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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악마 사냥꾼이 되었다-55화 (55/202)

#55

펜드래건

부상자들의 증언을 받아적던 에밀리아가 수첩을 탁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마디로 그대들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는 말이군.”

“예. 그 실력으로 보건대 그가 죽이고자 했다면 아무도 살아남은 이가 없을 겁니다.”

“밑에는 덱스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도 막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하죠.”

에밀리아도 덱스의 실력은 봐서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상대는 굳이 덱스와 같은 실력일 필요가 없다.

좋은 장비를 가지면 덱스보다 실력이 부족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검투사들을 제압할 때 보여준 모습을 보면 유물급 장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불길을 일으키는 유물급 장비 하나 있다고 상대하기에는 덱스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

“검투사들은 몸이 재산이라고 들었다. 몸조리 잘하도록.”

검투사들의 병실을 나선 에밀리아는 뒤를 따라오는 수호기사 반을 돌아보았다.

“반. 너랑 덱스랑 비교하면 어때?”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신이 없습니다.”

에밀리아는 반의 솔직한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솔직해. 왕궁의 수호 기사단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너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덱스가 패했다? 어떻게 생각해?”

“설마 덱스가 이번 일에 동조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덱스가 제압당해서 납치당했다는 것보다는 설득력이 있지 않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에밀리아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할 때 안쪽에서 어깨를 다친 검투사가 밖으로 나왔다.

“조사관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에밀리아는 잠시 검투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안에서 얘기 안 하고?”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미리 말해두지만,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이 일에 대해서 조사만 할 뿐이니까.”

검투사 알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쉽군요. 그래도 굳이 다른 이들 앞에서 말해서 찍히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에밀리아는 그 말에 고개를 까딱여 병실에서 멀어졌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복도에서 에밀리아가 수첩을 꺼내며 물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비밀로 한 게 뭔지 말해 봐.”

“그 날 발트 님과 감독관이 함께 나갔다가 돌아올 때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에밀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뭔가가 더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람? 누구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 난쟁이 여자로 보였습니다.”

“난쟁이 여자?”

“예. 미모만 괜찮다면 난쟁이 여자는 수요가 있으니까요. 감독관의 실력으로 보건대 그리 목이 잘릴 인물이 아닙니다. 아마 길들이기 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습니다.”

에밀리아는 수첩을 펜으로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난쟁이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왔다?”

“예.”

지금까지 막혔던 것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에밀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오후에 들어올 때 데리고 왔다는 거지?”

“예. 화장실에 가는 길이라서 볼 수 있었습니다.”

에밀리아는 수첩을 덮고는 품에서 1골드 하나를 꺼내서 던져줬다. 알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은 정보였어. 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연락해.”

“그리하겠습니다.”

에밀리아가 복도를 벗어나자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발트의 아들들인 노만과 길리엄 형제였다.

“조사관님. 진전이 있으셨습니까?”

“조금은요. 아직 승계는 이뤄지지 않은 거죠?”

“꼭 좀 찾아주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챔피언은 꼭 찾아야 합니다.”

왕도의 챔피언 덕분에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나다. 다른 검투사들 모두를 더해도 챔피언이 벌어들이는 돈의 절반도 안 될 테니 가장 큰 유산을 도둑맞은 셈이다.

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찾으려고 하는 이유다. 챔피언이 멀쩡했다면 아버지의 죽음에 쌍수를 들고 기뻐했을 이들이니까.

“찾아만 주시면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습니다.”

에밀리아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들을 지나쳤다. 말에 오른 에밀리아가 콜로세움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주인이 죽었고, 챔피언이 사라졌다.

왕도의 챔피언이 군림하던 시대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에밀리아는 왕궁으로 말을 몰았다. 난쟁이 여자. 정보를 찾으려면 왕의 도움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왕이 부리는 이들이.

멀리 세워 놓은 과녁을 향해 차크람이 날아갔다.

쉬리링.

베기 전용의 투척 무기인 데다가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날아가다 보니 투척술에 보정을 받는 에드도 애를 먹었다. 그래도 하루 연습으로 과녁에 맞출 수 있지만, 아직 궤도를 원하는 방향으로 날릴 수는 없었다.

옆에서 과녁에 비도를 던지던 덱스가 관심을 보였다.

“나도 그거 가르쳐줘.”

“비도술 다 배우거든.”

비도는 직선으로 던지지만 차크람은 곡선으로 날리니 방식이 달랐다. 덱스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비도를 던지는데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닌지 벌써 과녁의 중앙으로 비도가 모이고 있었다.

아린은 카일, 리프와 2대 1대련을 하고 있었다. 디에고는 오늘까지 소피아와 시간을 보내라고 했는데도 어제 후안을 만나고 나서 뭔가 결심이 선 것인지 메르헨을 붙잡고 배우고 있었다.

그란트는 테인과 앉아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에드가 과녁까지 걸어가서 차크람을 뽑아서 다시 돌아올 때 저 멀리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소리에 에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발굽 소리는 대문을 지나 교차로에서 별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단 두 필의 기마만 방향을 튼 것이었지만, 그 속도가 질풍과 같았다.

에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인에게 다가갔다. 테인도 그제야 말발굽 소리를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고 선 테인이 연무장 입구로 걸어갈 때 일반적인 군마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말을 탄 이가 다가왔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선명히 보이는 흑마. 펜텀이라고 부르는 펜드래건의 전마다.

