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형
예상대로 브란트는 스스로 힘으로 회복이 되어 갔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가 재생되면서 원래의 피부를 되찾아가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브란트의 상태가 안 좋았기에 마차에는 브란트와 엠마, 테인과 아린이 탔다. 급한대로 마차 지붕에서 덱스와 에드가 지냈고, 마부석에는 디에고가 더그와 함께 타고 있었다.
브란트를 극진하게 챙기는 엠마의 모습에 테인과 아린은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브란트는 죄지은 것이 있어서인지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구하고 첫 번째 마을의 여관에서 저녁을 먹고 에드는 브란트를 따로 불렀다.
브란트는 자신이 전력을 다하고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인 에드의 부름에 살짝 긴장했다. 게다가 에드는 이 일행의 리더로 보였으니 그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긴장한 것이 역력해 보이는 브란트에게 에드는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여관 주인이 내준 주석잔에 찰랑이는 맥주의 거품을 바라보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브란트씨.”
처음에 만났을 때는 계속 반말로 대했지만, 일행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존대해주는 중이었다. 에드보다 족히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그의 외모와 딸까지 있는 가정을 꾸린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
그리고 브란트도 에드의 눈치를 본다. 일행의 리더에다가 무력도 확실히 보여줬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예?”
브란트가 고개를 들고 놀라서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엠마의 상처는 거의 아문 상태입니다. 굳이 아린이 돌봐줄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그 말씀은···?”
“언제든 떠나셔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브란트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이들을 적으로 만났고, 그들에게 딸의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런 자신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떠나도 좋다는 말을 하고 있다.
솔직히 자신의 전력이 아칼란에서도 놓치기 싫어했을 만큼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다. 일행 중에서 에드 다음 가는 실력이 자신일 거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무엇을 하는 일행인지 몰라도 자신은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을 일행에 받아줬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음의 부담이 적었다.
언제고 이들이 필요하다고 할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갚으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에드는 떠나도 좋다고 했다.
이렇게 은혜만 입고 일행을 떠난다? 엠마와 함께 하는 지금?
하지만 이기적인 마음도 고개를 쳐들었다. 엠마와 단둘이 몸을 숨기고 사는 건 어떤가? 자신이 악마의 힘을 지녔다고 한들 에슬란의 사슬 덕분에 폭주할 일도 없다.
엠마와 단둘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꿈에나 그리던 일이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지금 에드가 말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에드는 거기까지 말하고 주석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는 시원한 맥주를 겨울에만 마실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던 브란트가 물었다.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에드는 그 말에 잔을 내려놓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브란트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는 당신들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그랬죠.”
“그런데 제 딸을 구해주시고 이제 아무런 것도 바라지 않고 보내주신다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에드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답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언제나 나쁜 놈이 나쁜 거라고요. 당신은 그저 그들의 칼이었을 뿐이고 나쁜 놈은 아칼란일 뿐입니다.”
브란트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리 일행은 아스트론 교단의 예언에 따라 성기사 아린과 함께 악마 퇴치에 힘쓰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안전을 보장해 드릴 수 없습니다.”
브란트는 그 말에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엠마가 걸렸다.
“디에고라는 소년도 있던데···.”
“그 친구는 사령술사입니다. 중급 악마도 때려잡을 수 있는 친구니까 브란트 당신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전력입니다.”
“예?”
에드는 놀라는 브란트를 가늠해 보았다.
악마의 힘을 쓴다면 그도 중급 악마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은 넘는다. 솔직히 디에고보다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힘이 개화되고 있는 지금 어쩌면 예상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워 왔지만, 오는 길에 에드도 생각을 해보았다.
브란트가 미안해하는 것도 알겠고, 그가 고마워하는 것도 알겠지만, 그에게는 명확한 동기가 없다.
아린은 예언을 수행하는 중이고, 테인은 악마의 씨를 말리고 싶어 한다. 디에고는 후안의 아들로 그 원죄를 갚기 위해 함께 하고, 덱스는 그저 싸움이 하고 싶다. 지금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그러나 브란트는 다르다.
그는 지켜야 할 딸이 있었고, 지금까지 자의적으로 악마를 죽여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동기가 약했다.
에드 자신이 개입되지 않고 원래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아칼란을 따라 악마를 사냥하면서 차근차근 강해졌으리라.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틀어졌을 테고, 악마 사냥에 미쳐버렸을 수도 있었다.
엠마와 관련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이바닥을 뜰 기회를 준다기보다는 각오도 안 선 이가 그저 마지못해 일행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떠나서 팀플레이에 방해만 된다.
게임에서도 항상 그랬다. 실력은 등급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서 난이도가 몇 배로 올라가고는 했으니까.
브란트는 에드가 진심으로 말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앞에 놓인 주석잔의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에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에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브란트도 일어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창가에 기대서 밖을 구경하고 있는 엠마를 볼 수 있었다.
엠마는 방문이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브란트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아빠!”
