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20화 (220/250)

<기억하고 있다 (6)>

김영준 총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러자 대통령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늦은 시각인데, 안 주무셨나 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놀리는 것 같은 말투.

김영준 총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목소리는 느긋하다.

“거짓으로 시끄러운데,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거짓이다? 사실이 아니다?

“네.”

김영준 총장은 말했다.

30년 전의 일이다.

아내는 약 10년 전 그 땅을 매입했고 사건과는 연관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을 들은 비서실장 최서우가 낮게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사실로 확인시켜 주십시오. 범행 도구에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흔이 있다고 하네요. 유전자 검사만 하면 깔끔하게 끝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

-대통령님께서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하루빨리 논란을 벗고 업무에 집중하셔야죠.

통화가 종료됐다.

그런데 또 휴대폰이 진동한다.

이번엔 백기호 의원이다.

-……터졌네요?

백기호 의원은 엄시영의 친정이 사채업자 집안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엄선주와 손잡고 금융 범죄를 저지르고 있던 것도 파악한 상태.

그리고 김영준 총장은 백기호 의원의 딸 이소희를 안다.

그것이 손을 잡을 수 있던 이유다.

“어떻게 할까요?”

김영준 총장은 백기호 의원을 믿고 있었다. 김영준 총장은 혼자 죽지 않는다. 백기호 의원이 살기 위해선 김영준 총장을 끄집어내야 한다.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에요. 가볍게 무시하세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며칠 짖어 대다 조용해질 거라고요.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장수를 잡으려면 달리는 말부터 쏘아 죽이는 게 당연한 거죠. 대선을 앞두고 네거티브가 시작됐다고 생각하세요.

통화가 종료됐다.

김영준 총장이 입술을 씹었다.

“장수를 잡으려면 달리는 말부터 쏜다고?”

백기호 의원은 자신을 장수로 김영준 총장을 말로 비유했다. 이번 사건으로 상하 관계를 정립한 거다.

그리고 말은 언제든 갈아 탈 수 있다.

김영준 총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시선을 틀었다.

엄시영이 기겁한 눈으로 김영준 총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왜, 이런 일이…….”

김영준 총장이 엄시영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엄시영의 어깨를 양손으로 가볍게 쥐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 한 번 더 찾아가.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라고 해. 국과수 원장부터 살인자를 맡을 대역까지, 전부 살피라고 말해.”

“……!”

“청와대는 날 겨냥했어. 백기호는 언제든 손을 뗄 수 있어. 이 사건……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어.”

김영준 총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시영의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아버지가 발 벗고 나서야 해.”

***

엄 회장의 자택, 서재였다.

엄 회장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서늘하다.

“그래서? 배우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네.”

엄회장의 뒤에는 최지범이 서 있었다.

잔뜩 죄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국과수 원장은 뭐라고 하나?”

“별말 없습니다. 아마 우리 뜻을 따를 것 같습니다.”

“청와대까지 나섰다는데, 아마?”

“확인해 보겠습니다.”

엄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틀어 최지범을 바라봤다.

“최 실장…… 나하고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자네 눈가에도 주름이 자글거려.”

“…….”

“자네 젊을 때가 기억나. 고생이 많았어. 추심하겠다고 뛰어다니고. 지시받은 일이 있으면 몇 달 동안 집에도 안 들어가고.”

최지범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엄 회장의 이어질 말이 예측되지 않아서다.

그리고 엄 회장이 최지범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최지범이 다급히 허리를 굽혔다.

“앞으로는 더 살뜰히 살피겠습니다!”

앞에 선 엄 회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최지범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탓에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내일 하루는 출근하지 말고 가족들이랑 함께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회, 회장님…….”

“앞으로 며칠 동안 바쁠 게야. 내 자식들 저지른 짓, 자네가 닦아 줘야지 누가 닦겠나?”

엄 회장이 품에서 두둑한 봉투를 꺼내 최지범의 손에 건넸다. 그리고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자네만 믿고 있어.”

“가, 감사합니다.”

최지범의 얼굴이 상기됐다. 실수를 저질렀는데, 더한 신뢰를 느꼈기 때문이다.

엄 회장이 최지범의 팔을 툭 쳤다.

“퇴근해. 며칠 동안 가족 얼굴 보기 힘들 거야. 내일 실컷 보고 오도록 해.”

최지범이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며 서재를 떠났다.

그러자 엄 회장이 의자에 앉으며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손 실장 오라고 해.”

잠시 후, 끼익 문소리가 들리며 손 실장이라 불린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30대 중반의 외모, 손 실장이 엄 회장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내일 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최 실장은 내 밑에서 30년을 넘게 있었어. 가족이랑 작별 인사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나? 모레로 잡아.”

“알겠습니다.”

손 실장이 떠났다.

엄 회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이제 나와.”

말과 동시에 서재의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더니, 그곳에서 엄시영이 걸어 나왔다.

엄 회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최지범은 유서를 쓰고 자살할 거야. 유서에는 너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할 테고. 너에 대한 혐의는 종결될 거야. 아비가 그렇게 만들어 주마.”

“고마워요.”

“시영아…… 이제 죽은 놈 놓아주고 김 서방 손잡아.”

“아빠…….”

“김 서방 그놈은 이 아비의 도움이 없었어도 거기까지 올라갔을 거야.”

엄 회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엄시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그놈은 나와 똑같아. 키우던 개를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놈이야. 곁에 있던 사람을 버리고, 아래에 있는 사람을 짓밟고,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릴 수 있는 놈이야.”

“…….”

