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악연
허공을 날던 아린은 몸을 틀어 에드가 만들어준 얼음 덩어리 위에 떨어졌다. 그 무게에 눌린 얼음 덩어리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부력에 밀려 올라갈 때 아린은 그 힘을 빌려 도약했다.
상선에 오른 아린은 쾌속선 위에서 마주 보고 선 두 사내를 보았다. 핏빛 근육질이 가득한 사내와 마주 선 에드를 본 아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눈이 푸르게 빛나 상대를 살펴보았다. 저건 분명 인간의 힘이 아니라 여겨 벌인 일이었는데 그녀의 눈에 보이는 상대의 모습은 기이했다.
인간의 영혼이 악마의 힘을 사역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 결과물이 얼마나 끔찍한 실험의 결과물인지.
“이런 흉악무도한 자들이 있나!”
아린이 아칼란에 대해서 분노할 때 사내가 에드를 향해 돌진하고 에드가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에드는 달려오는 브란트에게 일곱 발의 화살을 날렸다. 얼굴을 향해서 다섯 발의 화살을 날리고 바닥을 향해 두 발의 화살을 날렸는데 지금은 어찌 된 것인지 에슬란 사슬의 자동 방어 시스템은 꺼진 것 같았다.
팔에 사슬을 둘러 화살 다섯 발을 모조리 쳐내고 달려오던 브란트가 바닥이 얼자 비틀거렸다.
에드는 비틀거리는 브란트를 향해 에트리안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마력을 주입해 휘두른 궤적을 따라 섬뜩한 검기가 날았다.
처음 당하면 뭔지도 모르고 당하는 공격.
그런데 브란트의 핏빛으로 물든 왼쪽 눈이 빛나는가 싶더니 양팔을 이용해서 궤적에 드는 부위를 막았다. 사슬 위로 검기가 작렬했다.
쩌엉!
검기는 근력이 아닌 마력으로 날리는 것. 사용자의 근력과 상관없이 힘을 발현했다.
에드의 검기에 두들겨 맞은 브란트가 선미까지 밀려났다가 바닥에 왼발을 박아넣고 튕겨 나가는 것을 버텼다.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데 브란트가 왼팔을 휘둘렀다.
섬뜩한 예감에 에드는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쉬악.
에드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에슬란의 사슬이 지나갔다. 길게 늘어난 사슬은 그 무게를 생각하면 스치기만 해도 살이 찢기고 머리가 깨질 위력이었다.
에드는 뒤로 물러나서는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마력이 쭉쭉 빠져나갔지만, 검기가 연달아 날아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기. 이걸 이번에도 막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어려운 걸 브란트가 해냈다.
왼쪽 눈이 붉게 빛나는가 싶더니 사슬을 감은 팔로 그 궤적을 막아냈다.
쩌저저정!
브란트는 그걸 다 받아낸 대가로 쾌속선 선미에서 튕겨 날아갔다. 튕겨 날아가던 브란트가 왼팔에 감고 있던 사슬을 풀어 던져서 돛에 감았다.
그렇게 날아가던 힘을 멈추고 탄력을 이용해 돌아올 생각인가 본데 실수한 거다.
에드는 에트리안의 검을 내려놓고 곧장 화살을 날렸다. 한 팔로 모든 화살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빙결의 화살에서 쏠 수 있는 모든 화살을 모조리 쏟아냈다. 팔을 들어 몇 발의 화살을 막았지만, 허벅지와 어깨에 화살이 박히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급하게 쏘아낸 거라 빙결의 화살집에서 모인 수준밖에 안 되지만, 관통으로 두꺼운 근육을 뚫고 박힌 화살은 충분히 상대를 느리게 만들었다.
다시 쾌속선으로 돌아온 브란트는 한 다리로 땅을 박찼다.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을 제대로 못 다루게 되면 몸의 균형이 깨진다. 그래서 움직임이 투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로 감히 달려들다니 끝을 봐야겠다. 에드도 이번에는 마주쳐 거리를 좁혀가며 샐러맨더의 검을 뽑았다. 거리가 좁혀진 순간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순간적인 움직임은 에드가 지금까지 마주한 어떤 존재보다도 빠르다. 지금의 민첩함으로도 피하는데 종이 한 장 차이 정도로밖에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풍압에 피부가 찢길 것처럼 아파 왔다. 그러나 피해냈다는 것이 중요했다. 샐러맨더의 검이 상대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샐러맨더의 검에 베인 곳은 불길이 치솟는다. 그 와중에도 몸을 틀어서 깊이 베이지 않았다고 하나 근육까지 베인 탓에 곧장 불길이 치솟았다.
브란트는 그대로 에드를 지나쳐가는가 싶더니 두 발로 서서는 양팔의 쇠사슬을 풀어 휘둘렀다. 채찍처럼 날아드는 쇠사슬이 에드를 노렸지만, 어깨와 허벅지에 꽂힌 화살이 만들어준 빈틈이 있어 에드는 그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피했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위험했을지 모르나 지금 상태에서는 피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피해낸 에드는 샐러맨더의 검을 던졌다.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샐러맨더의 검을 브란트는 사슬로 쳐내고는 오히려 검을 투척하며 만들어진 빈틈을 보고 돌진해 왔다.
이걸로 승부가 났다. 2초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튕겨 날아갔을 거로 생각했던 샐러맨더의 검이 그 속도 그대로 브란트의 등에 꽂혔다. 근육이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있어서 30cm로 심장까지 닿지 못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2초 동안은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 더 깊이 파고들면 되니까.
