성력을 거두었고, 지친 기색으로 소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줬다.
피가 엉겨 붙어 있던 소녀의 머리를 넘긴 아린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코에 귀를 가져다 대고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보고 아린이 담담히 말했다.
“고비는 넘겼어요.”
아린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린은 디에고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디에고. 물이랑 수건 좀 가져다줄래?”
디에고가 물주머니를 가져다주자 수건에 물을 적신 아린이 소녀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상처의 핏자국도 닦았다. 가슴에 길게 흉터는 남았지만, 살아남았다.
아린은 소녀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주며 뿌듯함을 느꼈다. 악마를 죽이고 제물로 바치는 것 또한 보람을 느꼈으나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구하는 느낌은 또 달랐다.
소녀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 준 아린이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 좀 지켜줘.”
디에고가 소녀를 받아 안았을 때 덱스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덱스는 여전히 소녀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디에고의 옆에 섰다.
에드는 그걸 확인하고는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브란트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엠마는 살 수 있는 겁니까?”
아린은 그 눈빛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고비는 넘겼어요. 흉터는 평생 남겠지만.”
브란트는 그 말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린은 그 모습에 에드를 돌아보았다. 적으로 만났던 이가 이렇게 낮은 자세로 감사를 표하는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에드는 화살을 화살집에 돌리고 활도 다시 착용했다.
사람의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다. 이렇게 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면 속은 자신을 탓해야겠지.
“고개 좀 들어 봐. 무슨 상황인지 이야기나 들어보게.”
에드의 말에 브란트가 고개를 들었다. 엠마의 목에 검이 겨눠져 있지만, 분위기가 누그러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제 이름은 브란트. 트라비아 동부군 돌격대원이었습니다. 쿠레나이와의 국지전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을 때 아칼란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대로 폐인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시험에 응할 것인지를 물었죠.”
브란트가 거기까지 말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에드는 물주머니 하나를 던져줬다. 브란트가 물주머니를 받아서 감사의 눈빛을 보낸 뒤 벌컥벌컥 마신 후에야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엠마가 눈에 밟혀서 실험에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폐인으로 엠마 앞에 서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실험이 생존율 0.02% 미만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죠.”
아린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브란트의 말대로라면 그것만으로 이미 오천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는 말이니까.
브란트는 하늘에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그들은 악마의 피를 주사했고, 적응하는 자를 찾아내는 중이었습니다. 그곳에 온 이들은 모두 사연이 있었고, 삼천 명이 넘는 이들이 죽을 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실험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살아남았기에 그들은 저를 가두고 계속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오천 명에 달하는 이들이 모두 죽을 때쯤 저의 적응이 끝났고 실험은 끝났습니다.”
브란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적응이 끝날 때까지 매 순간 죽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엠마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제가 적응을 조금씩 해나가자 놈들도 생각이 바뀌었는지 엠마를 데리고 왔습니다. 제게 희망을 주려고 했죠. 엠마에게 고등 교육을 해주고 아카데미에 보내 왕국을 위한 인재로 키워준다는 말에 고통을 참았습니다. 덕분에 고통을 이겨냈지만, 그들은 저의 힘을 보고는 두려워했죠.”
하긴 악마를 찢어 죽여서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브란트의 그 눈이 문제다.
아주 짧은 미래지만 미래를 읽기라도 하는지 공격을 예측하는 능력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에드조차 애를 먹을 만큼.
아칼란 요원들이 두려워 할만했으리라.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엠마를 감금한 채 제가 임무를 성공하고 왔을 때 한 번씩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번 임무를 실패했죠.”
에드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죽이러 왔던 임무 말이군.”
“악마가 아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은 처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칼란에 인질이 잡혀 있었으니까?”
“···예.”
브란트의 이야기를 듣던 테인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칼란에서 악마의 힘을 다루게 된 것으로 아네. 다비드라는 자가 연관이 있다고 하던데 뭔가 아는 것이 있나?”
다비드라는 말에 브란트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서슬 퍼런 살기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에드를 제외한 모두가 무기를 집어 들었다.
에드는 분노하는 브란트에게 주의를 줬다.
“진정해.”
브란트는 긴 숨을 토해내고는 말을 이었다.
“이 실험의 총 책임자였습니다. 다비드는. 악마의 힘을 다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제게서 피를 뽑아갔습니다.”
에드는 그 말에 브란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악마의 피를 주입해서 견뎌내고 적응한 그의 피를 특별한 방법으로 정제한다면 일반인도 악마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나 보다.
고작 불로장생이라고 하지만 권력자에게는 그 이상 탐나는 능력은 없으리라.
다비드는 태자에게 그 힘을 내주면서 많은 것을 얻어냈으리라.
하지만 그는 끈 떨어진 연이 되었고, 태자파의 수장인 카르엔도 죽었다. 게다가 펜드래건이 직접 아칼란에 손을 쓴다고 했다.
그런데 다비드는 왜 브란트를 폐기하려고 한 걸까?