“이 아비가 죽어도 그놈이 너를 최고의 자리로 올려 줄 거야. 시영아, 이제 김 서방의 손을 잡아. 그래야 선주와 네 인생이 평안할 거야.”

엄 회장은 이제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다. 마지막을 바라보는 삶, 자식들의 행복만 바라고 있었다.

***

다음 날.

최지범은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후 집에 앉아 있었다.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주상 복합 아파트의 최상층.

“어쩐 일에요? 시간이 다 나고.”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하루 휴가 받은 거야.”

“회장님이?”

“어.”

외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면 아들과 딸은 시큰둥하다.

주말을 맞이해 친구들과 놀고 싶었는데, 갑작스레 최지범이 불러냈기 때문이다.

최지범이 자식들의 표정을 보며 끌끌 웃었다.

“민우야, 여자 친구하고는 언제 결혼할 거야? 어서 해. 아빠가 서초동에 괜찮은 아파트 봐 뒀으니까.”

“정말요?”

동시에 최지범의 딸이 살가운 표정으로 옆에 앉았다.

“아빠, 민우만 줄 거야? 나는?”

지금껏, 시큰둥했던 녀석들인데 재산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반짝인다.

딸이 최지범의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아빠, 난 한강 보는 게 좋은데. 백화점 가까우면 더 좋고.”

“압구정동?”

딸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하지만 최지범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어? 지금? 알았어.”

최지범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과일을 내오던 아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요?”

“아, 잠깐 앞에. 회사 후배 놈이 급한 일이 있다네. 금방 올게.”

최지범은 아내에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벗어났다.

***

“어쩐 일이야?”

최지범이 담배를 물며 손 실장에게 다가왔다.

손 실장은 엄 회장의 지시를 받고 온 사람.

손 실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오늘 쉬는 날인 거 아는데…….”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요.”

“문제?”

“애들이 추심하다가 채무자를 죽여 버렸네요. 적당히 버릴 수 없는 게 채무자 새끼가 우리 만나러 온다는 것을 사방팔방 알려서…….”

최지범의 인상이 구겨졌다.

“현장은?”

“사무실요.”

“일단 체격 비슷한 놈으로 배우 만들어.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오는 모습 CCTV에 찍히게 해. 그다음에…… 아니다. 같이 가자.”

최지범이 손 실장의 차에 올랐다.

지시만 내려도 괜찮지만, 직접 현장에 가서 대응 방법을 알려 주려는 거다.

최지범의 나이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 후임자에 대한 확실한 교육이 엄 회장을 위한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차량의 문이 탁 닫힐 때, 손 실장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

“왜…… 왜 그러는 거야!”

잠시 후, 한 빌딩의 옥상.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 최지범이 두려움 가득한 표정과 함께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앞에는 손 실장과 십여 명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보였다.

손 실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최지범 실장님…… 우리 원망하지 마세요. 다 회장님의 지시니까요.”

“……!”

“유언도 이미 작성했어요. 내용은 대충 아시죠? 회장님과 회장님의 따님을 위해 모든 죄를 안고 가시는 겁니다.”

남자들이 최지범을 향해 다가갔고 최지범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최지범은 더 물러설 수 없었다.

등에 난간이 닿았기 때문이다.

거친 바람이 최지범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손 실장이 그 앞에 서서 장난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직접 떨어지면 고맙고.”

“제발…… 살려 줘! 제발!”

“아이고…… 지금껏 최지범 실장님 앞에서 살려 달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새끼들이 몇 명입니까? 그 애들 전부 살려 줬습니까?”

“손 실장!”

“최지범 실장님은 그 새끼들 모두 죽였고. 장기도 팔아먹고. 그랬잖아요?”

“주, 죽었다고 보고해. 쥐 죽은 듯이 살게!”

손 실장이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최지범 실장님…… 우리가 왜 강남의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겠어요? 여기서 떨어져 죽어야 모두가 알잖아요. 뉴스에도 크게 나고. 사람들도 많이 보고! 그러니까, 이제 죽어라.”

손 실장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자들이 최지범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최지범은 시선을 틀어 빌딩 아래를 바라봤다.

아찔하다.

떨어지면 반드시 사망이다.

최지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온몸이 바들바들 흔들렸다.

30년을 넘게 충성해 온 대가는 죽음이다.

가족과 먹었던 외식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엄동석 이 개새끼야!”

최지범이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엄 회장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손 실장, 씨발! 넌 끝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내 꼴이 될 거야!”

손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람은 어차피 죽어요. 죽기 전에 한강 보이는 주상 복합 아파트. 그것도 펜트하우스에서 살아 보렵니다.”

검은 양복들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놈들이 최지범의 몸을 움켜잡았다.

그때였다.

잠겨 있던 옥상의 문이 ‘꽈지직!’ 소리와 함께 부서지며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옥상의 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해머를 든 서진이 서 있었다.

“헤이!”

서진이 십여 명의 사내와 손 실장 그리고 최지범을 보며 웃었다.

손 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 누구야?”

“나? 검사.”

“……검사?”

어두운 옥상에서 얼굴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서진이 놈들을 향해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최지범…… 그 사람, 우리 중요한 참고인인데?”

손 실장이 낄낄 웃었다.

“우리가 검사를 무서워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 말과 동시에 서진이 해머를 바닥에 꽝, 찍었다. 그리고 서슬 퍼런 눈으로 손 실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죄를 지었으면 무서워해야지.”

“야, 저 새끼부터 잡아.”

손 실장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할 때였다. 서진의 뒤에서 남자들이 들어온다.

열 명, 스무 명 계속해서.

절대 수사관의 모습은 아니다. 딱 봐도 깡패.

장석민의 부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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