브란트는 등에 샐러맨더의 검이 꽂혔음에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저돌적인 돌진에 몸을 옆으로 피했을 때 브란트는 손을 등뒤로 돌려 샐러맨더의 검을 뽑아 던졌다.
무식할 정도의 괴력으로 던진 검은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에드도 간신히 피했을 정도로.
그런데 브란트는 멈추지 않았다. 달리던 그대로 도약해 강물로 도망가려 했다.
에드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며 화살을 뽑아 날렸다. 마력을 집중해 쏘아낸 화살을 브란트가 몸을 돌려 막아냈다. 몸이 많이 굳어서인지 등의 근육이 불에 타고 있어서인지 튕겨내지 못한 화살이 사슬 사이에 박혔다.
콰드득!
브란트는 사슬을 감고 있는 팔이 통째로 얼어붙은 채로 강물에 빠졌다. 부력 때문에 떠오를 거라고 여기고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달려갔다.
에트리안의 검을 많이 쓴 탓에 마력이 바닥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달려갔는데 브란트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잠잠했다.
양팔에 사슬을 두르고 있으니 그 무게가 부력을 이겨냈는지 그대로 물속으로 사라졌다.
에드는 화살을 시위에 건 채 수면을 쏘아보았지만, 브란트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모습에 에드는 입맛을 다셨다.
아칼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인간 병기. 이 자의 능력은 중급 악마를 아득히 상회했다. 상급 악마가 유물급 장비를 휘두른다면 이런 느낌일까?
붉게 빛나는 왼쪽 눈만 아니었어도 어떻게 됐을 것 같았다. 강한 근력과 민첩함 정도는 충분히 대적할 수 있었다. 악마들을 상대할 때면 에드조차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강한 녀석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놈들도 잡을 자신이 있었는데 브란트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애를 먹인 놈이 있었던가?
에드는 한참이 지나도 브란트가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비들을 회수하고 상선으로 돌아갔다. 이미 쾌속선과 상선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지만, 중간에 바닥을 한 번 얼리고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에드가 넘어오자 아린이 다가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아쉽지만 놓쳤습니다.”
“아뇨.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
아린은 에드와 사내가 싸우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의 싸움은 그녀가 싸움에 끼어들 틈도 없이 끝나 버렸다. 그래서 둘의 싸움을 두 눈에 담았는데 새삼 에드의 다양한 공격 방식에 놀랐고, 그걸 또 다 받아내는 괴물 같은 사내의 능력에 또 놀랐다.
테인이 그제야 마차를 열고 나오며 둘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놓친 건가?”
“예.”
테인은 그 말에 선수로 나와 멀어지는 쾌속선을 바라보았다. 아칼란 요원들이 습격할 때는 피해 있었지만, 브란트와의 싸움은 창문을 열어서 구경했다.
테인의 눈으로는 쫓기도 힘들었지만, 그 형태는 기억하고 있었다.
테인의 시선이 아린에게 향했다.
“그건 인간의 형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는데 어떻게 보았나?”
아린은 그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새삼 아칼란이 벌인 끔찍한 실험이 떠오른 탓이었다.
“인간의 영혼으로 악마의 힘을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테인은 에드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 자네에게 말해주었을 때 악마의 시체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잡은 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요 1년 사이에 나타난 악마를 잡는 루키에 관해 물었을 때 말일세.”
그 말에 에드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건 악마의 시대 2의 주인공들을 찾기 위해 물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파악이 안 되는 자가 있다고 했다.
“설마 브란트가 그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에드는 그 말에 아인 강을 바라보았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지금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은 브란트가 주인공 중 하나일 줄은 몰랐다.
주인공 중 하나와 악연으로 맺어질 줄은 특히 몰랐다.
아칼란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라면 이번에 놓쳤다고 해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때 브란트를 죽여야 하는 걸까?
브란트가 죽음으로 인해서 엔딩으로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서 온갖 잡생각이 떠돌았다.
그때 아린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악마의 힘을 사역할 수 있게 된 거죠?”
테인은 외눈 안경을 만지면서 답했다.
“에슬란의 사슬은 원래 대악마 봉인용 무구이네. 그게 그렇게 잡다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그걸 이용해서 악마의 힘을 사역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네.”
아린은 주먹을 꼭 쥐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실험에 죽어 나갔을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네요.”
테인도 침중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공감하는 바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칼란이니까 저런 미친짓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 악마를 잡기 위해 악마를 만들다니.”
“용서받지 못할 일입니다.”
아린의 강한 어조에 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지.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뭇매를 맞게 되겠지.”
에드는 테인을 바라보았다. 이 양반은 솔직히 악마를 죽일 수만 있다면 악마를 만드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할 이였다. 그런 그가 아린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걸 보니 역시 나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린은 굳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칼림 시에 가면 바로 보고해야겠어요.”
“그래야죠.”
에드는 아린의 말에 동조하고 브란트가 빠진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미 상선은 그곳을 지나가서 선미 뒤로 그가 빠진 강물이 흘러 지나갔다.
원래라면 지금 이렇게 마주칠 사이가 아니었을 아린과 브란트도 악연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었다.
제라드를 만나 좋은 무기를 줬고, 이제는 하나의 악연이 시작됐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식으로 만났어도 아린은 브란트를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다만 그 시간이 빨라졌을 뿐이라 여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