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성공
클리프는 왕자다. 그만한 이가 어설픈 악마에게 영혼을 바쳤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은 저자가 어떤 악마의 권능을 다루든 그 수준이 예사롭지 않을 거라는 말.
중급 악마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는 상대라는 점이었다.
“에트리안을 맡아!”
에드는 그리 외치고 시위를 놓았다. 처음부터 한 번에 승부를 가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화살에 맺혀있는 냉기의 위력을 확인할 생각만 했다.
그렇게 날아간 에드의 냉기가 맺힌 화살은 날아가던 중에 클리프의 코앞에서 멈췄다. 신비를 다루는 것은 아닌데 그의 권능이 염력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걸 깨닫자 상성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궁수가 염력을 쓰는 자를 죽여야 한다니?
“그런데 칼이 너무 무딘 것 아닌가?”
클리프가 씨익 웃더니 손을 들어 올리자 테이블 위에 있던 은촛대가 솟구쳐 올랐다. 에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위에 다시 화살을 걸면서 소리쳤다.
“에트리안이 방해하면 못 죽여. 그러니까 죽어도 막아. 목숨 걸고 막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촛대가 날아들었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오는지 높은 민첩 수치로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날아드는 은촛대를 피하고 에드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화살을 연달아 쏘기 시작했다.
저 염력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필요했다. 처음에 쏘았던 화살이 코앞에서 멈췄던 것을 보면 가까워질수록 염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은데 가까워질수록 화살의 위력도 올라간다.
성큼 다가가며 날리는 화살들이 클리프의 코앞에서 멈췄다가 오히려 머리를 돌려 에드를 향해 날아왔다. 에드는 그런 화살들을 피하면서도 점점 거리를 좁혔다.
이미 소나와 요원 둘은 에트리안과 싸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만으로는 에트리안을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그녀가 검을 뽑아 휘두르는데 그 검이 그려내는 궤적에서 느껴지는 오싹함에 고개를 숙이고 피해야 했으니까.
클리프에게만 집중해도 힘들 판국에 에트리안의 검까지 염두에 둬야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화살은 한 번 쏘면 끝인데 염력으로 조종하는 화살은 피해도 다시 날아든다.
그래서 계속 움직여야 했다. 한시라도 멈추면 벌집이 될 판이다.
에트리안의 검은 신비한 검이어서 궤적 내에 걸리는 모든 것을 마치 검기라도 두른 양 베어내고 있었다. 소나를 따라나온 요원 하나의 팔이 벌써 잘려나갔다.
에트리안은 유물급 장비가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강한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유물급 장비가 들렸으니 위험한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에드는 회의실의 커다란 원탁에 뛰어올라서 화살을 쏘고 있음에도 아주 조금씩만 거리가 좁혀질 뿐이었다.
클리프는 이제 거의 코에 닿을 듯 다가온 화살을 보면서 씨익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양손을 펼치자 에드가 쏘았던 화살들이 그의 앞을 가렸다.
화살 뒤에 숨은 클리프가 에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즐거웠다.”
그 말을 끝으로 기관총을 쏘듯 화살들이 날아왔다. 에드는 테이블 위에서 옆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화살들을 피했다. 그를 스치듯 날아간 화살들은 뒤에서 머리를 틀고 등을 노리겠지만, 에드도 그렇게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에드가 앞으로 달리며 빙결의 화살집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걸었다. 마력을 집중하는 훈련을 해왔기에 짧은 시간에 화살에 마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라면 아무리 클리프라고 해도 염력만으로 막기는 어렵다.
그렇게 쏘아낸 화살이 둘의 간격을 급격하게 줄이며 날아들었다. 클리프는 이번에도 염력으로 그걸 받아내려고 했지만, 너무 가까웠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클리프는 그렇게 만든 공간으로 화살을 막아낼 수 있었다.
“우습···.”
한 마디 비꼬려고 했던 순간에 화살촉에서 강렬한 냉기가 폭발했다. 냉기의 기운은 염력으로 막아낼 수 없었다.
“···끄악!”
얼굴 가죽은 물론이고 안구까지 얼어붙었다. 얼굴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클리프를 향해 달려가면서 세 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렸다.
클리프의 가슴과 배에 화살이 박혔다.
그 와중에도 염력을 발휘한 건지 한 발은 방향을 틀어 바닥에 박혔다. 하지만 다른 두 발은 모두 움직이게 하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깊게 박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거리는 좁혀진 뒤다.
에드가 다시 화살을 시위에 걸 때 비명을 지르던 클리프의 전신에서 가공할 폭풍이 불어닥쳤다. 그건 에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염력의 폭풍이었다.
뒤로 날아가 회의실 바닥을 구른 에드는 씨익 웃었다.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사방으로 염력을 쏘아내는 것은 이미 상대가 바닥을 보였다는 얘기다.
그때 회의실의 탁자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떠올랐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띄우는 염력.
그 모든 것이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쾅! 콰콰쾅!
에드는 몸을 날려서 바닥을 정신없이 굴렀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화살과 은촛대, 커다란 책상까지 꽂혔다. 그걸 보고 에드는 인상을 굳혔다.
눈이 안 보여서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줄 알았는데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눈을 잃었지만, 지금 그는 다른 감각이 깨어나는 중이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든 에드는 오히려 거리를 좁히고 들어갔다. 다가가면서 날린 화살들에 클리프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눈이 아니라 다른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날린 화살 중에 자신을 노리는 화살에만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클리프를 향해 다가가며 바닥에 화살을 날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막대한 마력을 모아서 날렸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마력을 집중하는 것은 두 발 정도가 한계일 정도로 강력한 냉기가 바닥에서부터 클리프의 다리를 얼려버렸다.
