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전력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 펜드래건에게 집중되었고, 그의 시선은 에드에게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에드는 그 시선을 똑똑히 받아들이며 답했다.
“그건 이미 알고 계셔야 할 부분 아닙니까?”
에드의 되물음에 펜드래건의 표정이 없어졌다. 단순히 웃던 얼굴이 무표정이 되었을 뿐인데 북풍한설 앞에 선 것처럼 기온이 뚝 떨어진 느낌이다.
하긴 상급 악마를 만나고 아직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는데 대악마를 잡은 인간 앞에 서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아무리 파티를 이뤘다고 하나 혼자서도 상급 악마 하나는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될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에드는 할 말은 할 생각이었다. 왕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부마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펜드래건은 잠시 그렇게 에드를 바라보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듣고 보니 결혼 후에 처가 사람들을 본 적이 없군. 다들 날 피하느라 바빠서 말이야.”
펜드래건이 웃으며 하는 대답에 에드는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펜드래건은 가까이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다.
왕국의 백성들에게는 영웅이고, 귀족들조차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세실리아 공주의 왕위 계승권은 3위. 펜드래건을 등에 업으면 얼마든지 왕위 쟁탈전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펜드래건도 세실리아도 그런 귀찮은 일을 반기는 이들이 아니다. 당연히 왕궁을 멀리했다.
왕권에 관심이 없음을 백성들에게도 알리고, 귀족들에게도 알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펜드래건이 에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하군.”
펜드래건이 에드와 눈을 마주친 채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세실리아. 처남 보러 왕궁에 한 번 가야겠는데?”
“둘째 오빠도 죽었는데 큰 오빠도 죽일 생각이에요?”
펜드래건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죽여야 하면 죽여야지.”
세실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빠 죽으면 나 여왕 되어야 하는 거 알고 하는 말이죠?”
“어?”
펜드래건이 그 말에는 놀라서 돌아보았다. 세실리아가 불퉁한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에 펜드래건은 잠시 턱수염을 긁적이다가 답했다.
“일단 만나보자고. 손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펜드래건의 에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미 늦었으면 죽여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황을 보자고. 괜찮지?”
사자는 늙어도 사자라고 했다. 만약 펜드래건이 알면서 모른 척했다면 그와도 싸울지 모른다고 여겼는데 그는 아직도 사자다. 태자가 이미 늦었다면 그 목을 자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저 막무가내는 여전히 그대로다.
펜드래건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말을 이었다.
“태자 만나러 갈 때 같이 가도록 하지. 내일 시간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잘 됐군. 왕궁 구경 한 번 가지. 쪽팔리게 왕궁에서 이게 뭔 일이야.”
펜드래건은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 앉아서 손짓하자 집사가 다가와 술잔을 놓고 술을 채워줬다. 펜드래건은 그런 술잔을 들며 말했다.
“일단 다 같이 들자고. 불철주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대들을 위해서.”
기분 좋게 술을 비우고 펜드래건과 세실리아는 한명 한명과 대화를 나눴다. 디에고는 펜드래건의 사인까지 받으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덱스가 에드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물었다.
“뭔 소리야? 지금 태자를 죽인다고 한 거야?”
“응.”
“왜?”
“악마에 홀린 것 같아. 어떤 식으로든 악마랑 연관이 있어서.”
덱스는 그제야 에드를 다시 바라보았다. 단순히 악마가 강하다고만 생각하고 싸울 수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미친 인간들은 악마에 홀리면 태자라고 해도 죽이겠다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태연히 지껄이고 있었다. 태자 정도 되면 죽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태자를 죽인다는 건 왕국과 정면으로 싸울 수도 있다는 뜻.
그런데 주저함이 없다.
이 인간들과 함께 가면 오래 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에드는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으며 물었다.
“말해주면 도망갈까 봐 말 안 했는데. 섭섭하냐?”
“조금. 다음에는 숨기지 마.”
“그래.”
덱스는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서 입에 쏙 넣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헤벌쭉 웃는 얼굴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처음으로 만난 이 팀. 정말 미치도록 좋았다. 아직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아린도 그렇지만, 후원자도 빵빵해서 유물급 장비를 팍팍 내주지를 않나.
