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18화 (218/250)

<기억하고 있다 (4)>

***

텔레비전에 백기호 의원이 나오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독거노인의 집을 방문해 직접 선풍기를 설치해 주는 모습.

독거노인의 손을 잡고 맑게 웃는 미소가 좋은 사람처럼 드러났다.

아나운서는 말했다.

-백기호 의원이 지지율 40%를 넘었습니다. 백기호 의원은 소외된 이웃을 살펴야 한다며…….

불구속 수사를 받는 공대출 전 의원의 집이었다. 서진이 찾아오자 공대출 전 의원은 간소한 술상을 차렸다.

“막걸리 한잔 받겠나?”

공대출 전 의원이 잔을 채울 때, 서진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아나운서는 계속해서 백기호 의원의 찬양을 떠들어 대고 있다.

판사 출신으로 강직하다,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 쇼가 아닌 진정한 봉사를 하는 사람이다 등등…….

공대출 전 의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나쁘지 않아. 그런데 야당 후보인 백기호의 지지율이 높아. 흔치 않은 경우야.”

현 여당에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스타성을 가진 국회의원이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되기엔 나이가 어리다. 그 덕에 여당이 내세운 후보는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래서, 자네도 백기호를 뽑을 건가?”

“백기호 의원이 내세우는 것은 강직한 판사 출신이라는 이미지의 깨끗함. 그런데 그 뒷면의 추악함이 나타나면 경쟁력은 사라지겠죠.”

“알지, 하지만 방법이 없어. 국민은 어차피 네거티브라 생각하니까.”

“있습니다, 방법.”

확신에 찬 목소리에 공대출 전 의원의 행동이 뚝 멎었다. 그리고 또렷한 눈으로 서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진이 품에서 녹음기와 흰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일단 들어 보세요.”

“……!”

공대출 전 의원이 녹음기를 들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공대출 전 의원의 눈이 일그러졌다.

살인 그리고 무마.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천민자본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가 말했다.

-……그 사채업자의 이름은 최지범입니다.

서진이 녹음기를 중지시키며 입을 열었다.

“최지범이 지시했다는 증거, 그건 이 봉투 안에 있습니다.”

“최지범이 누구지? 백기호의 사주를 받은 사람인가?”

“아뇨, 최지범은…… 엄 회장이라 불리는 큰손의 아래에서 30년 넘게 일한 사람이죠.”

“엄 회장?”

공대출 전 의원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공대출 전 의원도 엄 회장을 알고 있다.

“지금은 일본 자본과 손잡았다고 들었는데…….”

서진이 중국에서 넘어온 저후안을 잡으며 대한민국 사채시장은 일본 측 사채업자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 회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본 측 사채업자의 손을 잡으며 탐욕적으로 돈을 버는 중이다.

“엄 회장을 생각인가? 하지만 엄 회장을 건들기는 어려워.”

엄 회장의 영향력은 크다. 그는 대한민국의 격변기를 이용해 큰돈을 쥔 사람. 그 시기를 이용해 각 기업의 지분도 잡고 있다.

엄 회장이 움직이면 대한민국 전체가 스캔들에 휩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서진이 픽 웃었다.

“그래서, 계속 놔두실 겁니까? 수술이 무섭다고 메스를 들지 않으면, 결과는 뻔합니다.”

서진의 목소리는 건방졌고 공대출 전 의원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진은 상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렇게 시간 끌다가 만들어진 게 엄 회장, 백기호, 김영준이라는 괴물입니다. 그 괴물…… 의원님과 같은 정치인들이 만들어 냈습니다.”

“자네!”

급기야 공대출 전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서진은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공대출 전 의원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 나라의 악성종양 같은 자들, 도려내죠.”

“그게 쉬운 일이라면…….”

서진이 공대출 의원의 말을 끊으며 계속 말했다.

“엄 회장이 하는 게 뭡니까? 돈놀이. 돈 빌려주고 받고. 그걸 도려내는 게 왜 무섭습니까?”

서진은 완벽할 정도로 공대출 전 의원을 겁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공대출 전 의원이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수천억대의 뇌물,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의 성 상납 그리고 그 동영상. 그 모든 게 엄 회장에게 있어.”

“아이고, 무서워라.”

공대출 전 의원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서진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그 딸을 잡는 것도 무섭습니까?”

공대출 의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면 서진의 말에 두서가 없다. 백기호 의원을 잡는다고 하더니 뜬금없이 엄 회장을 거론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딸이다.

서진이 서류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며칠 전 변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몸에는 칼이 박혀 있었고 그 칼에는 살인자의 DNA가 존재하죠.”

“그래서, 이게 백기호와 무슨 상관인가?”

“변사체가 발견된 곳이 제 작은어머니 엄시영의 땅입니다. 아시겠지만, 제 작은아버지는 김영준 총장이죠. 작은어머니가 무너지면, 작은아버지도 무너질 겁니다.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서진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틀어졌다. 화면에는 여전히 인자하게 웃고 있는 백기호 의원이 나오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진이 계속 말했다.

“그럼 제 작은아버지는 살기 위해 백기호 의원의 발목을 잡겠죠. 혼자는 죽지 못하는 성격이니까요. 작은아버지와 백기호 의원은 싸울 겁니다. 여당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겠네요.”

서진의 시선이 다시 공대출 전 의원에게 향했다.

“지금까지 건방지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선은 전쟁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당은 패배가 확실한 상황이죠.”

서진이 녹음기를 흰 봉투 위에 툭 올리며 말을 이었다.

“폭탄이 있는데, 왜 안 터뜨리십니까? 게이트 터지는 거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터뜨리시죠?”

공대출 전 의원이 막걸리 잔을 손에 쥐었다. 그 손이 가늘게 떨린다.