엠마가 달려와 안기자 브란트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누군가의 감시 없이 이렇게 딸과 둘이 있던 게 얼마 만인가?
가만히 그녀의 체온을 느끼던 브란트는 조금은 이기적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엠마를 침대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엠마를 바라보았다.
엠마는 브란트가 말없이 바라보자 그의 눈을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했다. 미소를 지은 채 다소곳이 앉아서 바라보는 딸의 눈을 바라보던 브란트가 물었다.
“딸. 아빠랑 둘이서만 사는 건 어떻게 생각해?”
“둘이서만?”
“응. 둘이서만.”
엠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아린 언니랑 테인 할아버지랑 다 헤어져야 하는 거야?”
“그렇지.”
사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다. 그렇게 여겼다.
엠마는 정색하고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정색할 때의 표정은 제 엄마를 꼭 닮아서 브란트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아빠.”
“으, 응?”
“아빠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엄마가 내게 자주 해주던 말이 있었어. 아빠가 해줬던 말인데 그 말 때문에 아빠랑 결혼했다고 했거든.”
브란트는 엠마가 할 말이 뭔지를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고블린보다 못하다. 그러니 은혜를 받거든 두 배로 갚아라. 그게 사람 된 도리다!”
엠마는 옷을 잡아 좌우로 쫙 벌렸다. 가슴에 난 흉터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난 생명을 빚졌어. 그렇다면 내 목숨 두 개분을 갚아야 해. 그런데 지금 우리 둘이 살자고 떠나자는 거야?”
브란트는 엠마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 옷을 다시 여미게 해주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엠마의 양어깨를 잡고 말했다.
“이들은 굉장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단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어.”
엠마는 그 말에 정색한 채로 말을 이었다.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야. 죽음은 두렵지 않아. 허드렛일을 해서라도 은혜를 갚을 생각이야.”
브란트는 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잠시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었지만, 엠마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던 자신이 얼마나 창피한지 모르겠다. 그들은 적이었던 자신의 딸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구해줬는데 몸을 빼낼 수 있다는 말에 혹했다니 창피했다.
그리고 그제야 에드가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깨달았다.
아스트론 교단의 예언에 따라 퇴마행을 하는 성기사의 일이 하급 악마나 잡는 일일 리가 없었다. 저들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건 이들.
그런 그들에게 딸을 데리고 있는 자신은 목숨을 걸고 등을 맡길 상대가 아니라고 느낀 걸 터였다.
전장에서 자신의 등을 맡긴다는 것은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은 일. 그런 일에 마음이 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그건 실력 이전에 신뢰의 문제였다.
자신도 엠마의 걱정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거였는데 엠마의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만 있을래? 아빠 다녀올 곳이 있어.”
엠마는 브란트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보고는 양손을 들어 그의 뺨을 잡았다. 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빠. 엄마는 아빠가 떳떳한 남자라서 반했다고 했어. 나도 그런 아빠가 자랑스러웠고. 그러니 꼭 자랑스러운 아빠로 남아줘.”
브란트는 엠마의 머리를 쓱쓱 만져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정신 차리게 해줘서.”
엠마는 얼른 다녀오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브란트는 그런 엠마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에드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덱스였다. 그는 하품을 하며 물었다.
“아함. 무슨 일?”
“에드가 혹시 여기 있나?”
덱스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람 쐬러 간다고 올라가던데?”
“고맙군.”
브란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복도의 창문을 통해서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에드는 지붕 위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뭔가 사연이 있어 보여 잠시 바라보던 브란트가 다가가자 에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에드는 가만히 브란트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에드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려 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브란트는 그의 옆에 앉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뭘 보시는 겁니까?”
“별을 읽으면 미래를 볼 수 있다길래 한 번 보고 있었습니다.”
별의 악마 페스톨레스의 권능.
브란트도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지만, 미래가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악마의 힘을 깨운 상태로는 밤하늘을 바라본 적이 없어서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에드의 시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브란트를 향했다. 브란트도 시선을 내려 에드를 바라보았다.
“결정하신 겁니까?”
“예.”
에드가 다음 말을 기다리기에 브란트는 먼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마음을 못 잡고 있었습니다.”
에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브란트는 고개를 들어 에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각오가 선 브란트를 바라보던 에드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밀었다.
“눈빛이 좋아지셨네요.”
아칼란의 사냥개로 살아왔던 때와는 다르다.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뭔가 하고자 하는 눈빛이라 에드는 그를 일행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브란트가 잔을 받아서 단숨에 비우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예?”
당황하는 브란트에게 에드가 담담히 말했다.
“저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이는데 형이라고 불러야죠. 원하신다면 아저씨라고 불러드릴 수도 있는데.”
에드가 격의 없이 대하는 것을 보고 브란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돌격대에서 크게 다친 후로 이렇게 웃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형이라고 불러줘.”
에드는 브란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브란트가 그 손을 마주 잡자 에드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잘 부탁해요. 형.”
“나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