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39화 (239/250)

<목을 베다. (5)>

* * *

이은하 기자와 헤어진 후 서진은 집으로 들어왔다.

책꽂이를 열어 두고 원래의 서진이 적었던 글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

‘넌 뭘 봤던 거냐…….’

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모든 것을 막았다. 재정건설에 뻗힌 검은손을 폭로하며 자금줄을 끊었고 엄 회장의 재산 은닉에 도움을 주며 기대하던 금덩이를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검의 검사와 조우재 부장검사를 포섭하며 김영준 총장의 손과 발을 찢어 버렸다.

이제 백기호 의원을 무너뜨리면 비빌 언덕조차 무너지게 된다. 엄 회장이 했던 말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혼자 맞아야 하는 거다.

‘김영준은 끝이야.’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김영준 총장에게는 아직 세력이 있다. 김영준 총장에게 약점을 잡혀 마지못해 따르는 정치인들, 언론인들 그리고 재력가들.

게다가 김영준 총장이 무서운 점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가진 것 하나 없이 절벽을 기어올라 정상에 섰다는 것. 놈은 작은 틈만 보여도 좀비처럼 되살아날 거다.

두 번째로 김영준 총장의 성격은 서진의 상상을 벗어나 있다.

‘놈은…….’

김윤환이 아들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도 냉철했다. 엄시영이 잡혀 들어갈 때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부모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강하게 들고 있다.

‘필요한 게 있다면, 피붙이라도 죽이고 이용한다는 그 마음가짐…….’

그렇기 때문에 서진은 김영준 총장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있다. 손가락 하나로 톡 건드려 떨어뜨려 죽일 수 있을 때까지 몰아붙이는 중이다. 그래야 김영준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발악의 현장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넌 무엇을 알고 있던 거야?’

서진은 원래의 서진이 적은 글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 글이 꼭 원래의 서진이 지금의 서진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완의 편지는 서진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

서진이 몸을 틀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손에 들고 신지연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이어서 휴대폰을 귀에 대며 입을 열었다.

“뵙고 싶은데요.”

-지금?

* * *

잠시 후, 서진은 신지연의 상가에 서 있었다.

이제 뜨거운 여름이 지났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때, 뒤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맥주 사 왔는데?”

신지연이 서진에게 맥주를 건네며 옆에 섰다. 그녀가 캔을 뜯으며 말을 이었다.

“압수 수색, 언제 올 거야? 몰래 준비한 자료 숨겨 놓기 힘들어. 어서 와서 가져가.”

신지연은 서진의 연락을 받은 후, 신마그룹이 백기호 의원과 그 일당에게 건넨 뇌물 증거를 챙기고 있었다.

“많나요?”

“수십 박스 되는 것 같던데?”

“힘 좀 쓰는 수사관 대동해야겠네요.”

“알겠지만, 우리 오빠를 쉽게 잡기는 힘들 거야. 걸린다 해도 대신 감옥에 가 줄 사람이 많으니까.”

신지연은 우려하고 있다. 그녀 역시 이번 판에 목숨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빠를 베어야 그녀가 왕좌에 앉을 수 있다. 왕좌에 앉지 못한 왕의 자식이 향할 미래는 뻔하다.

하지만 서진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백기호가 걸려 있으면, 어쩌지 못할 겁니다. 대선 후보한테 뇌물을 건네는데, 일개 직원이 딸랑이를 흔들었을까요?”

“자신감 넘치는 모습, 마음에 들어.”

서진이 신지연을 향해 천천히 몸을 틀며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

“약 40년 전, 국가 정책으로 원주에 아파트를 지었어요. 시공사가 신마건설이었고요. 그 부근에 신마리조트도 들어섰죠.”

“그런데?”

“토지 보상 문제로 시끄러웠고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신지연의 시선이 천천히 서진을 향해 틀어졌다. 서진이 그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 일로 지금의 신마건설까지 뒤흔들 생각은 없어요. 단지…… 그 당시에 함께했던 용역, 그 깡패 새끼들이 누군지 궁금한 거죠.”

신지연이 슬며시 웃었다.

