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태자 클라크
메르헨은 헬레나의 편지를 확인하고는 먼저 떠나갔다.
가도 공은 별채에 두고 치료하기로 했다. 카일은 카르엔 대공과 엮인 일에 대해서는 일단 묻어두고 우선은 메르헨을 돕기로 했다.
카일과 리프가 포함된 그들의 팀이 먼저 펜드래건의 집을 떠날 때 펜드래건은 왕가의 증표를 내주었다. 언제고 이걸 가지고 기별한다면 자신이 달려가겠다는 말에 메르헨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아침을 먹은 후에 펜드래건이 입을 열었다.
“왕궁에 갈 생각인데 모두 다 가는 건 무리가 있고, 성기사랑 자네, 그리고 영감 정도가 같이 가면 되겠군.”
덱스는 백면의 띠를 받아서 얼굴을 변환했지만, 그래도 왕궁에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펜드래건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갈 곳은 왕궁 내에서도 내궁, 그중에서도 태자가 머무는 태양궁이라 무기 소지는 나와 세실리아만 가능하니 무기는 모두 놓고 가야 돼. 괜찮지?”
“예.”
어차피 에드도 아린도 사실 굳이 무기가 필요한 수준은 아니다. 그것 없어도 필요하다면 무기를 빼앗고 상대를 죽일 수 있으니까.
모든 장비를 벗고 더그가 모는 마차에 올랐다.
테인이 마차에 탄 채 에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몸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펜드래건이 자네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 인상적이었다고 했네.”
에드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덤볐음에도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패배.
하지만 자신은 아직 성장 중이다. 더 많은 악마를 사냥하고, 더 강해져서 언제고 펜드래건을 이겨야만 했다. 그래야 대악마를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그게 한계죠.”
테인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르군.”
펜드래건과 이미 대악마 사냥의 여정을 함께 했던 테인은 자신이 죽기 전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에 적당한 이를 만났음을 알았다.
“자네는 어떤가?”
아린은 목 뒤를 주무르며 답했다.
“괜찮아요. 사정을 봐줘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린은 어제 이후로 어딘가 시무룩해 보였다. 그동안 기도를 통해서 신성력을 갈무리한 덕에 신체 능력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펜드래건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뒤를 잡히고 단 일격에 혼절까지 했다.
3영웅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신성력이 마스터 팔라딘에 비견될 정도로 강해졌을 때 무서울 것이 없었다. 에드와 함께라면 악마들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런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했던 것인지 깨달은 날이었다.
몸의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펜드래건은 이 세계 최강자 중 한 명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성장할 겁니다. 펜드래건보다도 더.”
아린은 에드의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펜드래건에게 인상이라도 남긴 에드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눈빛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린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면서 에드 스스로 다짐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 말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알았다.
“다음에는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주도록 하죠.”
아린의 말에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지금은 그거면 된다.
앞으로 숱하게 많은 싸움을 겪을 테고, 그녀는 자연스레 강해질 테니까.
에드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란트와 함께 볼코프를 만나러 갈 때는 검문이 3번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내궁으로 들어가는 길인데도 검문 하나 없었다.
다만 밖에서의 소란이 느껴졌다.
하긴 결혼 후에 왕궁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는 펜드래건이 세실리아와 함께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창밖을 구경하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미니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기사단이 달려와 펜드래건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펜드래건은 자신의 앞을 막은 이들을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올리버.”
“부마와 공주님께서 어인 일로 왕궁에 드셨습니까?”
펜드래건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못 올 곳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올리버라고 불린 이는 긴장한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별도 없이 오셔서 왕궁에 비상이 걸린 상황입니다.”
“국왕 전하 뵈러 온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태양궁으로 가는 길이야. 그런데도 막을 건가?”
“태양궁으로 가시는 길이시라면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좌우로 늘어선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는 모습에 에드는 창문을 닫고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호위인지 감시인지 모르겠네요.”
“결혼하고 처음 오는 건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에드는 그 말에 트라비아 국왕이 어떤 인물인지 떠올렸다. 우유부단하고 겁많은 국왕. 겁이 많아서 왕궁의 친위대는 제법 쓸만하게 키웠던 것 같았지만, 펜드래건이 한번 왕궁을 뒤집어엎은 적이 있었다.