하반신이 얼어버린 클리프가 다시 한번 염력의 폭풍을 터트렸다. 사방으로 쏟아내는 염력에 이번에는 화살을 바닥에 박아서 날아가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폭풍이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클리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염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그대로 파고든 에드는 샐러맨더의 검을 클리프의 가슴에 꽂았다.
클리프의 전신에서 거센 불길이 일었다.
“끄아아악!”
에드는 클리프의 몸에서 불길이 일었지만,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액션은!
에드는 가슴에 꽂은 단검을 뽑아 그대로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클리프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에야 경험치가 들어왔다.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서 그런지 경험치가 꽤 많아서 레벨이 올랐다.
염력의 폭풍에 휩쓸리며 다쳤던 생채기마저 모두 사라졌다.
긴 숨을 토해내던 에드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그가 있던 곳으로 에트리안의 검의 궤적이 지나갔다.
회의실 벽까지 베어버리는 검격. 에드는 몸을 일으키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소나를 제외하고 요원 둘은 이미 목이 날아간 상황에서 에트리안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찢어져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단순히 호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에드는 소나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이제 알아서 해.”
“뭐?”
분명 에드는 클리프의 목숨만 취하는 것이 의뢰 내용이었다. 악마는 아니었지만, 악마에 자신의 영혼을 바쳤기에 주저 없이 그를 죽였고,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다른 경험치를 얻었다.
덕분에 레벨도 오른 상황.
에드는 여기서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사실 에트리안의 실력을 보니 탐이 나기는 했지만, 지금 상태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에드는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빙결의 화살집에 있는 화살 중 네 발이나 연달아 에트리안을 향해 쏘고 그대로 몸을 뒤로 빼냈다.
에트리안은 이미 소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달려오면서 그녀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짧아졌다.
크게 휘둘러 베는 것이 아니라 짧게 베는 것이라 속도가 더 올랐다.
에드는 민첩 스탯을 하나 더 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몸놀림으로 피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
에트리안은 에드가 자신의 검극을 보면서 용케 그 공격을 전부 피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를 악물고 돌진해왔다. 장군급 기사의 돌진은 적어도 직전 움직임에서는 아무리 에드라고 해도 피하기조차 힘들다.
그래서 정면으로 화살을 쐈다. 냉기를 머금은 화살이 날아들자 에트리안이 다시 검을 휘둘러 화살을 베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냉기를 가득 머금은 화살이었다.
콰삭!
주위가 온통 얼어붙는 가공할 냉기가 에트리안을 붙드는 순간 에드는 등으로 유리창을 깨고 회의실 밖으로 떨어졌다. 에트리안이 얼어붙은 잠깐동안 에드는 떨어지는 중에 벽을 발로 차서 복도 위 지붕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로를 향해 달렸다.
자신의 임무를 마친 상황에서 굳이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단번에 회의실을 벗어난 에드는 복도 위 지붕을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른손이 얼어붙은 채로 악귀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에트리안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소나는 분명 에트리안을 막을 실력이 안 된다. 하지만 자신이 뛰어내리고 곧바로 에트리안이 쫓아온다는 것은 소나가 그녀를 붙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칼란과 함께 하면 메인 퀘스트를 따라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과의 연은 여기서 끝나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아칼란이 자신을 뒤쫓아 목숨을 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는 속도를 높였다. 에트리안은 자신처럼 지붕 위를 달려오고 있지만, 아직 얼어붙은 팔은 회복하지 못했다.
붙어볼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이곳은 왕궁 내다. 왕자의 죽음이 알려지는 순간 암살자에 대한 척살령이 내려질 테니 잡혀줄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그녀를 달고 달린다.
에드가 속도를 높이자 에트리안이 결국 왼손에 검을 쥐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뒤를 살피면서 달리다가 자신을 노리는 무형의 검격을 읽고 몸을 피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신경을 많이 쓰니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장군급의 기사라고 하지만 이렇게 무한정 유물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녀의 마력은 시간을 끌면 바닥을 보일 터.
에드는 훈련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고 에트리안은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그대로 돌진해 왔다.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녀의 돌진을 보고 에드도 곧장 화살을 날렸다.
다섯 발의 화살이 날아드는데도 그녀는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검으로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만 쳐내고 간격을 좁혀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에드는 감탄했다.
왼손으로 검을 쓰는데도 어색하지 않다. 평상 시에 양손으로 검을 휘두른 훈련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오른팔이 얼어붙은 그녀는 평상 시에 비해 확연히 실력이 줄었다. 클리프가 눈앞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리 쉽게 냉기 화살로 팔을 얼어붙게 하지는 못했으리라.
에드는 활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샐러맨더의 검을 뽑고 마주쳐갔다.
“죽여주마!”
장군급 기사. 하지만 오른팔을 잃은 그녀의 검이 에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경쾌한 찌르기가 자신을 향한 순간 에드는 몸을 틀었다.
과연 무형의 검날이 그가 있던 곳을 스쳐 지나가고 그녀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목만 까딱여도 검이 움직이는 궤도로 만들어지는 무형의 검날.
에트리안은 에드를 조각내서 왕자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려내는 무형 검날의 궤적을 모조리 피해낸 채 다가온 에드의 샐러맨더 검이 그녀의 왼손목을 잘라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자신의 공격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려하게 피해낸 후에 휘두른 단검은 그가 왜 활을 들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손목을 잘라낸 단검이 그대로 에트리안의 목을 잘라냈다.
에트리안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에드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장검과 검집을 회수한 채 화광이 충천하는 왕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