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줍기
굳은 표정의 사내는 구덩이 아래에 묶여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브란트. 네 처우에 관한 결정이 내려왔다.”
양팔에 칭칭 감긴 쇠사슬이 벽면 좌우에 고정되어 있던 사내. 브란트가 고개를 들자 10미터는 되는 높이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네 힘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됐다. 들켰다면 반드시 죽여서 흔적을 남기지 말았어야 했지.”
사내는 가볍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스트론의 성기사에게 그 힘을 드러내고 죽이지도 못했지.”
브란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안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성기사는 사실 혼자 만났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목표가 되었던 자. 악마 사냥꾼 에드가 너무 강했다.
자신이 어쩌지 못할 정도로.
악마의 힘을 쓰고도 감당하지 못한 강자였다.
“그래서 넌 폐기다. 그리고 너에 대한 모든 증거는 소각될 거다.”
브란트가 그 말에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 그럼 내 딸은 어떻게 되오?”
“당연한 걸 말하는군. 소각이다.”
“안 됩니다!”
브란트가 다급하게 외치며 몸부림치자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이 철그렁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런 브란트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손짓하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아칼란 요원들이 브란트가 들어가 있는 구덩이로 기름을 콸콸 붓기 시작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딸만은. 엠마만은 안 됩니다.”
사내는 그 말에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이미 그 아이도 소각 절차에 들어갔다.”
사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서며 손짓했다.
“실수 없도록 확실히 처리해라.”
사내가 떠나자 기름을 붓던 이들이 횃불을 구덩이로 던졌다. 날아들던 횃불이 떨어지고 구덩이에 불길이 일자 브란트가 사납게 사내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다-비-드!”
그러나 그 외침을 들어야 할 사내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브란트는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자신이 죽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딸아이 엠마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칼론을 적으로 두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브란트는 벽에 연결된 사슬을 당겼다. 당연히 뽑혀 나오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마물도 잡아 가둘 수 있는 곳.
브란트는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참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호흡이 부족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칼란에서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이 기회다.
연기가 점점 심해지는 동안 눈을 감은 브란트는 자신의 몸 안에 깃들어 있는 저주받은 힘을 일깨웠다. 이 힘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믿을 것이 없었다.
전신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한쪽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콰드득.
벽에 박힌 에슬란의 사슬이 고리를 끊고 튀어나오자 브란트는 그걸 위로 휘둘렀다. 연기에 가려져 아래를 확인하지 못한 아칼란 요원의 목에 사슬이 감기는 순간 그걸 당기며 뛰어올랐다.
단숨에 구덩이를 빠져나간 브란트는 다른 아칼란 요원이 단검을 뽑아 드는 사이에 이미 그의 목을 잡고 비틀어서 구덩이 아래로 던져버렸다.
브란트는 구덩이 위에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다행이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칼란에서도 극비로 다뤄지는 만큼 관련된 이가 아니라면 아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키던 이들도 이게 전부다.
브란트는 망토로 몸을 가린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엠마를 구하려면 잠시도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칼란 요원들이 타고 왔을 말을 타고 엠마를 가둔 안가를 향해 말을 몰았다. 브란트는 저 멀리 안가가 보일 쯤에 그곳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았다.
“안 돼!”
말을 타고 달려서는 늦는다. 말에서 뛰어내려 다시 악마의 힘을 일깨운 브란트가 도약했다. 한걸음에 수십 미터씩 뛸 수 있었지만, 브란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가가 완전히 화마에 뒤덮인 다음이었다.
브란트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안가로 돌진했다.
벽을 부수고 들어간 브란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엠마! 엠마!”
브란트의 절절한 외침에 대한 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브란트의 귀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에 타서 무너지는 소음 때문에 간신히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
“엠마!”
브란트가 벽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자신의 딸 엠마가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엠마!”
브란트가 다급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고작 열 살짜리 아이에게 칼을 휘두르다니.
브란트가 다급하게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서 엠마의 가슴에 난 상처를 지혈했다. 그런 브란트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엠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눈을 뜬 엠마는 브란트를 보고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졌다. 거친 수염을 만지며 엠마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억지 미소라는 것을 알고 브란트가 빠르게 말했다.
“아빠야. 이제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빠. 이거, 꿈 아니지? 진짜 아빠지?”
“맞아. 아빠야. 아빠가 구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고 견뎌야 해. 잠들면 안 돼?”
엠마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입에서 왈칵 피가 뿜어져 나와 더는 말할 수 없었다. 그걸 본 브란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솟구쳤다.
안가의 지붕을 부수고 솟구친 브란트는 저 멀리 말을 달리고 있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아칼란의 요원들.
그들을 쫓아가 죽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저자들을 쫓다가는 엠마가 죽는다.
브란트의 왼쪽 눈이 맹렬하게 붉은빛을 토해냈고, 그는 멀어지는 아칼란 요원들과 다른 방향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걸음에 수십 미터씩 도약하면서 브란트는 품에 안은 엠마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이 힘이 경고하는 방향으로 달렸다.
악마의 힘이 경고하는 곳. 그곳에 엠마를 구할 수 있는 이가 있으리라.
왕도를 벗어난 지 사흘.
마물이 찾아오는 밤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오늘 밤에 깨어있는 것은 에드와 덱스.
덱스는 무기를 꺼내 무릎 위에 올린 채 오늘의 야영지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았다.
