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19화 (219/250)

<기억하고 있다 (5)>

“작은어머니…….”

“아니라고! 너 나 못 믿어?”

엄시영은 끝까지 부정했다. 하지만 서진은 엄시영이 이렇게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빠른 목소리로 최대한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당에서 움직였어요! 작은어머니를 시작으로 작은아버지, 백기호 의원까지 물고 들어갈 거예요!”

“아니라고! 아아아악!”

엄시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악을 질러 댔다. 그리고 번뜩거리는 눈으로 서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진아, 너 나 믿지? 언론사에 있다는 그 사람 누구야? 연락해. 그래서…….”

“작은어머니! 지금은…….”

“말해! 말하라고! 당장 멈추라고 해!”

길길이 날뛰는 모습,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

그때 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는 김영준 총장, 그 건조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회의 중이라 받지 못했어. 무슨 일이지?

“자, 작은아버지 그게…….”

순간, 서진의 휴대폰을 엄시영이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보…… 내가 살인자래.”

-……그게 무슨 소리야?

김영준 총장의 목소리에 긴장이 가득했다.

하지만 엄시영은 제정신이 아니다.

술에 취했고 벼랑 끝에 몰렸다. 논리적인 말을 하지 못한 채 비명처럼 소리를 지를 뿐이다.

“저 미친 새끼들이 내가 살인자래!”

“작은어머니!”

서진이 벼락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엄시영이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서진에게 휴대폰을 전했다.

서진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상황을 설명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변사체를 다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체가 나온 곳이 작은어머니가 소유한…….”

전화가 뚝 끊어졌다.

김영준 총장은 서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언론사에 연락해 상황을 파악하고 압력을 넣어 보도를 멈추게 할 생각인 거다.

하지만.

‘몰락은 시작됐어.’

서진은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애써 숨긴 채 엄시영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작은어머니…… 사실인가요?”

엄시영이 매서운 눈으로 서진을 노려보더니 살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니라고 했잖아.”

“……정말 아니죠?”

“아니야.”

“사실을 알고 있어야, 상황을 잠재울 수 있어요.”

“몇 번을 말해!”

엄시영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다. 칼이 있다면 그 분노를 서진에게 표출할 것만 같다.

서진이 그 눈빛을 마주하며 걱정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당에서 작은어머니께 유전자 검사를 요구할 거예요.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기 때문에 굳이 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하셨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하는 게 의혹을 푸는 일이니까요.”

“나가.”

서진이 엄시영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엄시영이 고개를 틀어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치워요.”

분명 자신이 집어 던지고 부순 거다. 하지만 엄시영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아주머니가 엄시영의 눈치를 보며 다가와 주섬주섬 유리 조각을 청소했다.

엄시영은 그런 아주머니를 내려다보다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모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아주머니가 부서진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엄시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휴대폰을 바라봤다.

저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직접 사용했지만 그 오랜 시간 어떤 정보가 스며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엄시영은 벼랑 끝으로 몰린 상태, 저런 증거품은 없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버려요.”

엄시영은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은 뒤 2층으로 올라갔다.

***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날 밤, 서진과 장지혁 검사는 김영준 총장의 집 근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일 도와주시는 분이 하루에 한 번씩 쓰레기통을 비우거든요. 조금이라도 쓰레기가 차 있으면 작은어머니가 난리를 피워서요.”

“그건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아오! 냄새!”

서진과 장지혁 검사는 엄시영의 휴대폰을 찾고 있었다.

서진은 그 집을 빠져나오며 거실의 상태를 확인했고 부서진 휴대폰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버렸을 거예요, 분명히.”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여당은 어떻게든 수사를 하려 할 거다. DNA 검사를 하라며 으름장을 놓을 테고 어쩌면 휴대폰을 털 수도 있다.

“증거를 인멸해야 하니까요.”

서진과 장지혁 검사는 계속해서 쓰레기봉투를 뒤졌다.

그리고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이거지?”

장지혁 검사가 부서진 휴대폰을 손에 들며 껄껄껄 웃었다.

“난 왜 이게 금덩어리보다 더 사랑스러울까?”

***

그 시각, 김영준 총장은 아직 대검의 사무실에 있었다.

결재하던 펜을 탁 내려 둔 김영준 총장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앞에는 MBS방송국의 사장이 보인다.

“자네 딸이 지금 대학교 4학년이지? 시험관 아기로 겨우 낳은 딸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잘 크고 있나?”

사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크고 있습니다.”

“그 딸…… 입시 비리에 연루되었을 때 막아 준 사람이 나야. 어렵게 낳은 딸, 상처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자네는 왜 그래? 서로 난처하지 않았으면 좋잖아?”

사장이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총장님…… 저희만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언론사도 지금 난리가…….”

“다른 언론사?”

“지금 소문이 퍼졌습니다. 서로 언제 특종을 터뜨릴지 눈치만 보는 중이죠. 여당의 입김이 들어간 상황이라…….”

“여당은 무섭고 나는 안 무섭나?”

“……총장님.”

“이 사장, 난 다른 언론사 사장이 아니라 당신에게 말하는 거야.”

“……!”

김영준 총장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서류를 움켜쥔 후 사장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김영준 총장의 눈빛이 사나웠다.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사장의 앞에 선 김영준 총장이 사장의 옷에 묻은 실밥을 털어 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특종을 잡고 싶어 안달 난 개가 되지 마. 여당과 야당을 두고 저울질하지 마. 그냥…… 내 말을 따라.”

“이, 이미…… 예고편이 나갔습니다.”

“내용을 바꿔. 범인은 내가 정해 주지. 그런 것으로 세상 혼란하게 만들지 마.”

“총장님!”