단순히 악마만 잡는 게 아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악마를 죽이니 그 뒤로도 정말 쉬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는 환경이다.
정말 불꽃처럼 살다 갈 수 있는 팀.
평생 바라던 삶이다.
“크크큭.”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하하하하.”
식탁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펜드래건이 물었다.
“우리 챔피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건가?”
“원 없이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펜드래건도 그 말에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자네 검투 스타일도 그렇더니 역시 마음이 드는 친구야.”
펜드래건은 덱스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자네 얼굴 드러내고 다니지는 못하겠군.”
“그렇기는 하죠.”
펜드래건의 시선이 세실리아를 향했다.
“당신 전에 쓰던 백면의 띠. 아직 있지 않나?”
“그거는 왜요?”
“이 친구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세실리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거면 얼굴 팔릴 걱정은 없겠네요. 찾아볼게요.”
에드는 그 말에 속으로 환호성을 터트렸다.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말한 백면의 띠는 머리에 두르는 띠인데 그 자체도 머리 보호구가 되는데 그걸 쓰고 있는 이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인다.
세실리아가 공주다 보니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 쓰고 다니던 유물급 장비였는데 그걸 내주다니 걱정을 덜었다.
펜드래건의 시선이 구석에 앉아있던 그란트를 향했다.
“그란트 상단주였던가? 자네가 물심양면 이들을 후원해 준다고 들었네.”
“그저 노력하는 중입니다.”
“좋은 일에 돈 쓰는 데 도움이 조금 되었으면 좋겠군. 돌아가기 전에 집사장과 얘기를 나눠보게. 상단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왕권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펜드래건의 인맥은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그의 위치가 부마다. 왕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일 수 있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다.
아낌없이 후원하느라 등골이 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펜드래건의 한 마디에 걱정을 덜었다.
펜드래건은 아린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틴이 편지에 종종 자네 이름을 적은 적이 있네.”
악마의 시대 1에서 펜드래건과 함께 했던 이가 마틴이었다. 지금은 대주교에 오른 인물.
그가 아린의 이름을 이미 거론했던 건가? 하긴 에드가 만나기 전에도 그녀는 이미 예언의 퇴마행 핵심 인물이었다. 혈마석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였으니까.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다. 마스터 팔라딘에 견줄 만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스터 팔라딘께 종종 이야기 들었습니다.”
펜드래건이 그 이름에 진저리쳤다.
“아, 그 꼰대가 아직도 마스터 팔라딘이지? 요즘도 내 욕하고 사나?”
아린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 팔라딘을 이렇게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건 펜드래건과 마스터 팔라딘이 함께 싸운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마스터 팔라딘도 펜드래건을 말할 때는 그 한량 같은 놈이라고 욕하니까.
펜드래건은 메르헨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헬레나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다. 별의 악마 페스톨레스가 부활할 것 같다고 그 흔적을 쫓는다는 편지였지.”
“정말이요?”
메르헨은 지금까지 헬레나의 행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뒤를 쫓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서가 나왔다. 펜드래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악마의 부활에 대한 단서를 쫓는 일이니 급하다고 할 만한 일이나 딸인 너에게까지 말을 안 하고 사라지지는 않았을 터. 뭔가 일이 생긴 건 틀림없는 것 같다.”
메르헨의 얼굴에 불안이 서리자 펜드래건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우선은 편지를 줄 테니 찾아보도록 하고 그녀를 찾는 중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기별해라. 다른 이도 아니고 그녀를 구하는 일이라면 나와 세실리아가 어디든 달려갈 테니.”
“감사합니다.”
메르헨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펜드래건은 삼촌의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가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미소. 그답지 않은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펜드래건은 결혼한 지가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이가 없다.
헬레나의 딸이라면 그에게도 조카와 같은 존재.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펜드래건은 식사를 마치고 에드 일행을 따로 불렀다.
아린, 덱스까지 함께 한 자리에서 펜드래건이 나무로 된 바스타드 소드를 바닥에 짚고 서서 말했다.
“후배들 실력 좀 볼까?”
세실리아는 저 멀리 헬버드를 어깨에 걸친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펜드래건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뜻.