전력으로도 쓰기 좋고, 그 피를 이용해서 악마의 힘을 권력자에게 팔 수도 있는데?
테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남의 손에 주느니 없애버리려고 한 건가?”
“남의 손이요?”
“자네도 알지 않나? 태자가 죽으면서 국왕파가 힘을 얻었네. 아칼란은 가장 정보에 민감한 곳이니 다비드도 알아챘겠지. 자신이 설 곳이 없어졌음을.”
확실히 다비드의 입지가 좁아졌다.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쳐야 하는 처지인 다비드가 브란트와 엠마를 데리고 움직인다?
그렇다면 너무 쉽게 꼬리가 잡힌다.
“시간을 끌고자 한 건가?”
에드의 중얼거림에 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칼란의 요원들이 저 아이를 노렸는데도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아마도 저 친구가 살아남았을 경우를 대비했겠지. 저 친구라면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어 줄 테니까.”
다비드란 자. 생각보다 치밀한 녀석인 것 같았다. 만약의 만약까지 생각하는 자라는 말.
“그리고 악마의 힘을 쓰는 상태로 치료를 위해 신관을 찾아간다면 그곳에서 브란트를 죽였겠죠.”
“그랬겠지.”
에드도 등장하는 순간 화살부터 날리고 봤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과 외모는 흉악했다. 초면이 아닌 데다가 그가 아이를 품고 있음을 확인했기에 일단 아이부터 살리고 보았을 뿐이다.
신전이나 교회를 찾아갔다면 살려주기보다 그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다 신전이나 교회를 부수기라도 했다면 아스트론 교단의 공적이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브란트에게 집중되었을 터.
브란트를 미끼 삼아 완전히 숨을 생각이었나 보다.
에드는 브란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를 어떻게 찾은 거지?”
브란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눈을 가렸다.
“악마의 힘을 깨우면 단기간 미래 예측이 가능합니다. 원래는 단기간만 사용 가능했는데 엠마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힘을 쓰다 보니 그 아이를 살릴 길이 보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 왔습니다.”
테인은 그 말을 듣고는 인상을 굳혔다.
“자네가 맞았다는 악마의 피는 아무래도 대악마 페스톨레스의 피인가 보군. 별의 악마는 미래를 읽을 수 있다고 했지. 그 힘 덕분에 미래를 읽을 수 있나 보군.”
에드는 그 말에 다시 한번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전투에서 단기 미래만 읽어내던 브란트는 딸의 죽음 앞에서 그 능력을 개화한 걸까?
조금 더 긴 미래를 볼 수 있도록?
이 남자. 더 탐이 난다.
원래대로라면 아칼란의 뜻대로 움직이며 악마를 처리했을 인물이다. 하지만 주인공 중 하나라면 그는 어떻게든 아칼란의 마수에서 벗어났을 터였다.
그의 인생이 꼬인 건 에드가 저지른 일들의 탓일 가능성이 컸다.
에드는 도의상 이 남자를 줍기로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브란트의 얼굴에 갈등이 서렸다. 그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 에드가 그의 시선을 따라 뒤편의 엠마를 봤다가 다시 그를 보고는 물었다.
“복수냐? 딸이냐? 그게 고민인 건가?”
브란트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닙니다. 제겐 딸이 우선입니다.”
에드는 그 말을 듣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마음이야 주울 마음이 가득했지만, 일행이 있으니 자신의 맘대로만 결정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에드의 물음에 테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일행으로 받아들일지 고민인 건가?”
에드가 굳이 답하지 않았지만, 테인은 브란트를 바라보며 답했다.
“믿을 수만 있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수 있을 것 같군.”
단순히 능력만 보고 뽑는다면 특채로 뽑힐 인물이지만, 적으로 만났던 자였다.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정황상 믿음이 갔지만, 그것만 가지고 덥석 믿기에는 아칼란이라는 이름이 걸렸다.
에드가 고민할 때 디에고가 지키고 있던 엠마가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고 저 멀리 무릎을 꿇고 있는 브란트를 처음 발견하고는 곧장 몸을 날렸다.
덱스가 놀라서 목을 겨눴던 검을 치우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뻔했다.
“아빠!”
엠마는 그대로 사람들을 지나쳐 달려가 살이 짓무른 브란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엠마! 괜찮니?”
“응! 나 아무렇지도 않아. 아팠던 거 다 꿈이었나 봐.”
엠마는 그리 말하며 브란트의 양 뺨을 잡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게 꿈인가? 아빠랑 이렇게 만난 걸 보면?”
엠마는 손을 내밀어 브란트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왜 울어. 나보고 울면 엉덩이에 뿔 난다고 하더니.”
엠마는 눈물을 흘리는 브란트의 머리를 작은 품에 안고 그 등을 토닥여줬다.
흐느끼는 브란트와 그를 달래주는 엠마를 바라보던 아린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말했다.
“저 아이 상태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요.”
에드는 아린의 말이 그의 동행을 허락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넘기 힘든 벽이었던 아린의 허락이 떨어졌다.
줍기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