순간, 김영준 총장이 손에 든 서류를 사장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팍!’ 소리와 함께 서류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모두 사장의 비리다. 채용 비리부터 연예인 성 상납, 각종 뇌물.

사장의 눈동자가 떨려 올 때, 김영준 총장이 손가락으로 떨어진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택해. 기자 정신을 지킨 후 교도소 식당에서 밥을 먹을지, 가족들과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을지.”

사장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떨어진 종이를 한 장, 한 장 손에 쥐며 힘없이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하겠습니다.”

“그럼 메뉴를 선택해 주지. 저녁은 김치찌개가 좋겠어.”

김영준 총장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장은 김영준 총장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힌 후 사무실의 문으로 향했다.

사장이 힘겹게 문을 연다. 그런데 앞에는 다른 언론사의 사장이 서 있다.

“들어와.”

김영준 총장의 목소리에 다른 언론사의 사장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쾅, 닫혔다.

***

며칠 후, 이은하 기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주잔을 입에 댔다. 그리고 소주잔을 탁 내려 두며 말했다.

“피해자 어머니의 인터뷰도 찍었는데, 그거 다 삭제하래요. 분명히 여당에서 뒤를 봐준다고 했는데…… 다 엎어졌어요. 갑자기 이게 뭔지…….”

선술집이었다.

이은하 기자가 한숨을 내뱉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서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평온한 얼굴로 술잔을 입에 댈 뿐이다.

“뭐예요? 왜 그렇게 멀쩡해요?”

이은하 기자는 화가 나 있다.

그동안 준비했던 내용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외압에 의해 무릎을 꿇은 상황이라 참기 어려웠다.

그런데 서진은 미소를 짓고 있다. 술잔을 손에 쥐며 느긋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총장 그리고 언론사 사장…… 마음이 급했어요. 서두르면 놓치는 게 있는 법이고 그게 치명타가 되죠.”

이은하 기자가 서진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서둘렀다고요? 김영준 총장의 행동에 서두른 기색은 전혀 없었어요. 냉정하게 언론사 사장을 손에 쥐고 흔들었잖아요.”

“기자님, 뉴스는 텔레비전으로만 보는 게 아니에요.”

“네?”

서진이 휴대폰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뉴스보다 인터넷 방송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죠.”

“……!”

시사프로그램 <세상을 본다>에서 예고편까지 나온 사건이다.

그런데 방영되기 직전 모든 내용이 틀어졌다. 그저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밍밍한 내용으로 시간을 때울 거다.

“외압이 있었다는 음모론이 시작될 겁니다.”

엄시영의 뒤에는 김영준 총장만이 아니라 엄 회장도 있다.

막강한 권력자들.

법의 위에서 세상을 조롱하는 도둑놈들.

그들을 상대하려면 세상을 진흙탕으로 만들어야 한다.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에요.”

“……처음부터 우리 회사는 믿지 않으셨네요?”

“회사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사장을 못 믿은 거죠. 다 똑같은 사람들이니까요.”

이은하 기자가 물끄러미 서진을 바라봤다.

“못됐어요.”

“저요?”

“나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못된 남자야.”

“착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은하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절대 착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하나 여쭤봐도 돼요? 진짜 오프더레코드.”

“말씀하세요.”

“검사님의 목적이 뭐예요? 그렇잖아요. 김영준 총장 내려가면 검사님도 타격이 있을 게 분명한데…….”

서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은하 기자를 향해 상체를 굽혔다.

“기자님만 아세요.”

“네.”

“다 갖는 겁니다.”

“네?”

***

텔레비전에서 <세상을 본다>가 끝났다.

예상대로였다. 중요한 내용은 어떤 것도 없이 사건의 겉만 핥다가 종료됐다.

“끝났어.”

김영준 총장이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거실이 적막해지며 작은어머니 엄시영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김영준 총장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산을 오를 때는 험로가 있는 법이야. 쉬운 길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지. 벼랑을 기어올라야 정상에 설 수 있는 법이고.”

하지만 서진의 계획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김영준 총장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는 대검의 반부패, 강력부장이었다.

-총장님! 지금…….

김영준 총장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세상을 본다>가 예고편에 비해 시시하게 끝나자 사람들이 각 커뮤니티 사이트에 악플을 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곳에 달린 한 댓글.

-음모론이라는데?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가면 관련 방송 있음.

└주소 좀.

└www.youtu…….

서진이 지라시 업체와 손잡고 미리 만든 영상이다.

논란이 있을 것을 알고 모든 관심을 증폭할 기폭제.

제목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을 본다> 외압에 무너졌다!

-변사체 발견된 곳 어디? 그 땅이 유명한 공직자의 것!

-칼에 묻은 혈흔! DNA 검사 당장 하라!

자극적인 제목, 그 영상의 조회 수가 오르자 가만히 있던 다른 BJ들도 덩달아 나섰다.

-<세상을 본다> 외압 논란 정리

-<세상을 본다> 변사체의 진실

-영매 능력 있는 제가 그곳에 직접 가 보겠습니다

-<세상을 본다> 거짓말 또 나왔다!

-안 걸릴 줄 알고 대놓고 주작한

<세상을 본다>

김영준 총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상대가 언론사 사장 급의 거물이라면 얼마든지 불러 박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다.

지금껏 무시하던 일반 사람들.

그들이 모이면 세상도 흔들 수 있는 거다.

“이런 거지같은 놈들이!”

김영준 총장이 쾅, 쾅, 쾅 테이블을 두들겼다.

상황을 모르는 엄시영이 놀란 눈으로 김영준 총장을 살폈다.

“왜…… 또 뭐야? 뭐냐고!”

김영준 총장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엄시영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 입술을 떼려는 순간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떠오른 발신 번호가 청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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