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17화 (217/250)

<기억하고 있다 (3)>

원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서진을 바라봤다.

원장의 표정이 점점 긴장으로 물들어 갈수록 서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짙어졌다.

그리고 서진이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원장이 허겁지겁 서류 봉투를 펼쳐 내용물을 살폈다.

전부 사진이다.

원장의 차에 젊은 여성이 타는 사진.

그 차가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

원장이 젊은 여성과 호텔 방에 들어가는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원장의 부릅뜬 눈을 보며 서진이 끌끌 웃었다.

“내가 검사로 있으면서 온갖 성범죄자들을 만나 봤는데요. 딸 친구하고 그게 뭡니까?”

“…….”

“결정하세요. 비리에 연루된 공직자가 될지, 딸의 친구와 쎄쎄쎄 한 아버지가 될지.”

“…….”

“뭘 어렵게 생각하시나……. 공직자 비리는 쪽팔린 채 교도소에 가면 되는 거고. 쎄쎄쎄 한 아버지는 단순히 가정 해체네요. 가정이냐, 명예냐 그걸 고르면 되겠네.”

원장이 눈을 꾹 감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 한 번만…….”

“나한테 죄송할 필요는 없고.”

“제발…… 한 번만…….”

원장이 다급히 일어나더니 무릎을 꿇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인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서진이 차가운 눈으로 원장을 바라봤다.

“원장님…… 그냥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증거품이 기억하는 것을 보고하는 게 그쪽 일이잖아요?”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결정하신 겁니까?”

“검사님! 제발!”

서진이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렸다. 통화 버튼과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자 장석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마 아파트 2302호에 왔습니다. 초인종 누르면 될까요?

원장의 얼굴이 쩍 갈라졌다.

2302호는 자신의 집이다. 그곳에 사람이 갔다는 것은…….

서진이 사진을 손에 들더니 원장을 향해 툭 던지며 장석민에게 지시했다.

“눌러.”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와 동시에 휴대폰에서 원장의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원장이 다급히 말했다.

“자, 잠시만요! 따르겠습니다! 따를게요! 한다고요!”

서진이 원장의 처참한 표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장석민에게 입을 열었다.

“잠깐 대기해.”

그러자 장석민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킨 배달 왔는데요?

-어? 안 시켰는데요.

서진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원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

“막아 준다고 하셨어. 언론도 그리고 국과수도. 국과수 원장이 우리 아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네?”

김영준 총장의 집.

그 거실의 소파에 김영준 총장이 앉아 있었다.

서진의 작은어머니 엄시영이 김영준 총장의 앞을 천천히 거닐며 말을 이었다.

“알지? 사람은 돈 앞에 무릎 꿇는다는 것. 국과수 원장은 우리 손을 들어 줄 테고 어떤 일도 없던 것처럼 될 거야.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하루야.”

엄시영이 커튼을 열어젖히며 정원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야지?”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저었다.

“윤환이…… 대선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 여당에서 내 움직임을 주시한다고 말했잖아. 그쪽 정보력을 우습게 보면 안 돼.”

김영준 총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땅의 소유주는 당신이야.”

“그래서?”

“피해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어. 여당의 힘을 얻어 언론에 얼굴을 내밀 가능성도 커.”

“그런데?”

“피해자의 어머니가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서 피눈물을 흘리면? 그래서 당신의 DNA를 감식해 달라고 요청하면…….”

김영준 총장은 충분히 존재할 위험 요소를 거론했다. 그런데, 지금껏 느긋하게 듣고 있던 엄시영이 깔깔 웃었다.

“어마? 당신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

“그 집에 배우를 보낸다고 했어. 자기가 죽였다, 자기의 잘못이다, 죄송하다 울면서 빌 사람.”

“…….”

“국과수 원장의 힘으로 증거가 바뀔 테고 자백한 범인도 있고. 그런데 날 어쩐다고? 미안한데, 이 나라의 법으로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어.”

“…….”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이 왜 모를까? 법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거지새끼들뿐이란 것을…….”

***

“다시 말하지. 빚은 모두 없어질 거야. 이자를 갚으라며 괴롭히던 자들도 사라지는 거야. 어차피 공소시효도 끝난 일, 교도소를 갈 일도 없어. 얼굴만 조금 팔리면 끝이야.”

공원 벤치였다.

최지범이 예순이 넘은 남자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읽어. 자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이야.”

최지범이 남자의 무릎에 종이 한 장을 내려 뒀다.

……친구였습니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야기에 술 한잔을 했는데, 술이 많이 취해서인지 시비가 붙었고 싸웠습니다. 싸움은 자취방으로 오는 동안 계속 이어졌고 결국……. 죄송합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친구의 시신을 전 여자 친구의 별장에 묻었습니다. 그럼, 혐의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해서요.

“외울 필요는 없어. 친구를 위로해 주려다 싸웠고 죽였다. 그래서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전 여자 친구의 별장에 묻었다. 이 맥락만 기억하면 되는 거야.”

최지범이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뭐든 금방 잊어.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잠깐이야. 하지만 빚은 사라지는 거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해.”

“…….”

“그리고…… 손가락질받을 일도 없을지 몰라. 애초에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이해했으면, 가서 사과하고 와.”