그렇게 전력으로 달려오던 전마가 테인의 앞에서 앞다리를 들고 힘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전마가 앞발을 내리자 먼지가 확 밀려왔다.

테인이 얼굴 앞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먼지를 날리고 있을 때 전마에서 뛰어내린 거구의 사내가 그런 테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영감! 오랜만이야!”

거의 2미터 달하는 키. 야만 전사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거구의 사내다.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이어져 있어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하는 사내.

악마의 시대 1 주인공인 자유 기사 펜드래건이다.

게임의 세계로 빠지게 했던 악마의 시대 1. 그 게임의 주인공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호탕한 모습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당신이 그러니까 테인이 집에 안 돌아오려고 하잖아요.”

“세실리아. 사실 테인도 이런 거 좋아한다고.”

에드의 시선이 아직 말에서 내리지 않은 여인을 향했다. 백마에 오른 여인.

트라비아 왕국의 공주. 세실리아.

펜드래건으로 플레이할 때의 히로인이었던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악마의 시대 1의 팬으로서 기뻐했었다. 실제로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화면 상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품이 느껴졌다.

저렇게 기품 어린 모습으로 악마의 머리를 헬버드로 쪼갤 때 느껴지던 카타르시스가 떠올랐다. 가볍게 사냥을 다녀오는 길이라 그런지 그녀의 헬버드는 보이지 않았다.

“놔주게. 뼈마디가 부서지겠네.”

테인의 침착한 말투에 펜드래건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테인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옷을 툭툭 털며 펜드래건을 바라보았다.

“잘 다녀왔나?”

“마수 칼카쉬 다섯 마리를 잡았지.”

사냥이 그냥 사냥이 아니고 마수 사냥이었나? 하긴 저 둘이 나가서 잡아 오는 것이 평범한 것들일 리가 없으리라.

펜드래건은 웃는 얼굴로 테인의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워낙 소란스럽게 등장한 덕분에 모두가 모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감이 어쩐 일로 이렇게 손님들을 불러 모았을까?”

펜드래건은 테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쭈욱 움직이다가 덱스에게 머물렀다.

“응? 챔피언? 자네가 여기 왜 있는 건가? 돌아오는 길에 자네 실종 소식이 들려서 아쉬워했었는데.”

테인이 그 질문에 대신 답해줬다.

“악마 사냥을 하기로 했네.”

“악마 사냥?”

펜드래건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이거 장래 용사 희망자들인가?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대접해야지. 본가로 가지.”

그리고는 납치하듯 테인을 말에 태우고 먼저 떠나버렸다.

뭔가 기대했던 만남과 달랐지만, 본가에서 다시 만나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펜드래건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세실리아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꺼냈다.

“너무 정신없지? 마차를 보내줄 테니 타고 오도록 해. 보기 드문 후배들인데 그냥 보내면 안 되니까.”

그 말만 남기고 세실리아도 백마를 몰아 사라졌다.

아린이 메르헨을 돌아보며 물었다.

“헬레나도 이러셨어?”

“아뇨. 우리 엄마랑은 다르네요.”

다들 펜드래건에 대한 평을 남길 때 에드는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덱스가 그 모습에 불퉁하게 물었다.

“뭘 그리 웃고 있어?”

“아니. 뭔가 펜드래건 답다고나 할까?”

“언제 본 적 있어?”

화면 너머에서지만 오래 봤지.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헬레나와는 다르지만, 펜드래건은 호쾌한 맛이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마차를 타고 본가로 간 곳에는 커다란 연회장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연회장으로 옮긴 긴 테이블에 일행 모두가 앉을 수 있었다.

펜드래건은 상석에 앉은 채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영감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펜드래건의 시선이 아린에게 향했다.

“예언을 쫓아 퇴마를 행하는 성기사와.”

펜드래건의 시선이 메르헨을 향했다.

“어머니의 행적을 좇아 나와 악마와 엮인 친구의 딸.”

펜드래건의 시선이 덱스를 향했다.

“챔피언의 지위를 내려놓고 악마를 잡겠다는 챔피언과.”

펜드래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에드를 향했다.

“이미 능숙한 악마 사냥꾼 에드까지.”

카일과 리프, 디에고는 자신들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았지만 그걸 따질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펜드래건은 그 존재 자체의 카리스마로 그가 허락하기 전에는 이 자리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에드가 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에드에게 집중되었다.

펜드래건도 에드를 향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세실리아를 향해 윙크했다.

“거봐.저 친구가 내 인사를 받아 줄 거라고 했잖아.”

“당신의 감은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펜드래건은 상석에 놓인 자신의 청동잔에 술을 따르더니 테이블을 따라 쭉 밀었다. 에드는 자신의 앞까지 온 잔을 잡아챘다. 민첩한 손놀림으로 잔을 받아든 에드는 술이 넘치지 않게 잔을 반원을 그리며 들어 올리고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잔을 텅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펜드래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영감이 말하기를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자라고 하기에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군.”

펜드래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에게 다가왔다. 그는 에드가 내려놓은 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영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에드는 펜드래건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했다. 펜드래건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태자가 악마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이 인간. 곁에 누가 있건 없건 할 말 다하는 모습은 게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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