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배웅
천천히 눈을 뜬 디에고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돌아본 디에고는 침대 위라는 것과 자신의 손을 잡고 잠이 든 소피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제야 디에고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간밤에 어떤 여인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후안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항도 못 하고 잡혀갈 뻔했다.
하지만 그 저항은 무의미했다. 그 한 번에 사용한 마력이 너무 커서 머리가 핑핑 돌았으니까.
그래서 소피아가 여인의 손길 한 번에 나가떨어질 때는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었다. 혹시라도 소피아가 크게 다친 건 아닌가 하고 어찌나 걱정됐던지.
트롤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던 후안의 옛날이야기가 떠올라 끌려가는 중에 제리를 소환해서 무작정 저택으로 보냈다.
감각 공유를 통해서 에드를 만난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작정 자신을 향해 돌아오게 했다. 제리가 돌아오는 동안에도 디에고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여인은 높은 담벼락도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 데다가 눈길 한 번에 사람들이 눈이 돌아간 채로 달려가는 모습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트롤도 눈빛 한 번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인.
그런 여인에 대한 공포로 몸이 굳어졌을 때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푸른빛에 휘감긴 해머도.
그걸 보는 순간 안도했다.
튕겨 나가던 화살이 돌아와 여인의 팔에 꽂히고 자신이 떨어졌을 때 에드가 나타나 받아줬을 때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에드와 아린은 그 여인을 손쉽게 제압했다. 금방 끝낸다더니 정말로 금방 끝내버렸다.
그녀가 죽는 것까지 보고 나니 맥이 탁 풀려 혼절했다. 그리고 깨어나니 집이고, 어머니가 함께하고 있다.
걱정했는데 소피아의 모습을 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으음.”
그때 천천히 눈을 뜬 소피아는 디에고를 확인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디에고. 괜찮니?”
디에고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묻는 소피아에게 의젓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어제는 겁을 먹었지만, 소피아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소피아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디에고를 꼭 안아줬다. 디에고는 소피아의 품에 안겨서는 픽 웃음을 흘렸다.
“저 이제 다 컸어요. 안 이러셔도 돼요.”
소피아는 그런 디에고의 등을 쫙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야!”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 엄마가 널 모르니? 괜히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할 필요 없어. 겁날 때 힘들 때 기대라고 있는 게 엄마니까.”
디에고는 그 말에야 손을 들어 소피아를 마주 안았다. 엄마의 따뜻한 품.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긴 디에고는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나는 것을 느꼈다.
소피아는 그런 디에고의 등을 가만히 쓸어 내려주었다.
아침 날이 밝기 무섭게 찾아온 에드와 아린을 보고 베네딕토는 헛웃음을 흘렸다.
“날이 밝으면 오라고 했다지만, 그래도 해는 뜨고 와야 하지 않겠나?”
헤어진 지 고작 다섯 시간도 안 지났다. 그 짧은 시간 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리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아직 조식도 들기 전이다.
베네딕토의 말에 아린이 앞으로 나섰다.
“어제 펜드래건님의 대저택을 습격했던 저주술사 에스피안의 몸속에서 혈마석이 나왔습니다.”
베네딕토는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펜드래건의 대저택에 일어난 사건은 파악이 됐었다. 왕도 수호대가 펜드래건의 대저택을 습격한 것으로 알려졌으니까.
펜드래건의 저택으로 지원을 나갔던 사제들이 돌아오면서 말하기를 악마 종속자의 저주로 왕도 수호대원들이 공격해 왔다고 했다.
그 저주술사를 아린과 에드가 죽였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그 안에서 혈마석이 나온 줄은 몰랐다.
혈마석은 아스트론의 예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걸 추적할 수 있는 것이 아린 밖에 없기에 그녀는 신입 성기사이면서도 이번 예언에 따라 퇴마행에 나섰다.
혈마석에 대한 추적이 끊긴 것으로 알았는데 그녀 앞에 다시 혈마석이 나타난 것을 보면 역시 운명인가 싶었다.
베네딕토가 집무실의 벽으로 가서 줄을 잡아당기자 펼쳐진 것은 대륙 전도였다. 아린은 대륙 전도 앞에 서서 가만히 지도를 보며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에드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네프사엘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까?”
