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브란트
아칼란이 뭔가 수작을 부릴 거라는 생각은 했다. 아리엔이 경고해준 것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리도 당당히 습격을 가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쾌속선을 타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참 우습게 보였구나 싶어 활을 꺼내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때 그런 에드의 앞으로 아린이 나섰다. 그녀는 선수에 서서 다가오는 쾌속선을 향해 소리쳤다.
“아스트론의 성기사 아린이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아린의 외침에도 쾌속선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칼란은 트라비아 왕국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이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대륙을 아우르는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를 죽일 수는 없을 거라 여겼는데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에드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좁혀진다. 접근전을 한다고 해도 걱정할 바는 아니었지만, 저들이 배를 넘어오면 곤란하다.
배에 구멍이라도 낸다면 더 큰 문제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아린은 자신의 말을 무시한 채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인상을 미미하게 굳혔다. 성기사인 그녀에게 있어 아스트론의 이름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었다.
그 이름을 대고 물었는데도 묵묵부답 거리를 좁혀오는 그들의 무심한 표정을 본 아린이 경고했다.
“당장 배를 멈추고 누군지 밝혀라!”
쾌속선은 오히려 더 속도를 높였고 반대편에서 가면을 쓴 아칼란 요원 하나가 소리쳤다.
“이 일은 아칼란의 일이니 아스트론 교단이 끼어들 일이 아니오. 우리는 에드만 잡아가면 되니 물러나시오.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아스트론 교단의 일을 함께하는 중이다. 물러가라.”
“그는 아칼란의 팀 하나를 모조리 죽인 중죄인이오. 물러나시오.”
아칼란 요원들이 석궁을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고 에드가 아린에게 말했다.
“제 일입니다. 제가 알아서 하죠.”
아린은 에드의 말에 섭섭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쾌속선을 향해 돌아섰다.
“아뇨. 이건 우리의 일이에요.”
대답과 함께 아린이 먼저 해머를 던졌다. 그녀가 던진 것은 해머였지만, 그것은 신뢰의 증명이었다. 모든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은 신뢰의 증명.
에드는 이제야 이곳에서 진정 자신을 위하는 이를 만났음을 깨달았다.
아린의 해머는 아인 강물 위를 날아 쾌속선의 선수에 선 자를 향해 날아갔다. 사내는 날아드는 해머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사내의 양팔에 감겨 있는 쇠사슬이 주먹까지 꼼꼼히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후려치니 해머가 강물 아래로 빠졌고 사내는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는 싸움이 시작된 것을 보고는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쉬쉬쉬쉭.
쾌속선을 향해 날아가는 네 발의 화살. 거리가 꽤 있었지만, 예전보다 궁술이 늘어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가 남달랐다. 그런데 선수에 서 있던 사내가 손을 내밀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슬이 풀려나더니 화살들을 모조리 쳐냈다.
에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사슬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화살들을 쳐내는 것을 보니 저게 뭔가 싶었다.
테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감탄했다.
“저거 에슬란의 사슬인 것 같은데 저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군.”
사슬에 새겨진 수많은 룬 문자들. 룬 문자가 들어갔다는 것만으로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런 룬문자가 수두룩 빽빽하게 들어간 걸 보면 확실히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다시 다섯 발의 화살을 날렸는데 마치 사슬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화살들을 모조리 쳐냈다. 마지막 화살을 쳐내는 모습을 보니 완벽하게 쳐내지 못해 사내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하긴 아무리 원거리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유물이라고 해도 완벽할 수는 없다.
아칼란에서는 에드를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패를 구해왔다. 원거리 공격을 자동 방어하는 황당한 유물을 착용한 자라면 충분히 자신을 잡을 수 있겠다 싶었나 보다.
에드가 장군급 기사를 죽인 것을 알고도 보냈으니 개인의 무력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자. 게다가 그를 보좌할 아칼란 요원 일곱까지 더했으니 만만한 전력은 아니다.
클리프 왕자를 죽이러 갈 때의 수준이었다면 저들만으로도 위험해졌을 터.
아린이 손을 내밀자 수면 아래에서 해머가 날아와 손에 잡혔다. 그녀는 사내를 보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거리를 가늠하는 것을 보니 거리가 좁혀지면 건너갈 생각인가 보다.
“테인. 마차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칼란 요원들이 석궁까지 꺼내든 마당에 테인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테인을 저들이 알아본다면 감히 죽일 생각까지는 못하겠지만, 눈먼 화살에 맞으면 답이 없다.
테인이 마차로 들어가고 더그가 그 앞을 막아섰다. 더그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들을 막을 때까지만 테인을 지켜주면 되겠다 싶었다.
그때 아칼란 요원들이 석궁을 쐈다. 아린이 그걸 보고 방패로 앞으로 가린 채 볼트를 모조리 막아냈다. 일곱 발의 볼트를 모조리 방패로 막는 신기를 보였는데 막아내는 순간 확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독무였나 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에드는 체력이 높아서 잠깐 어지러움을 느낀 것이 전부였고, 아린은 방패가 살짝 빛나는가 싶더니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독무로 시야를 가린 채 쾌속선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에드는 다가오는 이들을 느끼면서 아칼란 요원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독무로 가려진 곳에서 튀어나온 화살은 적들도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아칼란 요원 일곱이 모두 머리에 화살을 꽂고 쓰러졌다.
예상대로 에슬란의 사슬은 저 사내만 지켜줄 뿐. 다를 이들에게 날린 화살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사내는 뒤에서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죽었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여겼을 때 도약했다.