결혼 전이었다고 하나 그랬던 전적이 있으니 겁을 집어먹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게 일행은 태양궁까지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태양궁에 도착했을 때는 태자 클라크가 수호 기사 둘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매제. 이게 얼마 만이오.”
펜드래건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클라크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바짝 앞까지 다가가니 뒤에 선 수호 기사들이 검을 쥐었으나 감히 뽑지 못했다.
펜드래건은 클라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고는 말했다.
“처남한테 밥 한 끼 얻어먹으러 왔소. 들어갑시다.”
펜드래건이 앞장서다가 멈춰 서서는 클라크를 돌아보았다.
“내 일행들인데 함께 들어가도 되겠소?”
클라크는 마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확인하다가 에드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점심은 아직 때가 이르니 간단히 다과를 준비하라 하지. 태양궁의 자랑인 해바라기 정원으로 갑시다.”
클라크가 태연을 가장한 채 앞장섰고, 친위대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을 돌려 물러났다. 태양궁의 정문까지 물러나는 것을 보니 아마 태양궁을 나갈 때는 또 저들의 호위를 받을 건가 보다.
그렇게 일행 모두가 태양궁 뒤편의 해바라기 정원에 도착했다.
왕궁은 역시 왕궁이다. 정원 하나만 해도 카르엔의 대저택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드넓은 정원에 해바라기만 가득 심어 놓은 곳.
태양궁에 걸맞은 정원이었다.
정원 안쪽에는 돌로 된 테이블과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정자가 있었다. 그 위로 넝쿨까지 드리워져 있어서 상당히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집사가 하녀들을 부려서 벌써 다과를 준비해 놓았다. 이런 걸 보면 오히려 저들이 무슨 초능력자가 아닌가 싶었다. 펜드래건의 빠른 걸음이 도달하기 전에 저런 준비를 다 마친 것을 보면.
클라크가 자리를 권하기에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녀들이 잔에 차를 따라주고 클라크 뒤로 물러나자 펜드래건이 입을 열었다.
“집사랑 하녀들은 물립시다.”
어차피 저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클라크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소리없이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는 동안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을 마시던 클라크는 가만히 일행을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결혼 후에는 한 번도 오지 않던 왕궁까지 온 거요?”
펜드래건은 클라크의 맞은편에 앉아있다가 씨익 웃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처남에게도 알려주려고.”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기에 날 찾아왔는지 들어봅시다.”
펜드래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서 걸었다. 클라크에게로 걸어가는 모습에 수호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지만, 클라크가 손을 들어서 말렸다.
펜드래건이 작정하면 수호 기사들 정도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한 행동이었다.
펜드래건은 그렇게 걸어가 클라크의 앞에서 테이블에 기대섰다. 그리고는 클라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펜드래건을 올려다보는 클라크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펜드래건은 가만히 클라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수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예전에도 태자의 수호 기사였었지?”
“그렇습니다.”
펜드래건은 씨익 웃더니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수호 기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부마인 펜드래건 앞에서 그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검을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수호 기사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펜드래건은 수호 기사들의 눈을 보면서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무슨 말입니까?”
펜드래건은 수호 기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씨익 웃었다.
“왜 그런 힘에 손을 대고 그러나?”
펜드래건의 속삭임에 수호 기사가 번개처럼 검을 뽑으려 했지만, 펜드래건의 손이 빨랐다. 검이 뽑히기도 전에 그 목을 비틀어 버렸다.
수호 기사 하나가 쓰러지는 사이에 반대편의 수호 기사가 검을 뽑고 달려들었지만, 펜드래건은 그런 그를 향해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
퍼억!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 나가 바닥에 길게 피를 뿌렸다. 펜드래건이 갑자기 손을 쓸 줄은 몰랐던 클라크의 몸이 움찔 굳었다.
클라크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 수호 기사 둘이 죽어버렸다. 클라크는 펜드래건이 왜 그러는지 파악하고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펜드래건은 손에 묻은 피를 클라크의 어깨에 슥슥 닦으며 말했다.