“어마? 우리 신마그룹을 정말 높게 쳐주는구나? 그렇게 오래된 일의 기록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있었다 해도 다 폐기되었을 거야.”

“회사의 뒷일을 처리하는 별정직이 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임원진도 모르는 자들, 가족들끼리 공유하는 자들…….”

“음모론이야. 그런 것 없어.”

신지연은 잡아뗐다. 하지만 서진이 그녀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세상에는 별일이 다 있죠. 그리고 깡패 새끼들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놈이죠.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를 위해 신마그룹은 놈들의 인적 사항을 개별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죠. 그놈들이 뒤통수를 치려 할 때, 그 가족을 인질로 삼으려고요. 알고 있으니까, 음모론으로 치부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신지연의 붉은 입술이 뒤틀렸다. 그리고 더 잡아떼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어떻게 알았어?”

“뭐…… 저도 나름의 정보력이란 게 있어서요.”

서준경이었던 시절, 신마그룹을 치기 위해 조사했던 거다.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신지연의 시선이 도심의 야경으로 틀어졌다. 고심하는 거다. 서진을 돕는 게 이득이 될지, 아닐지.

그리고 그 고민은 잠시였다.

“알았어. 줄게.”

“감사합니다.”

“대신,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

“……네?”

같이 있어 달라니, 서진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신지연이 깔깔 웃었다.

“이상한 생각 했구나? 이 누나가 동생을 건들겠어? 걱정하지 마.”

“……그럼요?”

“아무리 오빠가 미워도 내 친오빠야. 마음이 편할 수 없어. 그러니까 술 한잔 같이해.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동생밖에 없어.”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신지연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재벌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쓸쓸해 보였다.

서진이 캔 맥주를 우그러뜨린 후 준비한 쓰레기통에 버리며 대답했다.

“치킨 좋아하세요? 근처에 닭 잘 튀기는 집이 있는데요.”

* * *

며칠 후.

서진은 신지연에게 온 메일을 확인했다.

당시 일을 맡겼던 자들의 이름.

서진은 그 명단을 인쇄해서 이동영 수사관에게 건넸다.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영 수사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명단에 적힌 조직을 눈으로 살폈다.

“깡패들인가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일단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동영 수사관이 팔을 걷어붙였다.

* * *

‘박정길…….’

이동영 수사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 옛날, 신마그룹의 지원을 받고 농민들을 짓밟았던 깡패 조직을 이끌었던 남자. 놈은 범죄와의 전쟁 이후 경호 회사로 둔갑해 선량한 척 살아왔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 업계에서 물러난 후 유유자적 살다가 몇 년 전 실종됐다.

‘그 시기가…….’

박정길이란 놈은 그때 일어났던 모든 범죄를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실종된 시기와 서진의 낙사 사고의 때가 묘하게 겹쳐진다.

‘뭔가 있어.’

서진은 거침없이 핸들을 틀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송파의 대단지 아파트였다. 재개발이 되어 지금은 화려하게 바뀐 곳.

서진은 단지 내 상가의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 두 잔을 주문한 후 테이블에 앉았다.

조금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김서진 검사님?”

남자는 실종된 박정길의 아들이다. 깡패의 아들이지만 평범히 살고 있다.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 후 자영업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남자는 긴장된 시선으로 마주 앉으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중앙지검의 검사가 찾아왔으니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진은 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다른 게 아니라, 아버님의 실종 사건 때문에 여쭤볼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서진은 박정길과 같은 깡패를 잘 알고 있다. 기업 또는 정치인과 함께 일하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한 짓을 기록해 두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위기에 몰릴 것을 대비해서 자식 등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그 기록을 남겨둔다.

그런데…….

“아, 아버지를 찾았나요?”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목소리가 떨려 왔고 손이 파르르 흔들린다. 그런데 그 표정에 반가움보다는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이 느껴지고 있다.

서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하다. 저 눈은 아버지를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다.

‘뭐지?’

