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38화 (238/250)

<목을 베다. (4)>

* * *

그 시각, 서진은 송파의 한 커피숍에서 도광현을 만나고 있었다.

“뒤는 밟았고?”

“네, 장석민 있잖아요? 일 잘하던데요?”

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압수 수색 계획을 엄 회장에게 알렸다. 그리고 가진 재산을 숨기라는 뜻도 전했다.

엄 회장은 서진의 말을 따랐다. 바삐 움직였고 재산을 은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급한 행동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도광현은 장석민을 통해 엄 회장이 누구를 통해 재산을 은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도광현이 팔을 쭉 기지개 켜며 말을 이었다.

“검사님이 나서실 때예요.”

엄 회장의 재산 은닉을 주도했던 인물은 비서였다.

이제 비서를 포섭할 시간이다.

비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13년의 시간 동안 엄 회장의 곁을 24시간 함께한 여자.

쉽지는 않겠지만 그녀를 포섭해서 엄 회장의 재산을 손에 얻으면.

“그때는 제가 움직여야죠. 해외로 나간 자금을 세탁하고 다시 한국에 가져오는 것. 이렇게 외화벌이를 잘하는데, 누가 상 안 주나요?”

도광현이 낄낄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커피 잔을 내려 두며 중얼거렸다.

“그럼 제 목표인 사모펀드 포이블도 저절로 무너지겠죠.”

도광현의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모펀드 포이블, 그들은 일본계로 알려졌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엄 회장의 자본으로 채워져 있다.

그 모든 게 빼앗으면 도광현은 원했던 복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엄 회장의 재산을 노리던 김영준 총장은 닭 쫓던 개가 되는 거다.

“얼마 남지 않았어.”

서진이 슬쩍 웃으며 말할 때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는 엄 회장이다.

“네, 회장님.”

-자네 때문에 한시름 놨어. 그래서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저녁 어떤가?

서진은 엄 회장의 모든 재산을 집어삼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놈은 평생 서민의 삶을 뜯어먹으며 살아온 기생충,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놈은 서진에게 고맙다고 한다. 밥을 사 주겠다는 말까지 내뱉고 있다. 이럴 때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연락하지.

서진이 휴대폰을 내려 두며 도광현을 향했다. 그러자 도광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말씀하세요.”

“장석민한테 연락해서 그동안 모은 비서의 자료…… 전부 가지고 오라고 해.”

* * *

그날 밤. 호텔의 레스토랑, 그 VIP룸.

서진은 엄 회장과 마주 앉았다.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 가득하다. 엄 회장은 서진이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서 다 시켰다고 한다.

“통장에 12만 원 있는 분이라고 들었는데요.”

검찰의 압수 수색이 벌어진 후, 엄 회장은 자신의 통장에 12만 원밖에 없다고 떠들었다. 그 말을 서진이 장난스럽게 건네자 엄 회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거 사실이야. 나온 연금 다 털어서 사는 거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게.”

“그럼, 잘 먹겠습니다.”

서진이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을 때였다. 엄 회장이 술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영준이, 지금껏 제 뜻대로 살아온 놈이야.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며 살아왔어. 그리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이뤄 냈지.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게 엎어지고 말았으니…… 화가 많이 났을 거야.”

“…….”

“그런데 걱정이 돼. 만약에, 정말 만약에 놈이 이걸 이겨 내면, 어떤 보복을 할까? 그놈은 당한 걸 잊지 않고 사는 놈이거든.”

엄 회장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말이 심상치 않다. 서진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엄 회장이 손뼉을 짝 쳤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온다. 그녀가 서진의 앞에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 뒀다.

“뭐죠?”

“백기호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총이야.”

“……?”

서진이 서류 봉투를 손에 쥐었다.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봉투 안에 백기호의 비리가 들어 있는 거다.

엄 회장이 늙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백기호에게 딸이 하나 있어. 자네도 알 거야, 이소희라고. 그 애가 백기호가 숨겨 둔 자식이지.”

서진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백기호 의원과 이소희에 대한 자료다.

“그걸 세상에 공개해. 그럼 백기호는 대통령이 될 수 없어. 김영준이 비빌 곳도 자연스레 사라지는 게지.”

서진의 눈동자가 서류에 붙은 이소희의 얼굴로 향했다.

이소희가 터지면, 백기호 의원은 반드시 무너진다. 하지만 이소희도 한국에서 살 수 없다. 그녀가 지금껏 노력해서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김영준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두 맞게 될 거야.”

엄 회장은 서진이 저 자료를 당장 공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다음은 엄 회장의 뜻대로 흘러갈 거다.

세상은 정치인의 바지 벗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출생의 비밀에 환장한다.

그렇게 백기호 의원이 무너지면 김영준 총장은 결국 자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애원할 거다.

게다가 위험 요소도 없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엄 회장은 어떤 일에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 천둥벌거숭이 같은 서진이 날뛰었을 뿐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장사치가 얻는 법, 세상살이가 그런 거다.

‘그럼, 된 거야.’

엄 회장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그런데 서진은 엄 회장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서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네요.”

“……!”

이소희는 서녀로 태어나 힘겹게 살아왔다. 평생 고개 숙인 채, 자신감 없이 행동했다. 지금에 와서야 행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다. 그런 이소희를 버릴 수 없었다.

“백기호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제 친구네요.”

서진이 서류를 좍좍 찢었다.

엄 회장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서진을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찢었습니다.”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한가?”

“네.”

서진의 건조한 목소리에 엄 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가르치듯 입을 열었다.