“오늘은 또 어떤 놈이 올까?”
뭔가 기대감 어린 모습에 에드는 픽 웃음을 흘렸다. 덱스는 첫날 밤에 찾아온 마물을 보고 휘파람까지 불며 먼저 달려들어 썰어버렸으니까.
사람과만 싸워왔으면서도 마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오히려 기뻐 날뛰는 모습은 과연 싸움에 미친 놈다웠다.
덕분에 에드는 그저 덱스에게 마물을 만나면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말만 해주면 됐다. 덱스는 낮에 자고 밤에 싸우는 것도 금세 적응했다.
에드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활을 꺼내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지고 있지만, 아직 밤이 되지는 않아서 주변의 풍경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드는 고개를 내려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더그가 저녁 준비하는 것을 싹싹한 디에고가 돕고 있었고, 테인은 아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테인과 담소를 나누던 아린은 에드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린 듯한 외모의 아린이 요즘 들어 미소가 꽤 많아진 것 같다고 여기던 에드는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고 팽팽히 당긴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덱스도 무기를 뽑아들고는 물었다.
“어디야? 내가 할래! 내가!”
“잠깐만.”
멀리서지만 확실히 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리가 울리는 간격이 이상했다. 수십 미터 간격으로 좁혀지며 울리는 소리.
뭔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왜 그런 소리가 났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 위로 튀어나오는 존재를 본 에드는 인상을 굳히고 활의 시위를 한껏 당겼다.
근육이 잔뜩 부풀어 오르고 핏빛으로 물든 존재. 왼쪽 눈에서 번뜩이는 붉은 광채.
브란트다.
다시 한번 뛰어오르는 것에 맞춰서 화살을 쏘았다. 민첩이 올라서인지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도 전과는 비할 수 없이 빨라졌다. 그렇게 날아가던 화살이 브란트를 향해 날아가던 중에 그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몸을 트는 것을 보고 화살의 방향을 틀었다.
이기어시를 이용해서 화살의 방향을 튼 에드는 아린이 해머를 던지려는 것을 보고 그녀의 앞을 막았다.
“잠깐만요. 사람을 안고 있어요.”
“인질을 데리고 있다고요?”
화살이 날아드는 순간 브란트가 몸을 틀어서 막으려고 한 것을 보면 인질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브란트는 금세 야영을 위해 준비 중인 곳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바닥에 내려선 브란트의 상태는 참혹하다고 할만했다. 불구덩이라도 뚫고 나온 것인지 보이는 피부가 녹아내려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런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가 보였다. 망토로 지혈하고 있지만, 안색이 나쁜 것을 보니 저러다 죽겠다 싶어 보였다.
에드는 두 발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브란트를 겨누며 물었다.
“우릴 찾아온 건가?”
브란트는 잠시 에드와 아린을 돌아보더니 근육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싸울 마음이 없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는데 브란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 딸. 엠마를 살려다오. 살려만 준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에드에게 향했다. 어제의 적으로 만났던 자가 자신의 딸을 도와달라고 찾아온 상황.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저 피를 흘리고 딱 봐도 생사를 오가는 소녀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브란트의 눈빛.
근육이 줄어들었어도 왼쪽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는데 오른쪽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이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
브란트가 소녀를 내려놓고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덱스. 조심해서 아이를 데리고 와.”
덱스는 처음 등장부터 남달랐던 브란트와 에드의 대화에서 뭔가 있다고 여겼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이를 안고 물러났다.
“아린. 아이 상처 좀 봐주세요. 그리고 덱스.”
“응?”
“검을 뽑아서 아이의 목을 겨눠.”
“응?”
덱스의 눈빛이 너 미쳤냐고 묻기에 에드는 순순히 답했다.
“브란트는 아칼란의 사냥개였고, 아칼란은 우리와 적대 중이야. 그 소녀도 아칼란의 요원일 수도 있어.”
방심을 유도하는 적일 수도 있다는 말에 덱스는 검을 뽑아 소녀의 목에 겨눴다. 덱스의 실력이라면 저 소녀가 진짜 아칼란 요원이라고 해도 수작을 부리기 전에 죽일 수 있다.
아린은 덱스가 소녀의 목에 검을 겨누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녀의 가슴을 덮고 있던 망토를 열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양손으로 상처 위에 올린 채 신성력을 일으켰다. 이건 연기를 위해서라고 낸 상처라고 하기에는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칠 만큼 깊은 상처였다.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푸른 빛이 그녀의 손을 타고 소녀의 상처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보통 상처가 아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또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낸 상처 같았다.
그 정도 상처라면 아린이 구할 수 있다. 그녀의 신성력은 아스트론 교단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니까.
에드는 아린이 소녀를 치료하는 동안 브란트에게 활을 겨눈 채 생각에 잠겼다. 브란트의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을 보면 저 소녀가 진짜 딸로 보였다.
상황만 보면 브란트는 팽 당한 것으로 보였다.
아칼란이 사냥이 끝나지 않았는데 사냥개를 삶아 먹으려 했다는 걸까?
이뤄낸 전적을 보면 악마의 시대 2 주인공 중 하나로 보이는 브란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에드 자신을 만나서 인생이 꼬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아칼란을 등에 업고 악마 사냥을 해왔어야 할 그가 이제 아칼란에 쫓기게 된다면 주연에서 조연으로 강등된 건가?
그럼 주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