그런 사내를 향해서 아린의 해머가 날아들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해머에 사내가 주먹을 휘둘러 해머를 쳐냈지만, 그 충격으로 다시 뒤로 튕겨 날아갔다.
쾌속선으로 돌아가 내려선 사내가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사슬이 움직여 다섯 발의 화살을 쳐냈고, 마지막 한 발은 몸을 틀어서 피해냈다. 사내가 몸을 피해낸 사이에 이번에는 아린이 갑판을 박차고 달려 그대로 쾌속선을 향해 도약했다.
에드는 그런 아린을 엄호하기 위해서 다섯 발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사내의 팔을 감싸고 있던 사슬이 화살들을 쳐내느라 아린이 배를 건너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배를 건넌 아린이 내리치는 해머를 사내가 주먹을 쳐올려 막아냈다.
쩌엉!
사내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났고, 아린은 선수에 설 수 있었다. 그녀는 선수를 박차고 방패로 앞을 가린 채 그대로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아린의 돌진에 사내는 방패를 주먹으로 때렸다가 뒤로 몸이 떠서 날아갔다.
이대로라면 쾌속선이랑 들이받을 판이라 에드는 빙결의 활에 마력을 주입해서 쾌속선의 앞 강물에 쐈다.
콰드득.
마력까지 주입된 화살이 박히면서 쾌속선 좌측 앞의 강물이 얼어붙었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에 부딪힌 쾌속선의 방향이 틀어져 상선의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에드도 쾌속선의 갑판으로 건너갔다.
아린과 사내는 이미 치열하게 치고받는 중이었다. 두 주먹에 사슬을 감고 후려치는 사내는 야만전사처럼 근육질의 몸은 아니었다.
팔다리가 길고 몸이 호리호리해서 오히려 민첩함을 중시하는 것 같은 사내였다. 그런 사내의 주먹이 아린의 방패를 후려치거나 그녀의 해머를 후려칠 때마다 그녀의 신성력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에슬란의 사슬이라는 물건이 뭐하는 물건인데 저렇게 만능인가 싶었다. 지금까지 본 유물 중 가장 성유물에 가까운 괴물 같은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저런 유물을 지닌 사내라면 아칼란에서 정말 작정하고 키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작 자신을 잡기에 풀어놓기에는 아까운 자.
개인의 기량은 아린과 호각을 이루는 것을 보면 확실히 뛰어난 자였다.
자신이 아칼란의 중죄인이니 제정신이 박힌 아스트론의 성기사라면 이번 일에 끼어들 리가 없다고 여겼을 터였다. 정치적 부담을 안고 에드를 지켜줘야 할 필요는 없을 거라 여겼을 테니까. 솔직히 에드도 아린이 자신을 위해 나서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린이 없었어도 저들을 죽이는 데 무리는 없었을 것 같지만, 그녀가 함께해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
에드는 이런 싸움에서 정정당당한 승부니 어쩌니 하면서 기다려주거나 그러는 성격이 아니었다.
에드는 아린의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사내를 향해 주저 없이 화살을 날렸다. 에드가 쏘아 보낸 화살을 막기 위해 사내의 오른팔에 감겨 있던 사슬이 풀려나 그걸 튕겨내는 동안 아린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방패로 사내의 주먹을 쳐올리고 빈틈을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아린의 공격에 뒤로 훌쩍 물러난 사내는 둘을 돌아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기사.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죽이지 않겠다.”
사내의 말에 아린은 대답 대신 해머를 던졌다. 사내는 거칠게 주먹을 휘둘러 해머를 쳐내고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에 이미 일곱 발의 화살을 연달아 쏘아내는 중이었다.
카카카카캉!
다섯 발의 화살을 튕겨내고 한 발은 피했지만, 마지막 한 발이 왼쪽 허벅지에 박혔다. 마지막 화살은 빙결의 화살집에 넣어두었던 화살이라 허벅지 쪽이 시퍼렇게 얼었다.
에드가 재차 화살을 시위에 거는데 사내의 팔을 휘감고 있던 사슬이 촤르륵 풀려났다. 사내는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말했다.
“너희가 자초한 일이다.”
사내의 목소리가 마치 저 깊은 동굴에서 야수가 크르렁 거리는 것과 같이 울렸다. 그리고 사내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한쪽 눈이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옷이 찢어질 정도로 근육이 부풀었다.
“뭐야?”
키도 크고 팔과 다리가 길쭉한 사내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피부도 핏빛으로 변한 모습에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카카카캉!
팔을 들어서 막은 사내의 팔뚝에는 벌써 사슬이 감겨 있어 화살이 튕겨 나갔다. 사내는 화살을 튕겨내고 그대로 돌진해 왔다. 아린이 방패로 앞을 가리고 마주 돌진해 들어갔다.
꽈앙!
마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굉음이 울리더니 아린이 쾌속선 밖으로 튕겨 훨훨 날아갔다. 에드는 아린이 떨어질 곳을 향해 마력을 담아 화살을 쏘아내고는 곧장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앙!
에드가 서 있던 곳의 바닥이 박살 났다. 갑판의 나뭇조각이 비산 하는 사이에 에드는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만 붉게 빛나는 모습은 악마의 시대 1에서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악마 종속자나 추종자와는 다른 상황. 하지만 어떻게든 악마와 연관이 있다.
저 괴물과 같은 괴력에 민첩하기까지 한 녀석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상대보다 강했다.
에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냐?”
“브란트.”
이름을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보니 저 상태에서도 정신은 제대로 박힌 것으로 보였다. 헐크의 몸에 이성을 갖춘 상태라는 건가?
최악의 상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