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악마 연구가
포위한 자들의 가장 선두에 나서는 자가 있었다. 두건까지 꽁꽁 싸매고 있어서 보이는 것은 두 눈 뿐이지만, 그 눈이 검은색인 것을 보니 저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암살자를 죽였을 때는 조각이 나 버린 바람에 그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그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알 수 있었다. 트라비아 왕국 동쪽, 사막의 나라 쿠레나이의 암살자 일족 바샨족이었다. 저들도 떡밥만 나왔었다.
단장이 악마의 종속자로 나와서 자유기사 펜드리건 손에 죽으며 존재를 내비쳤던 이들.
쿠레나이 왕국에서 부리던 암살자 일족이 왕국을 버리고 떠돌게 된 것도, 그리고 단장이 악마의 종속자가 되면서까지 일족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이들.
15년 전에는 펜드리건의 손에 죽으며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손에 죽으며 실패했으니 저들이 눈이 돌아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색의 눈동자에 갈색 피부의 사내가 비수를 뽑아 든 채 에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악마 사냥꾼 에드. 맞나?”
“쿠레나이까지 내 이름이 알려졌나?”
에드의 중얼거림에 사내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본 것에 당혹스러워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네가 드네쉬님을 죽였다고 들었다.”
“드네쉬? 통성명은 안 했다만 너희처럼 꽁꽁 싸맨 녀석은 조각내 줬지.”
에드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무한의 화살집에서 화살을 뽑으며 연사를 날렸다. 레벨이 오른 것도 있지만, 훈련으로 크게 성장한 에드의 연사가 말을 걸었던 자를 기점으로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날아갔다.
예전과 다르게 일곱 발까지 한 호흡에 날릴 수 있었다. 숨을 토해내고, 그 잠깐 사이에 쏘아낸 일곱 발의 화살에 명령을 내리려던 자가 황급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로 막아냈지만, 다른 자들은 그 정도 실력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실력이 좋은 자들이 팔에 차고 있는 보호구로 막으려고 했지만, 에드의 화살은 관통이 패시브로 붙어 있었다. 얇은 팔뚝 보호구 정도로 튕겨내려면 정확한 속도에 맞춰서 튕겨낼 만한 실력자여야만 했다.
팔이 꿰뚫린 채로 가슴에 화살이 박혀 쓰러지는 자들이 여섯. 비수로 막아낸 자도 운이 좋아 막았다.
“죽여라!”
한 호흡에 여섯을 쓰러트렸지만, 남은 자들이 24명이나 된다.
사방에서 그들의 비수가 날아들었다. 에드는 날아드는 비수들을 읽고는 바닥을 차고 백 덤블링을 선보였다. 머리가 땅바닥을 향했을 때 에드는 허리를 틀며 다리를 쫙 벌렸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비수들이 에드를 피해 지나갔다. 에드는 그대로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 한번 연사를 쏘아 보냈다.
뒤편에서 비수를 날리고 재차 비수를 뽑아 들던 자들이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 와중에 운 좋은 자는 들고 있던 비수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냈지만, 여섯이 더 쓰러졌다.
단 두 호흡에 열둘이나 되는 암살자들이 쓰러지자 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동시에 달려들면서 비수를 날렸다.
에드는 뒤로 뛰어서 말의 오른쪽으로 이동해서 말을 방패 삼으며 오른쪽에서 달려들던 자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운으로라도 막는 자들이 나오지 못했다.
다시 일곱이 줄었고, 에드의 말은 비수에 맞고 앞다리를 치켜들었다.
이히히힝!
에드는 그런 말에게서 멀어지며 몸을 틀어 말의 높이 든 다리 사이로 보이는 적들을 향해 다시 화살을 날렸다. 넷이 더 쓰러지는 사이에 에드는 오른쪽에서 달려들다가 자신이 쏜 화살에 맞고 쓰러진 자들이 있는 곳으로 백 스텝으로 물러났다.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는 자들을 상대로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 단순히 궁술만 연습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틈틈이 연습해 두었기에 에드가 있던 자리로 달리던 자들이 에드를 향해 달려들 때는 모두 그의 전방에 서 있었다.
에드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연사를 쏘아냈다. 달려들던 자 중 쓰러지지 않은 자는 말을 걸었던 자가 유일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실력이 가장 출중한 것인지 또 한 발의 화살을 막아냈던 자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비수 여섯 개를 동시에 날리며 달려들었다. 에드는 한 발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는 오히려 마주쳐 달려들었다.
암살자의 눈에 기쁨이 서렸다. 그가 쏘아낸 비수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독이 퍼진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달려드니 승부가 났다고 여겼다. 함께 온 일류 암살자들이 모두 죽었지만, 복수는 성공했다고 여겼다.
그때 달려들던 에드의 몸이 살짝살짝 흔들리는 것 같더니 비수가 모두 그를 지나 뒤편으로 날아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비수를 모조리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암살자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을 때 한 발의 화살이 그의 미간에 꽂혔다. 달려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바닥에 쓰러진 암살자는 그대로 절명했다.
