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의뢰
소나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방해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에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알면 다음에 오지?”
소나는 오히려 에드의 반응에 당황했다. 정말로 그가 이 거리에 용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악마를 사냥한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
이렇게라도 긴장을 풀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소나는 배운 대로 교태로운 미소를 흘렸다. 아직 비록 하급 악마들만 사냥했다고 하지만, 벌써 22마리의 악마를 사냥한 악마 사냥꾼이다.
미인계를 써서라도 아칼란의 입맛대로, 자신의 입맛대로 부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게다가 에드는 생각보다 잘 생겼다.
“그런 용무라면 저도 시간이 있는데···.”
그런데 에드는 이미 그녀를 지나치고 있었다. 소나가 황당해서 그 뒤를 쫓아갔다.
“이봐요.”
에드는 말을 멈추지 않은 채로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다음에 오라고 했어.”
“진심이에요?”
에드는 그제야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드의 시선이 서늘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내일 찾아와.”
소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돌아섰다.
“그래요. 좋은 시간 보내요. 저는 내일 찾아뵙죠.”
한껏 비아냥거리며 멀어지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에드는 곧 향락가로 시선을 주었다.
“푼순가?”
아칼란 정도 되면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법도 한데 엉뚱한 생각만 하다 자존심이 상해서 간 걸까?
에드는 헐벗은 여인이 서 있는 건물 사이의 골목 앞에서 말을 세웠다. 여인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에드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 가게로 와요! 잘해드릴게.”
“같은 가격에 두 명 어때요?”
에드는 악마의 시대 1에서와 달라지지 않았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검은 화살을 사러 왔다.”
에드의 말에 여인 둘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그녀들은 에드의 뒤편을 살펴보며 물었다.
“몇 개?”
“부러진 화살로 세 개.”
두 여인 중 금발의 여인이 앞으로 나와서 에드의 말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두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저 골목 밖에서 보았을 때는 취객과 호객하는 헐벗은 여인들이 보였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오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문이다. 그리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떡 벌어진 어깨에 강철보다 단단해 보이는 근육. 등에 착용하고 있는 커다란 도끼들까지.
악마의 시대 1에서도 떡밥만 던졌던 야만 전사들이다. 대륙의 북쪽 섬에 산다고 알려진 바다 사나이들.
이 세계로 와서 처음 보는 야만 전사 둘이 곰의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쓴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야만 전사 둘을 지나쳐 문을 두드렸다.
짧게 세 번 두드리자 문이 열렸고 말을 탄 채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니 여인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즐거운 쇼핑 되시기를.”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있는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여인은 더 따라오지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에드는 홀로 말을 몰아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의 끝으로 다가가자 문이 하나 있었다. 이 문은 말을 타고 지나갈 정도는 아니라서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말에서 내린 채 문으로 다가가니 문에는 해골의 머리에 박힌 검은 화살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에드가 문을 밀어보니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지 소리도 나지 않고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방이 나왔다.
책상이 하나 있고, 한 여인이 책상 너머에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는 여인이 에드를 바라보며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시대 1에서 암상을 만나러 왔을 때 모습 그대로다. 척 봐도 스물 정도로 보이는 여인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돈만 있다면 처음에 시작할 때도 오버 파워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곳.
에드의 시선이 여인의 귀로 향했다. 뾰족한 귀.
요정이다.
“부러진 화살 세 개를 주문하셨다죠?”
“그래.”
“제 이름은 아리엔. 어떤 물건을 원하시나요?”
암상에서 부러진 화살 세 개는 최소 금화 백 닢부터 시작하는 물건을 주문할 때 쓰는 암어다.
에드는 이곳에서의 일 년 동안 악착같이 금화를 모았다. 베릴 남작을 만나면서 부족한 분을 모두 채웠기에 암상을 만나러 올 수 있었다.
“화살에 속성을 걸어줄 수 있는 활을 구하고 있다. 물건이 있나?”
아리엔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정도라면 최소 유물급이군요.”
“있어? 없어?”
“있기는 한데···.”
아리엔이 말을 끄는가 싶더니 안경을 올려 쓰고는 말을 이었다.
“두 가지 활이 있어요. 하나는 화염 속성을 더 할 수 있는 염화의 활과 냉기 속성을 더 할 수 있는 빙결의 활이 있죠. 염화의 활은 180골드. 빙결의 활은 200골드에요.”
에드는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젠장, 악착같이 모아서 가지고 온 돈이 120골드 정도였다.
에드는 엘리스가 준 주머니를 꺼내서 던져줬다.
“이건 얼마나 하지?”
아리엔은 주머니에 든 보석을 손바닥 위에 뿌려보더니 안경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빠르게 답했다.
“대충 55골드 정도네요.”
에드는 가방에서 금화를 모두 꺼냈다. 다 합치니 177골드였다.
아리엔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저희는 정찰제입니다.”
3골드가 부족해서 활을 사지 못하니 배알이 뒤틀릴 지경이다. 비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비쌀 줄은 몰랐다.
에드는 한숨을 내쉬고 주섬주섬 가방에 골드와 보석을 쓸어담았다. 돈을 더 모아서 사러 올 생각이었다.
그때 아리엔이 손을 내밀어 에드의 손목을 잡았다.
“다른 좋은 물건도 많아요.”
손목을 잡힌 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한 건 활이라서.”
에드가 손목을 털고 금화를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엔이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악마 사냥꾼 에드. 당신이 맞나요?”
아칼란도 그렇지만 이 암상 녀석들도 보통은 아니다.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서 어찌 저리 잘 아나 모르겠다.
