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탈출
소나는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회의실은 거의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클리프의 염력과 에트리안의 검에 의해 풍비박산 난 상황. 에트리안의 검에 자신과 함께 온 요원 둘은 숨이 끊어진 지 오래다. 장군급 기사를 고작 자신과 요원 둘이서 막겠다고 한 것이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실력이었다.
소나는 클리프 왕자의 시신 앞으로 걸어갔다.
국왕은 클리프 왕자의 죽음을 원했지만, 그 시체를 가지고 가는 이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그의 분노를 괜히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회의실에 불을 질렀다.
회의실 커튼에 불이 붙고, 바닥에 꽂혀 있던 책상에도 불이 붙었다. 불길에 완전히 휩싸인 것을 보고 소나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회의실에 에트리안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친위대원들도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이곳에 불길이 치솟은 이상 아칼란 요원들을 쫓기보다 이쪽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소나는 창밖에 내리자 몸을 숨긴 채 소리쳤다.
“클리프 왕자님이 살해당하셨다! 암살자가 서문 쪽으로 도주 중이다!”
에트리안이 쫓아갔으니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오늘 이곳에서는 살아나가지 못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는 크로우 복장을 한 채로 죽어야 했다.
소나는 잠시 에드에게 알려줬던 퇴각로를 바라보다가 뒤돌아 아칼란 요원들의 퇴각로를 따라 이동했다.
불길에 휩싸인 회의실에 뒹굴고 있는 클리프 왕자의 머리를 집어 드는 손길이 있었다. 매끈한 손가락에 핏빛처럼 붉게 칠해진 손톱이 조심스럽게 클리프 왕자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두 손에 클리프 왕자의 머리를 들고 작품을 감상하듯 바라보는 것은 검은 흑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 머리를 바라보다가 붉디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는 긴 숨을 토해냈다.
“하아. 클리프.”
그녀는 클리프 왕자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그녀는 가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네 복수는 내가 해주마.”
거세게 타오르는 회의실의 불길도 그녀의 반경 5미터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녀는 클리프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로 그대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로 지금까지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이 분하다는 듯 불길이 거세게 몰려들어 클리프 왕자의 머리 없는 시신을 거침없이 불살라 먹었다.
탈출로를 따라 달리던 에드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기억했다. 에트리안을 죽이고 달리는 중에 들린 소나의 목소리.
서문으로 잡았던 탈출로로 몰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에드는 그 기척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자신을 한 번만 더 이용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심판하기보다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에드는 왕궁 내부 도면을 떠올렸다.
서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급히 방향을 꺾어 남문으로 향한다. 북쪽과 동쪽에 불을 질렀기에 그곳에 친위대가 나와 있다가 서문으로 달려온다고 치면 남문 외에는 빠져나갈 곳이 없다.
에드는 속도를 더 높였다. 지붕 위에서 달리고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든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민첩에 스탯을 투자한 덕분에 몸놀림이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지붕 위다!”
역시나 서문으로 달려가던 병사의 외침이 들렸다.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달린다고 해도 눈에 띌 때는 방법이 없다.
에드는 달려오던 병사들의 손에 들린 횃불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퍼퍼퍼퍽!
횃불은 화살을 맞는다고 꺼지지 않는다. 다만 쥐고 있던 이들이 그것을 놓치고 왕궁의 건물 위로 횃불이 떨어지며 불이 번졌다.
그렇게 시선을 빼앗은 후에 곧장 지붕 아래로 뛰어내려 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문까지 빠져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달려가는 에드의 눈에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에드는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꺼냈다. 그러나 여인의 속삭임이 빨랐다.
“이쪽으로!”
다급하게 외치고 빠지는 그녀의 눈동자가 갈색이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클리프 왕자가 왕궁을 점령하고 병사들이 득실거리기에 왕궁 내부에 달리아 왕국 사람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전의 여인을 보니 시녀들은 남겨 두었나 보다.
에드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녀가 달려간 복도로 따라갔다. 그녀는 에드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그녀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조금 전 따돌리고 온 병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우선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녀는 단숨에 거리가 좁혀질 줄은 몰랐는지 흠칫 놀랐다가 복도 끝에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옆방의 문을 벌컥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가 따라서 들어가니 문을 닫은 여인은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당신이죠? 클리프 왕자를 죽인 사람이.”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크로우 복장을 보고 당신일 거로 생각했어요.”
에드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자신은 크로우로서 달리아 왕국을 위해 클리프 왕자를 죽인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칼란이 공식적으로 자신을 배신했으니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 했다. 자신이 장군급 기사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화살이 500발도 안 남은 상황에서 적어도 수천 명이 남아있을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까?”
여인은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군요.”
여인이 미인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녀가 누군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전장의 시신에서 깨어난 에드는 곧바로 트라비아 왕국으로 와서 활동했다. 그러니 여인이 누군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달리아 왕족 중 하나인가 보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따라오세요.”
그녀는 에드를 데리고 방의 안쪽에 있던 침대 다리를 돌렸다.
“운이 좋았어요. 이쪽으로 와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자 침대가 옆으로 스르륵 밀려나고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와요.”
여인이 먼저 아래로 내려갔고, 에드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그녀가 벽에 걸린 횃불에 불을 붙이고는 그걸 손에 든 채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에드는 기감을 넓혔다. 그렇게 앞장서 걷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에스터 디아제 드 달리아에요.”