“그런 시답잖은 감정을 신경 쓰면 김영준과 백기호를 잡을 수 없어. 자네는 칼을 든 상대를 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아. 그런데 총을 쏘는 게 비겁한 거라 외치고 있나? 맨손으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서진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손에 든 종이 쪼가리를 바닥에 툭 버리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백기호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작은아버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그 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백기호도 알고 있죠. 그런데 백기호가 대비를 안 했을까요?”

서진이 엄 회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말씀드렸었습니다. 간 보지 마시고, 요리를 하자고.”

“……!”

“제 손에 백기호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것을 쥐여 주세요. 그럼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겠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서진의 눈빛에 엄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서진은 상관 않고 목소리를 이어 갔다.

“백기호 의원은 대학 시절부터 신마그룹에서 용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그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넘겨주세요.”

“자네…….”

엄 회장이 망설였다. 서진이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칼을 들고 달려오는 중이에요. 그런데 손에 쥔 총을 쏠까 말까 고민하고 계시네요. 그거……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제가 예측 하나 하죠. 백기호가 대통령이 되면, 회장님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엄 회장의 입술이 꽉 닫혔다. 서진은 엄 회장의 살벌한 눈을 마주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신마그룹의 지분을 조금 가졌다고, 그거 흔들어서 목숨을 구걸할 생각을 하고 계시나요? 회장님을 살려 주는 사람에게 지분 준다는 말을 하면서요?”

“건방진!”

순간, 서진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청사진은 찢어 버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신마그룹은 지금 자식들이 왕자의난을 벌이고 있어요. 회장님이 지분을 흔드는 순간 가장 먼저 쳐 낼 겁니다. 굶주린 개처럼 달려들어 물어뜯겠죠.”

“……!”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엄 회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손이 바르르 떨린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엄 회장이 지시만 하면 언제든 서진을 내쫓겠다는 눈빛이다.

그런데 엄 회장이 손을 뻗어 비서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놈이 요구하는 것, 가져와.”

비서는 멈칫거렸다.

지금 서진의 요구를 들어주면, 엄 회장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백기호 의원과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거다. 그럼 백기호 의원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회장님, 잘못하면…….”

비서는 말렸다.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단순 미움받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손바닥을 비비며 변명을 하고 돈을 내밀면 놈들이 봐줄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싸움을 걸면…….

하지만 엄 회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사는 게 우선이야.”

“알겠습니다.”

비서가 몸을 틀어 방을 나가자 서진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서진은 VIP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앞서 걷는 비서의 옆에 섰다.

“밤이고 낮이고 24시간 회장님과 함께 있는 것 같은데, 언제 혼자 있습니까?”

비서의 시선이 서진에게 틀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묻고 있는 눈빛이다. 서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최지범처럼 버려지고 싶지는 않잖아요?”

비서의 걸음이 뚝 멎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진을 노려본다.

“검사님, 혹시라도 제가 배신할 거란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임신하신 것 같은데…….”

“……!”

비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서진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사실을 엄시영이나 엄선주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비서가 입술을 씹을 때, 서진은 빙긋이 웃으며 그녀의 옆을 스쳤다.

“연락 주세요. 긴 시간은 못 드립니다. 이틀 후에 작은어머니 면회를 가거든요. 내가 입이 가벼워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네요.”

서진은 손을 흔들며 화장실로 향했지만 비서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서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저녁, 집 근처의 순댓국집이었다.

서진의 앞에는 이은하 기자가 앉아 있었다.

서진이 장부를 내밀며 말했다.

“터뜨릴 수 있을까요?”

서류를 받아 넘기던 이은하 기자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장부에는 백기호 의원이 신마그룹에서 받아 온 용돈이 적혀 있다. 그것은 엄 회장이 신마그룹의 관계자에게 큰돈을 써서 얻어 낸 것.

“청렴결백한 판사, 대쪽 판사라는 가식적인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이죠.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도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을 거예요. 자신의 이득과 신마그룹을 위해 그 한 몸 희생하겠죠.”

이은하 기자는 말없이 서류를 착착 넘겼다. 그리고 고민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수 될 각오로 쓰면 되긴 할 거예요.”

“그럼, 써 주세요. 백수 되시면, 제가 지금보다 훨씬 괜찮은 조건의 언론을 소개해 드릴게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뭐죠?”

“백기호 의원이 인정하지 않으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커요.”

대선 기간이다. 여야의 정치인은 물론이고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도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싸워 댄다.

백기호 의원의 그 어떤 더러운 모습을 밝혀내도 그를 향한 신앙과 같은 지지율은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걱정으로 가득한 이은하 기자의 표정과 달리 서진은 느긋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신마그룹에서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네?”

이은하 기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신마그룹은 뇌물을 공급한 곳, 그 죄를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다. 일반 범죄자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재벌이란 자들이 인정할 리는 절대 없다. 그런데 서진은 당연히 그럴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무슨 근거로요?”

서진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이은하 기자에게 넘겼다.

“들어 보세요.”

통화 내용을 녹음한 파일, 이은하 기자가 이어폰을 귀에 대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서진과 신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해. 나야 고맙지. 우리 동생, 밥 한번 사 줘야겠네?

서진은 이은하 기자를 만나기 전 신지연과 통화했다. 그리고 신지연은 백기호 의원의 뇌물 사건에 적극 찬성했다.

검찰이 여론을 등에 업은 채 백기호 의원과 신마그룹을 휩쓸면, 그녀의 오빠 역시 멀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신지연은 회장의 자리에 가까워진다.

통화 내용을 들은 이은하 기자가 입을 크게 벌리며 중얼거렸다.

“시, 신지연 사장을 알아요?”

“저도 부잣집 도련님이잖아요.”

서진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하자 이은하 기자는 눈을 깜빡였다.

서진이 다시 서류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가능할까요?”

“……가능하죠. 아니, 가능한 게 아니라 백기호는 끝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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