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쫓는 자들
암살자에게서는 비수와 단검을 회수했다. 유물급 장비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에게서는 명품급 비수와 단검만 얻을 수 있었다.
가지고 있던 비수를 모두 명품급 비수로 바꾸고, 단검은 추가로 챙긴 후에 에드는 에스터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 죽을 뻔했음에도 태연한 기색이다.
“이 남자도 친위대였는데 당신 대체 누구예요?”
“에드입니다.”
정확히는 전 크로우 신입 레인저다. 지금은 스탯 빨과 스킬 빨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지만.
“정말 남으실 겁니까?”
“그럴 거예요. 횃불 없이 갈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볼게요.”
에스터는 정말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서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드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그녀와 반대로 걸어갔다.
서문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남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다.
장군급 기사들이나 상대가 까다로운 거지 일반 병사들은 어차피 상대가 안 되니까.
다만 화살이 다 떨어지고 비수에 단검까지 쓰면서 개싸움을 벌여야 했을 일이 에스터 덕분에 쉽게 해결됐다. 가는 길에 덤으로 경험치와 장비도 업그레이드됐다.
암살자의 비수는 검게 칠해진 줄 알았더니 금속 자체가 검은색이었다. 현철이라고 부르는 귀한 금속이 들어간 명품 중의 명품 비수.
숫자도 넉넉해서 코트 안쪽에는 이제 현철 비수가 가득했다. 무게가 늘었지만, 뿌듯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얻은 단검도 어쩐지 보이지 않더니 그 또한 명품 단검이다.
그는 좋은 경험치와 좋은 장비였다.
에드는 비밀 통로의 끝까지 걸어 나왔다. 왕족의 묘지인지 넓은 곳이었고,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왕성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불길을 잡지 못한 것을 보면 생각보다 불길이 크게 번진 것 같았다.
에드는 그 불길을 바라보다가 묘지를 떠났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달리아 왕국 수도의 아칼란의 안가.
에드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안가에서 소나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놓쳤다고?”
“예.”
아칼란의 가면을 쓴 수하의 대답을 들은 소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트리안이 죽었고, 암살자 드네쉬가 사라졌다고?”
“예.”
보고를 들은 내용을 재차 확인하는 것은 소나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보고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왕자를 죽이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에드가 죽지 않아 꺼림칙함이 남았다. 사실 그가 죽는 것이 베스트겠지만, 그가 살아서 빠져나갔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가 크로우 복장을 한 채로 살인을 벌였기 때문에 트라비아 왕국에서는 달리아 왕국에 대해 탄압을 할 명분을 얻었다. 클리프 왕자의 자리를 대신할 이를 보낼 수도 있었다.
아칼란으로서의 임무는 초과 달성한 셈이다.
“어쩔 수 없지. 그에 대한 정보를 살아남은 친위대에 알려라. 마무리는 그들이 해줄 거다.”
에드의 강함은 그녀도 직접 겪어봐서 안다.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서 직접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장군급 기사였던 에트리안을 잡은 거나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클리프 왕자를 죽인 것을 보면 그 하나를 잡기 위해서는 아칼란도 단단히 각오해야 했다.
무엇보다 지금 달리아 왕국에 나와 있는 아칼란의 요원 수가 너무 적었다.
“그리고 이제 철수 준비해.”
“예.”
요원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소나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 지긋지긋한 임무도 드디어 끝났다.
소나는 자신이 보고 있던 서류들을 옆의 화로에 던졌다. 서류를 소각하면서 소나는 옆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이렇게 임무가 끝나고 증거를 인멸하며 마시는 술 한잔으로 그간의 노고를 털어내는 것.
그것이 그녀가 가진 취미였다.
그렇게 술잔을 다 비워 갈 때쯤 문이 열렸다. 소나가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단검을 집어 던졌다. 겁도 없는 수하에게 겁줄 요량으로 던졌던 단검이 문에 박혔지만, 문을 연 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죽 코트를 입고 왼손에 든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고 나타난 사내. 그를 본 소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드?”
에드는 말없이 활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조준했다.
“자, 잠깐만!”
에드는 그런 그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얘기했잖아. 한 번만 더 나 이용하면 네 머리에 화살 박아주겠다고.”
소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던졌다. 자신을 배신한 순간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고이 미간을 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인이다.
에드는 화살로 날아오던 잔을 맞추고 또 한 발의 화살을 그녀의 미간에 맞췄다. 이 정도 근거리에서 에드의 화살을 피할 정도로 소나의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미간에 화살이 박힌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책상 위로 쓰러진 소나의 앞으로 걸어간 에드는 그들의 서류를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자신을 영입한 이유와 자신을 팽한 것까지 계획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드는 화로의 장작을 하나 들어서 곳곳에 불을 붙였다. 사방에 불이 붙어 그 불길이 안가를 휘어 감을 때 에드는 그곳을 떠났다.
안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궁에서 일어난 불길 때문인지 달리아 왕국 사람들은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크로우 복장을 보여주면서 트라비아 왕국 사람만 이용하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딱 세 곳 만에 이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검게 그을린 대전에서 돼지의 앞다리를 통째로 구운 것을 거칠게 잡아 뜯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 왕자님이랑 에트리안은 죽었고, 드네쉬는 사라졌다? 그 말 없는 친구가 그냥 사라질 친구가 아닌데?”
장년의 기사가 대전의 불타버린 의자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아마 죽은 것 같다.”
“그런데 분명 암살자가 중간에 사라졌지? 비밀 통로라도 찾은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우물거리던 앞다릿살을 꿀꺽 삼킨 사내가 대전의 창가에 서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실비아. 넌 어떻게 할 거야?”