“에드입니다.”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에드를 돌아보았다. 마치 이름을 듣고도 자신을 모르냐는 듯 보이는 눈빛이라 에드는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여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하긴 최전선에서 싸우던 레인저 부대 크로우에서 제 풀네임을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 것이 오만한 생각이었네요. 난 달리아 왕국의 삼공주였어요. 오라버니들은 클리프 왕자의 손에 모두 죽었고, 언니들은 포상으로 친위대에게 내주었죠. 아직 어렸던 저는 시녀로 만들었고요.”
공주님인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망국의 공주에게 공주님이라며 떠받들어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에드가 아무런 답이 없자 에스터가 가볍게 웃었다.
“하긴 클리프 왕자의 목숨을 거둔 것만으로도 당신은 할 일을 다한 셈이죠.”
공주님이 이정도로 마음이 넓기는 힘들다. 아마도 시녀로 지낸 1년이 어지간히도 힘들었나 보다.
에스터가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섰다가 돌아서며 물었다.
“그 검. 클리프 왕자의 곁을 지키던 에트리안의 검인 것 같은데 맞나요?”
눈썰미도 보통이 아니다.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터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큰 오라버니를 벤 게 그 여자였으니까요.”
왕족이라 그런가? 쌍욕이 나와도 부족할 판에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에스터가 걸음을 멈췄다.
“이 길을 따라가면 묘지가 나와요. 그곳을 통하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같이 안 가십니까?”
“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많은 이들이 죽을 거예요.”
시녀로 만들고 곁에 두었지만, 그녀는 달리아 왕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왕궁에 침입이 없었다면 그녀가 이렇게 혼자 돌아다닐 수도 없었을 거라는 말.
그녀의 말대로 정말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은 이들이 죽는 것이 싫어 왕궁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클리프 왕자가 죽었고, 그 암살자가 크로우의 복장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녀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터인데도.
“돌아가시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에스터는 에드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는 못 할 거예요. 성년도 되지 못한 왕족을 시녀로 만든 것까지는 왕국민들이 용납할지 몰라도 저를 죽이는 순간 왕궁 전역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들불이 일어날 테니까요.”
뭔가를 다 포기한 것처럼 보이더니 생각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가 겪을 고초도 만만치 않으리라.
그걸 알면서 돌아간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빙긋 미소를 짓는 그녀를 바라보던 에드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벽으로 밀쳤다.
“꺄악!”
그녀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지만, 에드는 고개를 뒤로 젖혀 그 사이로 날아온 비수를 피했다. 검게 칠하기라도 한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감각에 걸리지 않았다면 뭔지도 모르고 맞고 죽을 뻔했다.
에드는 말 대신 화살을 꺼내서 연달아 날렸다. 다섯 발의 화살을 컴컴한 복도로 쏘아 보냈는데 화살에 맞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통 놈이 아니다.
에드가 화살 세 발을 동시에 시위에 걸고 바라보자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터 공주와 함께 인 것을 보니 네가 클리프 왕자를 죽인 자로군.”
목에 상처라도 입은 건지 듣기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에드는 말없이 시위를 건 채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겨눈 채 물었다.
“누구냐?”
“클리프 왕자에게 일족의 부흥을 약속받았던 이다.”
친위대 중 암살자가 하나가 있다고 하더니 그자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횃불의 밝기 너머에 있는 자. 그런데 이런 자는 처음이다.
이 자의 간격을 인지했다면 선공을 취했을 터. 하지만 이 자는 비수가 날아오기 전까지 간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보통 암살자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히 간격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설령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 발의 화살의 시위를 당기며 에드는 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자들은 기감에 잡히지 않으니 빠르게 이자를 처리하고 가야 했다.
비밀 통로를 트라비아 왕국군이 알고 있다면 시간을 끌었을 때 이곳도 위험하다.
“공주님. 횃불을 끄세요.”
“예?”
“적에게 우리 위치만 발각 될 뿐입니다.”
에스터가 횃불을 치마로 감싸 불을 꺼버려 통로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다.
에드가 세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내자 암살자도 비수 세 개를 동시에 던졌다.
카카캉!
새삼 암살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날아오는 화살을 비수로 맞추다니?
그것도 이번에 레벨이 오르면서 민첩을 올려 속도와 파괴력 모두 올라간 화살을.
에드는 상대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고는 빙결의 활에 마력을 불어넣어 상대의 발치를 향해 화살을 쐈다. 자신을 노린 화살이라면 피할 테지만, 발치를 노리는 화살은 피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쏜 화살이 바닥에 꽂히는 순간 주위에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얼음이 맺혔다.
하지만 암살자는 이미 벽면을 밟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용감하게 달려드는 자가 있었던가?
에드는 그를 향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벽을 이리저리 박차며 달려오는데 화살이 모두 빗나갔다. 두 자루 단검을 든 채로 달려오는 그를 바라보던 에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에트리안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마력을 주입하며 십자 베기를 했다.
쉬악.
힘차게 달려오던 암살자의 몸이 조각났다. 화살은 소리를 듣고 쳐낼 수 있을지 몰라도 마력을 이용해서 펼치는 이 무형검은 궤적을 읽지 못하면 절대로 피하지 못한다.
에드가 에스터에게 횃불을 꺼달라고 한 것도 이것을 쓰기 위함이었다.
조각나 바닥에 떨어진 암살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에드는 긴 숨을 토해냈다. 에트리안의 검은 생각보다 마력을 많이 잡아먹어서 마력이 바닥났다. 이 공격이 실패했다면 낭패를 면치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