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체포
아무리 펜드래건이라고 해도, 아무리 세실리아라고 해도.
태자를 죽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했다. 에드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들은 태자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왕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왕궁 친위대가 좌우에 붙었지만, 감히 그들을 건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태양궁에 들어와 태자의 목을 잘라도 건드리지 못하는 수준.
에드가 바라는 경지다. 잘못한 놈 죽여야 하는데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으니까.
이번 일도 암살을 생각했었다. 펜드래건 덕분에 쉽게 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처음으로 트라비아 왕궁에 들어갔다. 악마의 시대 1에서야 왔었지만 실제로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에드의 명성은 국왕을 만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왕궁에 가는 동안 뒤쪽으로 병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게 뭘 뜻하는지 느낀 에드는 테인을 돌아보았다.
“겁도 안 나십니까?”
“겁?”
“지금 왕궁 내의 모든 병사가 겹겹이 포위하는 것 같은데요?”
테인이 외눈 안경을 빛내면서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겁나나?”
“아뇨.”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함께하는데 겁을 왜 낸단 말인가? 저들이라면 저렇게 방비가 된 성에서도 왕의 목을 취할 수 있는 자들이다.
테인은 그런 에드의 속도 모르고 웃었다.
“자네도 어지간한 강심장이군.”
아린은 말없이 에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 한 자루 쥐지 않고 어쩜 이리 겁도 없는지. 게다가 세실리아 대신 태자의 목을 벨 때는 소름이 돋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그들의 마차는 하늘 궁에 도착했다.
국왕이 기거하는 하늘 궁.
하늘 궁을 지키는 근위병들이 도열한 곳을 지나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말이 멈추고 마차에서 내릴 때 마차 뒤에 싣고 왔던 태자의 시체를 근위병 넷이 다가와 유리관에 옮겼다.
태자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유리관을 준비한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저들이 성인이 될 때 관을 미리 준비하는 걸까?
유리관에 태자를 옮기고 근위병들이 어깨에 짊어지자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앞장서 왕궁의 대전으로 걸어갔다.
대전의 좌우로 석궁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석궁을 내리고 있지만, 허튼수작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겁이 많은 국왕다웠다.
대전의 중앙 왕좌에 앉아있는 육십 대의 노인. 눈가에 진 주름을 보면 국왕은 그래도 불로장생에 현혹되지는 않았나 보다. 왕관을 쓰고 있는 국왕 레이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좌에서 대전의 중앙까지는 계단이 열 개 정도 있었고, 그 계단에는 수호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레이든은 태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설명을 들을 수 있겠나?”
펜드래건은 가만히 레이든 국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레이든이 시선을 들자 펜드래건이 근위병들이 내려놓은 유리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클라크는 힘에 취해 있었습니다.”
“단지 그 힘을 썼을 뿐이 아닌가?”
펜드래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가 없는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악마의 힘을 취하면 그자는 조금씩 악마가 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죽였다는 건가?”
“예.”
펜드래건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답했다. 그런 펜드래건을 바라보던 레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대악마를 사냥했고, 왕국 내에서 내 목을 노리지 않는 이상 모든 죄에 대한 면책권을 내렸네. 왕궁내 무기 소지도 허락했고.”
“알고 있습니다. 저를 신뢰하신 거죠.”
“그건 우리 기억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세실리아 때문에 왕궁에 쳐들어와서 내 목에 검을 겨눴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한데.”
레이든은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자 수호 기사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젊은 수호 기사 하나가 왕의 앞을 막았다.
그 모습에 펜드래건이 씨익 웃었다.
“그래도 쓸만한 친구가 하나는 있군요.”
이곳에 있는 이들은 펜드래건의 실력을 직접 보았던 이들이다. 그러니 국왕의 앞을 막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젊은 수호 기사는 왕을 지키기 위해 그 앞을 막았다.
레이든도 픽 웃고는 수호 기사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왔다. 젊은 수호 기사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펜드래건이 물었다.
“이름이 뭔가?”
“로건이요.”
“그 이름 기억하지.”
레이든은 펜드래건의 옆에 놓인 유리관 앞에 섰다. 그리고는 유리관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나?”
“뭘 말입니까?”
“카르엔 대신을 필두로 태자파의 귀족들이 규합해서 왕위를 이양하라고 압박을 넣고 있었다는 걸?”
펜드래건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쳤군.”
레이든은 유리관을 쓰다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물려줄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 압박을 받으니 왕관을 내려놓기 싫어지더군. 그래서 차일피일 미뤄왔네.”
“말하지 그러셨습니까?”
“세실리아가 왕위에 관심이 없는데 자네에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가뜩이나 자네를 경계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릴 기회만 보고 있는 이들에게 빌미를 줄 수는 없었지.”
레이든은 계속 유리관을 쓰다듬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기라도 하는 듯이.
펜드래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다비드라고 아십니까?”
레이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칼란이 두 개의 파로 나누어졌지. 태자의 편에 선 자로 알고 있네.”
펜드래건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지만, 아들이 죽었다. 그것도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아들이.
레이든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도 당연한 것이리라.
펜드래건이 돌아서며 말했다.
“아칼란은 하나만 남을 겁니다.”
펜드래건이 돌아서자 레이든이 유리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세실리아를 불렀다.
“세실리아. 이제 네가 제 1 왕위 계승권자다.”
“전 왕위를 계승하지 않을 거예요.”
“그 고집은 여전하구나.”
레이든은 펜드래건의 등을 보고 물었다.
“비록 그 힘에 취했다고 하나 태자의 죽음이네. 국장을 치러도 되겠나?”