연무장 구석의 방패와 검을 집어 드는 아린에게 펜드래건이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실력을 보고 싶은 거니 평소 쓰던 장비들 가지고 오게.”
펜드래건은 목검 하나 달랑 들고 저리 말하니 모두 어이없어했지만, 에드는 달랐다. 이번에 강화한 빙결의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며 말했다.
“상대는 3영웅의 한 명입니다.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해보죠.”
디에고는 아직 전력으로 쓰기에는 한참 부족해 빼고 세 명이 처음으로 합을 맞춰보는 순간이었다. 사실 에드도 기대가 됐다.
펜드래건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대악마와 싸우려면 그에 근접하기는 해야 하니 이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에드가 활을 들고 긴장한 채 바라보는 사이에 아린도 방패와 해머를 준비했고, 덱스도 신속의 검과 출혈의 검을 뽑아 든 채 키득거렸다.
펜드래건은 여전히 느긋한 자세로 말했다.
“시작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덱스가 튀어 나갔다. 아린은 펜드래건의 빈틈을 찾아보던 중이었는지 덱스가 튀어 나가는 것에 반응하지 못했다.
신속의 검을 들어서 민첩함이 에드에 버금가는 덱스였기에 아차 하는 순간 펜드래건의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에드도 더 늦기 전에 시위를 놓았다.
상대를 죽인다는 각오로 싸우지 않는다면 이 대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에드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연달아 일곱 발의 화살을 날리는데 이번 강화가 얼마나 잘 된 것인지 마력의 소모가 아주 작았는데도 냉기를 머금고 화살들이 날았다.
일곱 발의 화살은 덱스를 보조하기 위해 날린 것. 이것이 통하기를 바랐다.
그때 펜드래건의 검이 움직였다.
뻑!
신속의 검으로 속도를 높이고 달려들던 덱스의 몸이 반으로 접혀 날아갔고, 펜드래건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화살이 모두 그를 지나쳐갔다.
잔상?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에드는 화살 두 발을 대각선 위로 쏴 날렸다.
간격을 읽지 못했다면 펜드래건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터였다. 저만한 덩치에 기척도 남기지 않는다니.
두 발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펜드래건의 눈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가볍게 화살을 쳐내고 떨어져 내리는 펜드래건의 일격에 에드가 백 스텝을 밟으며 물러났다.
그리고 쏘아내는 한 발의 화살.
쳐내도 냉기에 얼어붙을 화살이다. 그리고 몸이 굳는 순간 튕겨냈던 화살이 돌아와 그를 꿰뚫으리라.
펜드래건의 바스타드 소드가 화살을 쳐내는 것을 보고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다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날아들던 화살이 검기에 반으로 잘렸고, 에드가 서 있던 곳도 바닥에 긴 고랑이 파이며 잘려나갔다. 저것이 진정한 검기.
에트리안의 검처럼 검에 내재 된 스킬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검기다. 되돌아오던 화살도 펜드래건의 검기에 맥없이 잘려나갔다.
펜드래건이 떨어져 내리고 나서야 그의 위치를 파악했던 아린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돌진해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구른 상태에서도 에드는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해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펜드래건은 돌진해 오는 아린을 마주쳐 가다가 회전하며 그녀의 좌측으로 흐르듯 지나갔다. 그녀의 뒷목에 꽂히는 수도.
아린이 기절하는 사이에 펜드래건이 에드를 향해 돌진해 왔다.
일곱 발의 화살을 한 호흡에 날렸지만, 펜드래건의 검은 그걸 모조리 튕겨냈다. 그리고 다가와 날리는 찌르기에 에드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오히려 찌르기를 향해 나아가며 고개를 틀었다. 찌르기를 피하며 뽑아 든 샐러맨더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채 완성되기도 전에 펜드래건의 손에 잡혔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쿵!
낙법을 펼칠 겨를도 없었다. 그 거구의 덩치로 메치면서 팔꿈치로 명치까지 찍어누르니 높은 체력 수치도 의미가 없었다.
“컥!”
의식이 날아가는 와중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전직 주인공이지.
에드가 웃으며 기절한 모습을 보고 펜드래건이 세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이 친구 물건인걸?”
“그러게요. 생각 이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