서진의 말 대로다.

엄 회장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서진의 말대로 대선은 전쟁.

사건이 터지면 서진의 작은어머니 엄시영은 당연히 휩쓸릴 테고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의 싸움이 벌어질 거다.

여당은 그 이득을 취할 수 있다.

공대출 전 의원이 찰랑거리는 막걸리를 한입에 털어 넣은 후 서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자네는 괜찮겠나?”

“저요?”

이 사건이 진행된다 해도 서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여당과 야당, 권력자들의 싸움일 뿐이다. 서진은 철저히 숨을 수 있다.

김영준 총장에게 걸려 위험에 빠질 일은 없는 거다.

그런데 공대출 전 의원의 질문은 그게 아니다.

“자네도 검찰을 떠날 수 있어.”

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조카다.

검찰의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김영준 총장이 떠난 뒤 그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기는 힘들 거다.

하지만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상관없어요.”

“받아 줄 로펌도 없을지 몰라.”

“그것도 상관없어요.”

공대출 전 의원이 끌끌 웃었다.

“부끄러워.”

“…….”

“어린 놈이 다칠 걸 뻔히 알면서도 괴물 잡겠다고 설치는데, 어른이 되어서 그걸 무서워하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

공대출 전 의원이 막걸리를 잔에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

공대출 전 의원은 이미 정계에서 물러난 사람.

하지만 그 영향력은 크다.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이 첫 타깃으로 공대출 전 의원을 잡은 이유도 그 영향력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결정, 감사드립니다.”

“됐어. 자네 다음 취직 자리나 걱정해.”

“그래야겠네요.”

서진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공대출 의원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치며 물었다.

“자네…… 정치할 생각 없나?”

“네?”

뜬금없는 말에 서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공대출 전 의원의 눈빛은 진심이다.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김영준 총장의 조카라고 하면 지지율에 방해가 될 걸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상관없게 메이킹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정치할 생각은 있는가?”

공대출 전 의원이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바닥에는 자네처럼 나쁜 놈이 필요하거든.”

***

며칠 후, 김영준 총장의 집.

거실은 포탄이 터진 것처럼 보였다.

커튼이 찢어져 있고 가족사진은 깨져 있다. 사방에 흩어진 유리 조각이 살벌하게 보인다.

그 한복판에 서진의 작은어머니 엄시영이 서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눈동자가 풀려 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쥐어뜯은 머리가 산발이다. 그 모습이 꼭 귀신같다.

“끝까지…….”

엄시영은 방금 김영준 총장의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어려워. 대선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그럼 윤환이 나올 수 있어.

엄시영이 입술을 씹으며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벽에 맞은 휴대폰이 쾅,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자기 욕심 때문에 자식을 옥살이시키는 새끼가 어디에 있어!”

그리고 그때, 엄시영의 머릿속에 김윤환을 만나고 왔던 것이 떠올랐다.

울면서 빼내 달라고 하던 아들. 제발 집에 가고 싶다던 모습. 이제 성실하게 살겠다는 목소리.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꼭 꺼내 줄게.”

엄시영의 머릿속에서 김윤환의 모습이 사라지며 전 남자 친구가 스쳤다.

살인의 현장. 전 남자 친구는 피에 젖은 모습으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었다.

“윤환이라도…… 잘 키워 줘.”

엄시영은 전 남자 친구를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환이만큼은 잘 키울 거야. 걱정하지 마.”

엄시영의 시선이 김윤환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틀어졌다.

“그래도 나…… 오빠를 잊지 않고 있어. 내 모든 비밀번호는 당신의 생일이야. 윤환이…… 꼭 빼낼 거야. 그게 오빠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거든.”

엄시영이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피처럼 붉은 와인을 입에 대며 씁쓸히 웃었다.

“오빠, 엄마…… 내가 그동안 소홀했더라? 날 그렇게 예뻐하셨는데,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어. 조용해지면, 찾아뵐게. 그리고 계속해서 사죄할게. 용돈도 많이 드리고…….”

그런데 그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아줌마!”

냉랭한 목소리에 주방에서 떨고 있던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와 인터폰을 확인했다.

“사모님…… 김서진 검사가 왔어요.”

“서진이?”

엄시영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아주머니는 문을 열어 준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서진이 들어왔다.

그런데 서진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굳어 있다.

“자, 작은어머니!”

엄시영이 취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서진이 엄시영을 향해 다가섰다.

“크, 큰일 났어요.”

“……큰일? 윤환이 옥에 들어간 것 말고 큰일이 있을까?”

서진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버튼을 눌러도 텔레비전은 켜지지 않는다. 화면에 재떨이가 박혀 있다.

서진은 휴대폰을 들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한 동영상을 틀었다.

이은하 기자의 <세상을 본다>의 그 예고편.

이은하 기자의 모습이 확 클로즈업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파묻혀 있던 시신. 가슴에 한처럼 박힌 칼. 피해자는 30년 전 실종된 선채오 씨였습니다. 그리고…… 시신이 드러난 순간, 의문의 남자가 30년 만에 선채오 씨의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남자의 목소리가 흘렀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화면이 검어졌다. 어두운 화면 속에 자막이 한 글자씩 빠르게 타이핑되었다.

-우리는 진범을 알고 있다. 당신이 죽였어.

작은어머니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입에서는 “아…….” 하고 신음 소리만 흐른다.

그리고 서진이 쐐기를 박았다.

“언론사에 있는 사람을 통해 듣고 왔어요. 그 땅, 작은어머니 소유라면서요? 여당에서 기획한 것 같아요. 작은어머니 유전자를 조사해야 한다면서…….”

엄시영이 비명처럼 악을 질렀다.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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