남자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비틀 피해자의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최지범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병신 새끼. 늙어서 가난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최지범은 그 말을 남기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신의 차량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런데 멀리서 최지범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바로 서진이었다.

***

잠시 후, 피해자 어머니의 집.

예순이 넘은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꾹 누르자 딩동 소리와 함께 피해자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누구?”

남자는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피해자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흔이 가까운 나이, 이마와 눈가에 밴 고생의 흔적, 꼭 자신의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감정을 외면했다.

피해자의 어머니를 속여야 빚이 사라진다. 그래야 내일 뜨는 해를 지켜볼 수 있다.

남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아드님을…….”

“죽였다고 말하려는 거죠?”

순간, 남자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남자는 심장이 덜컥거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뒤에 멀끔한 청년이 서 있었다.

바로 서진이다.

“들어가세요.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누, 누구?”

“검사.”

“네? 검사요?”

“어쩜 이렇게 뻔하게 움직일까……. 내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않네.”

서진이 집 안으로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남자는 힘없이 현관으로 들어섰고 서진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눈을 깜박였다. 장지혁 검사에게 서진이 온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순이 넘은 남자가 함께 오자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진이 피해자의 어머니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 차 한잔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잠깐 이분이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방 좀 써도 될까요?”

“아, 네.”

피해자의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피를 타기 위해 이동하자 서진의 시선이 남자에게 틀어졌다.

“들어가요.”

남자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일단 남자의 목표도 집으로 들어가는 것, 남자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서진이 가리킨 방으로 들어갔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해 지저분한 방.

서진이 그곳에 아무렇게나 앉으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앉으세요.”

남자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서진과 마주 앉았다. 곧 커피가 놓였고 피해자의 어머니는 문을 닫고 거실로 사라졌다.

서진이 커피 잔을 손에 들며 말했다.

“왜 왔습니까? 살인자인 척 사과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거짓 증언하면 벌받아요.”

서진의 눈빛은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지만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 제가 죽였습니다.”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제가 죽였다니까요!”

“알았으니까, 그놈들에게 진 빚이 얼마입니까?”

“네?”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잖아요?”

서진이 남자의 앞에 소형 녹음기를 내려 두며 말을 이었다.

“그 빚, 제가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럼, 손가락질받을 필요도 없고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놈들의 보복이 두렵다면, 해외로 갈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 드리죠.”

“……!”

“그 대가로 해야 할 일은 둘, 녹음기가 켜지면 어떤 지시를 받고 이곳에 왔는지 말씀하시고 놈들이 지시했다는 증거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하지만 남자는 설득되지 않았다. 오히려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죽였다니까요!”

남자는 예순이 넘었다. 난데없이 사탕을 주겠다며 속삭이는 서진을 믿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직접 그 사탕을 보여 줘야 한다.

서진이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려 뒀다.

“빚 갚을 돈 5억.”

“……!”

남자의 눈동자가 떨렸다. 남자가 진 빚은 3억 2천. 그런데 5억이면 빚을 갚고도 1억 8천이 남는다.

그런데 서진이 봉투 하나를 더 꺼내 내려 뒀다.

“놈들의 보복이 끝날 때까지 동남아에 남아 즐길 비용, 3억.”

“……!”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봉투 안을 살폈다.

수표가 보인다.

‘8억.’

하지만 끝이 아니다.

서진은 서류 봉투를 꺼내 내려 뒀다.

“마지막으로 해외에서 돌아왔을 때, 몸 편히 지낼 오피스텔의 계약서입니다.”

서진이 남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녹음기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서류 봉투 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죠? 운이 좋네요. 몇 마디 던지고 수억을 손에 쥘 수 있으니까.”

눈을 콱 감은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마, 말하겠습니다.”

“증거는?”

“혹시…… 종이에도 지문이 남습니까?”

“물론이죠.”

서진이 슬쩍 웃자 남자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내려 뒀다.

“제게 지시한 사람이 이 종이를 건넸습니다. 지문이 남아 있을 거예요.”

서진이 눈동자를 움직여 종이를 바라봤다.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 지껄여 댈 말이 적힌 대본이다. 지문이 찍혀 있다면 훌륭한 증거가 된다.

“좋아요. 시작하죠.”

서진이 녹음 버튼을 꾹 눌렀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돈을 갚지 못한다며 목숨의 위협과 폭행을 당했죠. 그런데 그 사채업자가 찾아와…….”

서진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 작은어머니가 도망갈 구멍은 없다.

증거는 바뀌지 않을 테고 살인을 저질렀다며 주장할 배우도 등을 돌렸다.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하지만 작은어머니가 죄를 피하기 위해 저지른 일은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될 거다.

처참할 정도로 발악하며 세상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서진은 동시에 압수 수색을 진행할 예정이다.

작은어머니의 집에서 발견했던 여행 가방.

그곳엔 작은어머니가 차명으로 손에 쥔 재산과 탈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엄시영은 끝이야.’

서진의 눈이 시퍼렇게 빛날 때, 남자의 목소리도 멎었다.

남자가 서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끄, 끝났습니다.”

“최지범에게 연락이 오면 사과했다고 하세요. 그리고 한국을 뜰 때까지 숨어 있으세요. 그게 안전할 겁니다.”

서진이 차갑게 웃었다. 이제 작은어머니의 비명을 들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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