푸른색 로브를 걸치고 있던 여인이 창문을 만지며 답했다.
“에트리안 경은 내 친구였어. 그녀의 죽음에 대한 대가는 받으러 가야지.”
사내의 시선이 장년의 기사를 향했다.
“누군지는 파악했어?”
“어쩐 일인지 아칼란에서 연락이 왔다. 상대는 악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자라더군.”
“왕자님이 아칼란은 경계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래서 교차 검증 중인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몇 입 만에 돼지 앞다릿살을 모두 먹어치운 사내가 바지에 기름을 슥슥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은 받았으니 왕자님 복수는 해줘야겠군.”
“직접 움직일 건가?”
“그래야지. 실비아 같이 가자.”
창문을 만지던 여인이 뒤돌아섰다. 그녀의 시선이 장년의 기사를 향했다.
“말롯 경은 어쩔 생각이죠?”
장년의 기사 말롯은 그 질문에 그 둘을 바라보았다. 클리프 왕자의 친위대로 함께 역경을 헤쳐왔던 이들.
야만전사 그렉과 신비술사 실비아.
이들이 왕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인다지만 자신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암살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그 암살자를 보냈는지가 중요한 일.
왕자는 국왕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국으로 복귀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왕자가 죽었으니 의심할 자는 단 하나다.
트라비아 왕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확인해 봐야 했다. 그래야 왕자가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얻었던 달리아 왕국을 내주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난 드네쉬의 일족에게 그의 죽음을 알릴 생각이네.”
그렉이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녀석들에게 알린다고?”
“그래야지. 그리고 이곳을 지키고 있을 생각이네. 복수가 끝나거든 돌아와. 혼자서는 지킬 수 없어.”
그렉은 그 말에 씨익 웃으며 옆에 세워놓았던 배틀 액스를 등에 착용했다.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실비아는 말롯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왕자님의 유지를 이어야 하니 돌아오겠어요.”
친위대의 야만 전사와 신비술사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말롯은 그제야 불에 탄 의자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왕자가 사라지고 이제 그 자리는 자신이 앉게 되었다.
말롯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의자를 쓰다듬었다.
메인 퀘스트는 트라비아 왕국에서 펼쳐질 거라는 생각에 그곳에서만 활동해 왔던 에드는 다시 트라비아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가는 길에 올 때처럼 무작정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클리프 왕자의 죽음이 알려지고, 크로우가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에 에드도 여행자 망토로 몸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했다.
괜히 크로우라는 것이 밝혀지면 반군의 영입 대상이 될 테니까.
돌아가는 길에 기회가 될 때마다 에드는 지금 다시 궁술을 연습 중이었다. 마을에 자주 들르지 않고 가능한 숲에서 궁술을 다시 연습하기 시작한 이유는 요즘 들어 자신의 활을 피하고 다가오는 자들이 있어서다.
중급 악마나 장군급 기사를 상대해 보니 알겠다. 이 자들에게는 자신의 궁술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상급 악마나 대악마까지도 상대해야 하는 지금 더 빠르고 강력한 궁술이 필요했다. 그냥 단순히 장비만 업그레이드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부족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의뢰로 인해 장비는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이었다. 장거리에서는 빙결의 활이 있고, 중거리에는 비수와 에트리안의 검이 있다. 근접전이 펼쳐지면 샐러맨더의 검까지 있으니 이제 거리에 상관없이 장비는 거의 다 갖춰진 상황.
하지만 더 강해져야 한다.
궁술 훈련에 에트리안의 검을 다루는 법도 병행했다. 생각보다 마력을 많이 잡아먹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걸로 암살자를 손쉽게 잡은 것을 생각하면 다루는 법에 익숙해져야 했다.
정확히 마력을 얼마나 쓰는지만 깨달으면 됐다. 민첩이 워낙 높아서 검 자체를 휘두르는 속도는 쾌검사도 울고 갈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트라비아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문이 들리면 악마 사냥도 병행했다. 공식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겠지만, 언제는 남에게 알리고 싶어서 잡았던가?
그 모든 것이 경험치고,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트라비아 왕국으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올 때는 아칼란이 준비해준 곳에서 쉬기만 하고 곧장 달려와서 몰랐는데 산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생각지도 못했던 악마들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악마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처음 잡는 악마는 추가 경험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레벨도 하나 올랐다. 민첩을 하나 올리고 나니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어떤 자신감이 생겼다. 고작 2주였지만, 달리아 왕국에 왔을 때와 떠나가는 지금은 확실히 수준이 벌어졌다. 레벨이 두 개 오른 것보다 이제야 제대로 된 궁수가 된 느낌이었다.
트라비아 왕국이 멀지 않은 곳. 대로에서 말을 몰던 에드는 말고삐를 잡아챘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벌레 소리,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에드는 말에서 내리고 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살을 하나 시위에 걸고는 좌측 숲을 향해 날렸다. 민첩을 올린 탓도 있지만, 수련의 효과 덕분인지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가 전과 달랐다.
화살이 나무에 박히자 나무가 피를 흘리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나 바닥에 떨어졌다. 눈으로 봐서는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의 은신술.
잡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간격을 보는 눈조차 속였던 암살자의 은신술이다. 그런데 한 번 겪어 보아서 그럴까? 이제 그들이 은신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격까지 완전히 속였지만, 오히려 그 부자연스러움 덕분에 그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에드가 다시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어 또 하나의 암살자를 맞추자 사방에서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얼추 봐도 서른이 넘었다.
들어오는 경험치는 미로에서 만났던 암살자에 비해 떨어지지만, 만만치 않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드는 그들을 보며 대충 계산해 보고는 씨익 웃었다.
“잘하면 레벨업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