에드가 금화를 거의 회수했을 때 아리엔이 차분하게 말했다.
“의뢰도 받나요?”
“의뢰?”
암상은 좋은 장비를 맞추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일 뿐. 이곳에서 뭔가 퀘스트를 준 적은 없었다.
의뢰가 뭐든 간에 골드는 모두 챙긴 후에 에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암상이 주는 퀘스트라니 궁금해서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아리엔은 에드가 관심을 보이자 이야기를 꺼냈다.
“아인 강에 나타난 수적이 있어요. 쾌속선 하나를 가지고 강을 오가는 배를 털어먹는 수적들이죠.”
에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상은 자체적인 무력도 상당하다. 고작 수적들 따위에게 애를 먹을 이들이 아니다.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영주가 배를 띄우면 기가 막히게 도망갔다가 다시 나타나 상선을 털어먹는 중이죠. 그중에 저희 배도 있었어요. 철저한 호위를 했음에도 호위병이 모두 죽었어요.”
“그런데 그걸 가만 뒀어?”
아리엔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당연히 보복을 위해서 전투단을 불렀죠. 세 척의 배를 이용해 그들을 급습하기 위해서 찾았는데 안개가 짙게 낀 날 오히려 역습을 당해서 전투단이 궤멸 됐어요.”
암상과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그들의 명성과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생각하면 자체 무력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의 전투단이 궤멸했다?
쾌속선에 타고 있는 인원이라고 해봐야 열 명 내외일 텐데? 그들에게 쓸려나갔다니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강하다면 자신이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에게는 자비 없는 죽음을 내리지만,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거절하려고 할 때 아리엔이 말을 이었다.
“전투단의 생존자가 말하길 수적들의 수는 열 명. 모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고 했어요.”
에드는 거절하려던 것을 멈추고 아리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나?”
“물론이에요. 그건 악마에게 홀렸거나 아니면 악마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을 때 드러나는 증상이죠.”
“그걸 알면 내가 아니라 아스트론 교단에 청해야지.”
아리엔이 쓴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아스트론 교단의 손을 빌려서 일을 처리한다면 저희 위신에 문제가 있으니까요.”
악마를 상대하는 데는 성기사가 제격이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복수를 한다면 암상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돈을 주고 자신을 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니까.
악마 중에서 인간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 자들은 적어도 중급 이상의 악마다. 지금까지 사냥해왔던 녀석들과는 격이 다른 자들.
지금 장비로는 잡을 수 없다.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보수는?”
아리엔은 자신의 설명을 듣고 보수를 논하는 에드의 모습에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염화의 활이든 빙결의 활이든 100골드에 팔도록 하죠. 그리고 무한의 화살통도 드리죠.”
“무한의 화살통?”
“정확히 무한이라고는 할 수 없죠. 500발을 담을 수 있는 화살통이에요. 크기나 무게는 일반 화살통과 같죠. 500발을 넣어도 무게의 변화는 없어요.”
악마의 시대 1에는 궁수가 없다 보니 그와 관련된 유물급 무기들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물건이 있는 줄 몰랐다.
“그건 얼마짜린데?”
“30골드 정도 하는데 화살통에 그만큼의 돈을 내는 손님은 드물죠. 하지만 악마 사냥꾼이라면 필수품일 것 같아서요.”
빙결의 활을 택하면 거의 130골드에 달하는 의뢰다. 보수만 따진다면 악마의 시대 1에서도 중후반에나 가야 벌 수 있는 돈이다.
무엇보다 돈으로도 쉽게 못 구하는 장비라는 것이 구미를 당기게 했다.
에드는 가방에서 100골드를 꺼내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신 보수는 선금으로. 빙결의 활과 무한의 화살통을 내주면 잡아주지.”
에드의 말을 들은 아리엔은 잠시 침묵했다.
에드야 의뢰 보수로 선금으로 주면 맡고 아니면 의뢰를 맡을 생각이 없었다. 스탯과 스킬 덕분에 탈 인간급이 되었다고는 하나 악마들은 어차피 탈 인간급인 녀석들이다.
지금 장비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그녀가 말한 장비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리엔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말했다.
“저희 물건을 떼먹은 자들은 끝이 좋지 않았어요.”
“암상 물건을 떼먹을 정도의 강심장은 아니야.”
“좋아요. 대신 수적들을 상대할 때 우리 쪽 인원이 함께할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수적 토벌대는 이미 만들어 뒀어요. 믿을만한 실력자들로 추려놓았었죠.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신에게도 의뢰를 넣는 거예요.”
“용병?”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명성이 있는 용병 넷을 고용했어요. 그들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상대가 악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병 넷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구한 이들이 보통내기들이 아닌가 보다. 자신보다 명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저 립서비스일 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의 각궁과 고급스러운 검은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이 들려 있었다.
빙결의 활이라고 해서 새하얄 거라는 예상을 깨는 검은색의 각궁이었다.
책상 위에 두 개의 장비를 놓고 사내가 나가자 아리엔이 각궁을 들고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걸었다.
화살 위로 새하얀 냉기가 맺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용자의 마력에 따라서 냉기 속성을 걸어줄 횟수와 강도를 정할 수 있어요.”
아리엔은 그렇게 시범만 보이고는 활과 화살을 내려놓았다. 아리엔이 눈짓으로 권하는 것을 보고 에드는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잡아보니 알겠다.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다.
천천히 시위를 당겨보니 장력도 전에 쓰던 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름 명품인 활이었는데 비교도 안 된다.
잠시 정신을 집중하니 마력이 빠져나가며 화살에 냉기가 맺혔다. 그것까지 확인한 에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수적들의 머리를 잘라오면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