에드는 쓰러진 암살자를 내려다보다가 화살을 시위에 걸어 몇 발을 더 날렸다. 쓰러지기는 했지만, 죽지 않아서 엎드린 채 기회를 보던 자들의 머리에 화살이 박히며 그들은 꼼짝도 못 해보고 죽었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다 살아있음을 알았기에 생존자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드는 죽은 암살자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걸어가야겠네.”
말에 특별히 애착을 두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비수를 맞은 말은 이미 독에 중독되어 거품을 물며 쓰러져 있었다. 암살자들을 상대할 때는 특별히 독을 조심해야 한다.
체력 스탯이 꽤 높아서 어지간한 독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높은 민첩이 있으니 맞을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에 날아드는 비수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거 다 피할 수 있겠다고.
과연 예상대로 모두 피할 수 있었고, 당황한 상대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게다가 죽은 척하던 암살자들마저 모두 죽이고 나니 레벨이 올랐다.
어지간한 하급 악마만큼이나 경험치를 준 자들. 하지만 하급 악마들과 다르게 인간이라 더 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을 동시에 서른이나 처리했으니 레벨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
에드는 민첩을 하나 더 올려 더 강해지고는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선 암살자들의 몸을 탈탈 털어서 돈을 회수했다. 가진 것은 별로 없는 놈들이었다. 전부 다 털었는데도 고작 금화 세 개 정도였으니까.
“거지였네.”
독은 쓰지 않으니 시체들을 대충 대로 옆 숲에다 던져 놓고 안장에 걸어놓았던 가방을 들쳐 맨 에드는 다시 대로를 따라 트라비아 왕국으로 향했다.
말을 타면 편하기는 하지만, 말을 타지 않는다고 해도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랜 시간 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대로 좌우로 숲이 펼쳐져 있어 새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고, 피톤치드 향이 나는 곳을 걸으면 그 자체로 상쾌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에드는 뒤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에 대로 옆으로 물러났다. 잠깐 마차를 얻어 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쪽 세상은 정말이지 한시도 방심할 틈이 없는 곳이었다. 선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곳.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옆으로 물러나서 걷고 있으려니 마차가 그의 옆을 지나 달려갔다. 훅 밀려온 먼지에 손을 휘휘 내저어 먼지를 날려 보냈다.
그때 잠시 앞장서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쌍두마차가 멈춰서 더니 마부석에서 한 사내가 일어났다. 자신처럼 여행자용 망토를 두르고 있지만, 척 보니 알겠다.
망토를 안쪽에는 가려져 있지만,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그는 에드를 보더니 물었다.
“트라비아 왕국으로 가는 길인가?”
“그렇습니다만···.”
“그럼 마차에 타게. 우리도 마테 시로 가는 길이니 태워주겠네.”
선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이런 호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예전이라면 주의했겠지만, 이제는 어지간한 상대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기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마부석으로 오르려고 하니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마차에 오르게. 안에 계신 분이 자네를 태워달라고 하더군.”
에드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지팡이를 옆에 기대 놓은 노인이 있었다. 새하얀 백발에 외눈 안경을 쓰고 있는 노인.
무릎 위에는 두꺼운 책자를 올려놓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그는 에드가 타자 그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자리에 앉게.”
에드는 노인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주름진 얼굴.
이 노인은 에드의 기억에도 있는 이였다. 악마의 시대 1에서 주인공 자유기사 펜드리건에게 도움을 주었던 달리아 왕국에서 건너온 악마 연구가 테인이었다.
악마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인물이었는데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저 책.
악마 총람.
세대를 거듭하면서 악마에 관해 연구한 것들을 수록한 책이다.
“감사합니다.”
“동포를 만나 그런 것뿐이니 개의치 말게.”
에드는 가만히 테인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악마를 연구한 그는 펜드리건이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해온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지금쯤 왕궁의 수도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왜 달리아 왕국에 왔던 걸까?
그때 테인이 천천히 악마 총람을 덮더니 외눈 안경 너머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외눈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갈색 눈동자는 무척이나 깊었다.
그의 시선이 에드의 몸을 쭉 훑었다. 에드는 그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무엇보다 테인은 지닌바 학식이 깊어 그 조언이 대단한 존재이지 개인의 무력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받아넘기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평생을 하나만 파고 살아온 테인의 눈빛에는 상대의 밑바닥까지 파헤칠 수 있는 혜안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테인은 꼼꼼히 에드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29? 30?”
테인이 하는 말에 에드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가 안색을 굳혔다. 자신이 죽인 악마의 수가 29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22. 트라비아 왕국에서 벌인 일이지 달리아 왕국에서 잡은 놈들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것들을 잡는 데 걸린 시간이 1년이 넘는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테인이 뭔갈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악마 종속자였군.”
악마 추종자들은 악마에 홀린 자들이지만, 악마 종속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 악마의 힘을 얻은 자들이다.
“이게 헷갈릴 정도라면 보통 악마에게 종속된 녀석이 아닌가 본데?”
테인은 홀로 중얼거리다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에서 피어나는 미소라 그런지 순식간에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가족을 보는 것 같은 푸근함이었다.
“많이도 잡았군. 무슨 원한이 있어 그리 악마들을 잡아 죽인 건가?”
잊고 있었다. 이 인간도 악마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왜 그렇게 악마를 죽이려고 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