“네프사엘?”
“예. 지금 쫓고 있는 라그록스도 문제지만 밤마다 어떻게든 마수를 보내는 녀석이라서요.”
예언에서 쫓는 자가 라그록스라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모든 악마는 교단의 적이다. 그런 악마를 사냥하고 다니는 에드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악마 네프사엘을 상대하겠다고 하니 도움을 주고 싶었다.
“미안하네. 교단에서 열심히 찾고 있지만, 놈의 흔적은 찾지 못했네.”
하긴 네프사엘이 대륙에 이름을 떨친 지가 수백 년인데 아직도 못 잡았다. 그만큼 대악마는 본신의 힘도 강하지만 숨는 것도 잘한다.
에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탁했을 뿐이다. 테인이 찾고 있지만, 그래도 두 곳에서 찾으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을 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린이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이쯤인 것 같아요.”
아린이 짚은 곳은 왕도에서 동쪽으로 마차로 이동해도 보름은 걸릴 거리였다. 안델 시. 동쪽 쿠레나이 왕국과의 교역 도시로 규모가 상당한 도시였다.
아린이 베네딕토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리 조사 좀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하마. 가는 길에 들를 르센 시에서 정보를 받아볼 수 있을 거다.”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네딕토가 물었다.
“바로 갈 생각이냐?”
“예.”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금방 헤어지는구나.”
아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올게요.”
베네딕토는 아린의 말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예언에 따라 퇴마행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
언제 어디서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성기사의 운명인 것을 알기에 베네딕토는 입맛이 썼다.
자신이 데려와 손녀처럼 키웠던 아린이 성기사가 되어 목숨을 건 퇴마행을 하는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꼭 또 와야 한다.”
“예.”
베네딕토는 에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린을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베네딕토는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작은 물건을 하나 꺼내왔다. 그리고 에드에게 그걸 건네며 말했다.
“이게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에드는 건네준 것을 받아 들었다. 화살촉 형태의 물건. 그런데 이 안에는 신성력이 느껴졌다.
“이거 설마···?”
“자네는 숱하게 많은 악마를 죽일 텐데 제대로 된 성유물이 없더군. 아린이 가진 물건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니나 자네에게는 어울릴 것 같아서 어젯밤에 주문 제작했네.”
에드는 베네딕토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에 걸려있던 증표가 없어졌다.
“성유물을 녹이신 겁니까?”
“아스트론님도 용서해 주시겠지.”
고작 화살촉 하나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악마를 상대함에 있어 최고의 무기다. 아펠라의 이빨도 있지만, 대악마용 무기로는 이게 더 뛰어나다.
그리고 어차피 화살 두 발 정도는 활용해야 하니 좋은 무기를 얻은 셈이다.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고작 화살 한 대였지만, 아스트론의 신성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게다가 아린과 함께 하니 그녀의 축성이 더해지면 절로 기대가 될 지경이다.
베네딕토는 에드가 들고 있는 화살촉 위로 손을 얹고는 기도를 올렸다. 다시 한번 신성력이 주입되며 푸른빛이 화살촉에 맺혔다.
“아린을 잘 부탁하네.”
빈말로 부탁할 때와 이렇게 선물을 챙겨주면서 부탁할 때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당연히 대답에 담긴 에드의 진심도 무게감이 달라졌다.
“저보다 아린 양이 먼저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베네딕토는 그 말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린은 그런 둘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자신과 에드 둘 중 한 명이 먼저 죽는다면 그건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했다. 성기사가 자신보다 다른 이가 먼저 죽게 한다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을 테니까.
베네딕토는 아린에게는 작은 옥함을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즐기는 차다.”
“···고마워요.”
베네딕토가 즐긴다고 했지만, 아린도 즐기는 차였다. 베네딕토에게 배운 차. 아마 그를 생각하며 마시게 되리라.
“잘 마실게요.”
“그래. 멀리 안 나가마. 언제나 그대들의 앞에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역시 대주교급이 되니 축원 하나를 받아도 몸에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나 고양감이 차오르는 지금은 그저 축원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길.”
축성 마차의 위로 검은 휘장을 덮었다. 태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에 푸른 빛을 뿌리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휘장으로 모두 덮은 상태.