“그렇게 하세요. 죽은 이에게는 관심 없으니.”
레이든은 펜드래건이 그나마 배려해준 것임을 알았다. 악마의 힘에 취해 버린 아들에 대해서 소문내지 않고 저렇게 떠나주는 것만으로 왕가의 명예를 지켜준 셈이다.
태자가 악마의 힘을 부렸다?
아스트론 교단에서 난리가 날 것은 물론이고, 주변국들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특히나 지금은 달리아 왕국을 병합한 지 일 년이 갓 넘었다.
가뜩이나 2왕자 클리프의 죽음으로 달리아 왕국의 민심이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태자파는 귀족들의 병력을 모아 달리아 왕국을 되찾고자 했다.
달리아 왕국의 왕도에 남아 있는 말롯만 죽인다면 달리아 왕국을 병합한 공을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었을 테니까.
악마의 힘에 취한 그는 트라비아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고 싶어 했다. 아마 이번에 멈추지 못했다면 더 큰 일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사방에 적을 만들어서는 아무리 강대국인 트라비아 왕국이라도 무너지고야 만다.
비록 태자의 죽음은 슬펐지만, 왕국을 위해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김에 왕국 내의 귀족을 하나로 모을 때다.
“네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
레이든은 유리관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태자의 국장을 준비하라. 사인은 심장 마비다.”
많은 눈이 있었지만, 클라크가 죽은 이상 왕궁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되리라.
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왕도에 전해진 여파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소문을 뒤엎었다.
태자의 죽음이 국장으로 치르는 만큼 왕도 내의 모든 이들이 검은 옷을 입어야 했고, 모든 가게의 문 앞에는 검은 깃발이 걸렸다.
사흘간 엄숙함을 유지해야 하는 왕도의 분위기에 모두가 숨을 죽일 때 카르엔은 이를 뿌득 갈았다.
“이, 이 무도한 자가!”
왕실에 눈과 귀가 있는 카르엔이었다. 태자가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했지만, 분명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태양궁에 들어가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전후 관계를 파악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까지 얌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펜드래건이 왜 움직이기 시작했냐는 거다.
그를 정치적으로 견제했지만, 그가 무력을 쓰지 못하도록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그의 무력을 놀릴 수 없다는 핑계로 마수가 나타나면 그를 파견 보냈었다.
마수의 위험성을 알고 있어서인지 펜드래건은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제야 마수 사냥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반데스. 태자파의 귀족들을 단속해야겠다. 내 편지를 써줄 테니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라.”
“그리 하겠습니다.”
카르엔은 책상에 앉아 빠르게 편지들을 쓰면서 이를 뿌득 갈았다. 자신의 꿈이 한 발짝 앞에서 무너졌다. 태자와 2왕자가 죽은 이상 세실리아가 제 1 왕위 계승권자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왕위에 관심이 없다고 지금까지 공공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왔다.
그걸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을 터. 그렇다면 다른 왕위 계승권자에게 붙어야 했다.
몇몇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세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름이 떠올랐다.
“에밀리아.”
“조사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녀.”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밀리고 아무런 세력도 없지만, 그렇기에 매력적인 인물이다. 태자파의 귀족들이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녀는 단숨에 왕위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세력이 없는 만큼 태자파 귀족들의 입지도 크게 오를 수 있다.
또한 조사관으로 임명된 만큼 국왕의 입김이 닿는 여인이다. 어쩌면 국왕도 그녀를 총애할지도 모를 일.
“편지를 보내고 에밀리아에 대해 모든 걸 조사해 와.”
위기는 기회다.
식당에 모인 이들은 술잔을 비우는 중이었다. 애도의 술잔이라는 명목하에 모인 자리에서 펜드래건이 입을 열었다.
“왕국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일에 세실리아와 함께하기로 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칼란의 다비드라는 자가 어디까지 손을 뻗쳤는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악마의 힘을 통해 불로장생을 이뤘다는 유혹을 견딜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을 테니까.”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아칼란을 모조리 쓸어버릴 겁니까?”
“아니. 국왕파의 아칼란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의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으니. 그들과 공조해서 다비드를 잡을 생각이다.”
에드는 문득 브란트가 떠올랐다. 악마의 힘을 다루는 그는 생각하기에 악마의 시대 2의 주인공 중 하나가 분명할 터. 그가 다비드와 함께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는 펜드래건의 손에 죽는다.
자신이 태자를 만나 그가 악마의 힘에 취해 있음을 밝힌 것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무시무시한 태풍이 되어 불어닥치고 있었다.
펜드래건은 에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아칼란 때문에 겪었을 고초에 대해서는 미리 사과하지.”
에드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노린 이들이 국왕파일지 태자파일지 정확하지 않았다. 악마의 힘을 다비드가 태자에게 제공했다고 하지만 아칼란 전체가 그 실험을 용인했을 수도 있는 일이니.
하지만 모든 것을 펜드래건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의 일을 하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해나가면 된다.
“괜찮습니다. 고난이 저희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까요.”
에드의 대답에 펜드래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간단히 술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비우며 에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번에 본 것 같다고.
에드가 함께 술잔을 비우는 중에 집사가 문밖에서 소리쳤다.
“에밀리아 조사관께서 오셨습니다.”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아?”
문이 열리고 남색 단발머리에 검은 망토를 두른 여인이 들어왔다. 세실리아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는 물었다.
“에밀리아.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언니. 저 공무 집행 때문에 온 거예요.”
“공무 집행?”
에밀리아는 세실리아를 지나쳐 에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던 에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에드. 당신을 카르엔 대신 습격 사건 및 노예 상인 발터의 살인 용의자로 체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