“내가 왕도에 있는데 어떻게 그 힘에 손을 댈 생각을 했지?”
클라크가 고개를 들어 펜드래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붉게 빛내며 악에 받친 듯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불로장생의 비결을 손에 얻었는데 그걸 왜 쓰지 않는단 말인가?”
펜드래건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자 오히려 기세가 오른 클라크가 빠르게 소리쳤다.
“이 힘! 이 힘만 있다면···.”
쫘악!
펜드래건의 따귀 한 번에 클라크는 이가 다섯 개나 빠지며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다.
“개소리를 조리 있게 하는 건 여전하네.”
펜드래건은 그 모습을 보고 테인을 돌아보았다.
“영감. 알아보겠어?”
“이거 전에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네.”
“진짜?”
“자네는 이게 뭔지 아나?”
펜드래건은 기절한 클라크의 눈꺼풀을 들어보고는 말했다.
“그동안 악마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됐나 봐. 이건 악마의 힘을 인간이 받아들일 때 생기는 변화거든.”
“하긴 저번에 만난 자도 악마의 힘을 썼지.”
“악마의 힘을 쓰는 자를 만났다고?”
테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아칼란에서 보낸 자였지.”
펜드래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칼란이 악마를 연구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펜드래건의 시선이 세실리아를 향했다.
“당신 아무래도 여왕 해야겠는데?”
“미쳤어요?”
“왕국이 썩어들어 가고 있잖아. 진짜 안 할 거야?”
세실리아가 그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썩은 환부만 도려내죠. 그래도 왕위 계승은 안 해요.”
펜드래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혹시 악마의 힘을 뽑아낼 수 있나?”
아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한 번 해보겠나?”
아린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클라크에게 다가갔다. 펜드래건이 클라크의 머리에 찻주전자를 들어서 부었다.
그거 아직 뜨거울 텐데?
에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클라크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클라크는 퉁퉁 부은 얼굴을 부여잡고 어버버거렸다. 그런 클라크의 귓가에 대고 펜드래건이 속삭였다.
“조용히 해. 뒈지기 싫으면.”
클라크가 비명을 멈추고 입을 다무는 모습을 보고 에드는 솔직히 감탄했다. 자신이야 이곳에 연고도 없으니 악마를 상대하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지만, 펜드래건은 처남을 상대하면서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지금도 아린에게 기회를 줄 뿐이지, 저게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목을 꺾을 생각으로 보였다.
저 정도 하니까 대악마도 잡아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린이 클라크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신성력으로 악마의 힘을 태워버리려는 것 같았는데 화상을 입었던 머리 피부가 다시 회복되어 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었다. 어떤 고문을 해도 듣기 힘든 비명에 태양궁에서 병사들이 달려왔다.
펜드래건이 그걸 보고는 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계속해.”
만인지적. 혼자서 만 명의 병사도 막을 수 있는 기세가 펜드래건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다시 클라크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콰 코와 입, 귀에서까지 피를 줄줄 흘리는 것을 보니 저러다 죽겠다 싶었다.
아린도 그걸 느꼈는지 더는 기도를 하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저쪽에서는 달려오던 병사들이 펜드래건 앞에 멈춰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다가와 넋이 나간 것으로 보이는 클라크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붉은 빛이 남아 있는 눈을 보고 세실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높은 곳에 오른 자일수록 악마를 경계해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가볍게 혀를 찬 세실리아가 클라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누구인지 말해. 오빠한테 악마의 힘을 쓰라고 설득한 인간이 누군지. 그걸 말하면 이 고통을 끝내줄게.”
클라크는 그 말에 홀린 듯 대답했다.
“다비드.”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떨어져 있던 수호 기사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휘두르려고 할 때 그 손목을 에드가 잡았다.
세실리아가 돌아보자 에드가 말없이 검을 빼앗아 그대로 클라크의 목을 베어버렸다.
“왜지?”
“오빠잖아요.”
세실리아는 그 말에 말없이 에드의 어깨를 짚어주었다.
“고맙다.”
세실리아가 헬버드를 집어 들고 펜드래건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펜드래건도 고개를 돌려 에드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감사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덕분에 점수 좀 땄다. 경험치는 덤으로 얻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