그런 마차 앞에서 소피아와 디에고는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베네딕토를 만나고 와서 바로 출발 준비를 마친 상황. 점심도 먹기 전이었지만,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끌게 되면 오늘 출발 못 할 수도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마중 나와 있었다.
펜드래건은 테인을 향해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영감. 어디서 나 몰래 죽지 말고, 혹시 죽거든 누구한테 죽었는지 꼭 전해. 내가 복수는 해줄 테니까.”
“죽으라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쯧.”
툴툴거리지만 둘 다 서로의 진심을 알기에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세실리아가 다가와 테인의 손을 꼭 쥐고는 말했다.
“감기 조심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럼세. 공주도 건강 관리 잘하고 또 보도록 하지.”
펜드래건은 에드와 아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둘을 돌아보다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건넸다.
“자네 둘을 보면 옛날 세실리아와 함께하던 시절이 생각나는군. 악마 사냥도 좋지만, 인생도 즐기라고.”
에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지만, 아린은 어쩐 일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지내는 동안 소란만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언제나 나쁜 놈이 나쁜 거야. 잊지 마.”
에드는 펜드래건의 위로에 역시 그답다고 생각했다. 펜드래건은 에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디에고에게 다가갔다.
소피아의 눈물 때문에 곤란해 하는 디에고는 갈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펠메스의 가호를 두른 디에고에게 다가온 펜드래건이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워낙 손이 큰 펜드래건이라 그 손바닥 안에 디에고의 머리가 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대범하고 똘똘하니 네 몫은 잘해낼 터. 어머니는 내가 지켜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너라.”
디에고는 펜드래건의 말에 선망의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펜드래건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디에고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억에 남았다.
“어머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또 보자.”
“예!”
소피아가 보인 눈물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디에고는 펜드래건의 말에 용기를 낸 건지 소피아를 돌아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잘 다녀올게. 엄마.”
소피아도 디에고가 씩씩하게 말하니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인사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렴.”
그렇게 모든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모는 것은 더그가 다시 맡았고, 덱스는 마부석에 편하게 앉았다.
백면의 띠 덕분에 얼굴을 변환하는 것이 가능해져서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덱스는 갑갑한 마차보다는 밖에 있겠다고 했다.
평생을 노예 검투사로 살아와서 그런지 그는 어디 갇혀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테인의 옆에 앉아서 그가 보여주는 악마 총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집중해서 어머니와 헤어졌음을 잊고자 하는 것 같았다.
아린은 조용히 앉아서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고, 에드는 이번에 새로이 얻은 화살촉을 화살대에 달았다. 그리고는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왕도에 와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빙결의 활 강화를 대성공했고, 신성 화살도 얻었다. 재생의 반지도 얻었고, 레벨도 올랐다.
얻은 것이 참 많은 왕도 행이었다.
마차의 창밖으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애도 기간에 왕도에서 누가 이렇게 급하게 말을 모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두 필의 기마가 그대로 마차를 지나가 마차의 앞을 막아 세웠다. 급하게 마차가 멈추기에 테인이 넘어지려는 것을 손으로 받아준 에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차를 세운 곳에는 검은 제복을 입고 망토를 두른 에밀리아와 그녀의 수호 기사 반이 서 있었다.
에밀리아는 어찌나 열심히 말을 몰아왔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에드를 보고 에밀리아도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에드의 앞까지 다가와서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숨 가쁘게 쫓아왔나 싶어 바라보자 그녀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떠나는 건가요?”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밀리아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도움으로 카르엔을 죽였고, 베네딕토 대주교라는 인맥을 만들었다.
공을 인정받아 왕위 계승 서열이 수직상승했고, 공주에 책봉되기로 했다.
그 모든 것을 해주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떠난다고?
이 남자. 역시 상식 밖의 인물이다.
그 모든 것이 별것 아니었다는 것처럼 훌훌 떠나버린다는 남자.
“다시 돌아올 건가요?”
“물론이죠.”
“그럼 됐어요.”
되긴 뭐가 됐다는 건가?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길.”
에밀리아는 그 말만 남긴 채 다시 말에 올라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반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바람과도 같아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멀어지는 에밀리아의 볼이 빨개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에드가 다시 마차에 오르는데 어째 아린의 주위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