서진의 머릿속에 의심스러운 상황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박정길의 실종 뒤에 앞에 앉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세상, 남자가 박정길의 실종에 관여했다 해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서진은 당장 그 의문을 파헤치지 않았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저도 그 일이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최근에 노인 실종 사건이 많아졌거든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실종된 이후로요. 그래서 몇 가지 여쭙고 싶은데, 혹시 실종되시기 전에 어떤 징후가 있었나요?”

서진의 대답과 동시에 남자는 긴장된 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아뇨, 없었어요. 정신도 기력도 말짱하신 분이라 그런 걱정은 한 적이 없어요. 다만…… 술을 많이 드셔서, 거기에 대한 걱정은 좀 했었죠.”

남자는 뭔가 숨기고 있다. 술이라는 단어를 넌지시 내뱉으며, 가족 간의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서진은 일단 남자의 의도를 따라 주기로 했다.

“술요?”

“네, 그 연세에도 하루 두 병은 드셨으니까요. 그날도 그랬어요. 술 좀 그만 드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졌고……. 아시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거칠게 살아온 분이거든요.”

“그래서, 싸우고 나가신 뒤 연락이 끊겼다는 것인가요?”

“……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괴로워하는 표정을 연기하는 게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난다.

서진은 그 모습을 보며 두 가지를 예상했다.

-누군가가 알려 준 시나리오.

-아들은 그 시나리오를 교과서처럼 내뱉는 앵무새.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거칠게 살아오셨다면, 어떤 일을 하셨죠?”

“……아, 그…… 조직폭력배 같은 거요.”

질문에 답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수치스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혐오감의 표정이 동시에 나타났다.

수치스러움은 아버지의 옛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거다. 두려움의 눈빛을 보면 어릴 적에 당했던 가정 학대를 예상해 볼 수 있다. 혐오감은 노인이 되어서도 술과 담배로 찌들어 사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다.

‘관련 있어.’

남자가 박정길의 실종에 관련되어 있다는 예상은 이제 확신에 가까워졌다.

서진이 그 모든 표정을 눈에 담으며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질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한다. 장지혁 검사다.

“잠시만요.”

서진은 몸을 일으킨 후 커피숍에서 벗어나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네, 검사님.”

-총장이 날 호출했거든?

“원주 가는 것에 대해 물어볼 거예요. 적당히 얼버무리면…….”

서진은 대답하며 힐끗 창 안쪽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뭔가 급한 행동을 보인다.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아래로 숨긴 후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다시 전화드릴게요.”

서진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종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화들짝 놀란다. 휴대폰을 급히 감추려는 것 같다. 서진이 그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남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주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긴박했다. 엿 됐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진의 손을 잡고 휴대폰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서진의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 * *

“아시겠지만 그쪽의 아버지, 박정길 씨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을 협박했고 폭행했으며 살해한 적도 있죠.”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묵직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이어진다.

“지금도 술을 마시면 행패를 부리고 동네 사람과 싸우고……. 얼굴을 보니까, 지금도 아버지가 찾아와 손찌검을 하는 것 같네요.”

남자의 뺨에 멍이 들어 있었다. 낡은 안경은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맞은 거다.

마주 앉은 상대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리죠. 하나는 아버님의 죄가 폭로되는 겁니다. 깡패였다. 살인자였다. 그게 알려지면,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게 되겠죠. 이 동네에서 살 수는 없을 겁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춘기에 상처가 크겠네요. 어쩌면 따돌림을 받을 수도 있고요.”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주 앉은 상대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두,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가난을 극복하게 해 드리죠. 낡은 주택가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조건이 있어요. 박정길 씨가 숨겨 둔 게 있을 겁니다. 그걸 가져와 주세요.”

남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움직였다. 박정길이 무엇을 숨겼는지, 떠올리려 하는 거다. 하지만 기억나는 게 없다. 박정길은 그저 술 먹고 행패를 부렸을 뿐이다.

그때, 상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아버지를 제게 넘기세요. 해코지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요양원에 모셔 둘 생각입니다. 공기도 좋은 곳이니, 술을 끊기에는 제격이겠네요.”

“아, 아무리 그래도…….”

“20억.”

남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 앞에 앉은 상대는 김영준 총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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