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96화 (196/250)

<허세 (2)>

“……!”

그동안 약에 취한 사람을 셀 수 없이 봐 왔던 최선혜는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서진의 눈동자는 미쳐 있다.

약에 취한 광기를 넘어선 그 무엇.

상대가 누구든 다 씹어 먹겠다는 눈빛.

‘뭐, 뭐야…….’

서진이 테이블에 내려 둔 휴대폰을 최선혜의 앞으로 밀었다.

“열어. 판도라의 상자든 뭐든 확인해 줄 테니까.”

최선혜는 눈동자만 움직여 휴대폰을 바라봤다.

망설이는 눈동자를 본 서진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끝까지 버틸 생각은 하지 마. 네가 생각할 것은 하나야. 수사에 협조해서 조금이라도 형량을 깎아야 한다는 생각.”

최선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그녀는 휴대폰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검찰이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저장된 증거를 수집하는 동안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서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계획을 틀었다.

“네가 말했지? 남의 자식이 고생하든 말든 죽든 말든, 내 자식만 행복하면 된다. 그게 그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

“내가 그 사람들이라면, 너부터 죽일 거야. 네 입만 찢어 버리면 지껄여 댈 사람은 없잖아? 죽은 너는 말이 없고 제 자식은 살겠지. 살고 싶으면 그 사람들한테 시간을 주지 마.”

서진이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열어.”

“하…… 후회하지 마세요.”

“또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최선혜는 한숨을 내뱉은 후 휴대폰을 손에 들고 비밀번호와 지문 인식을 해제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넘겨받은 서진은 주소록을 주르륵 넘기며 눈에 담았다.

고객에 대한 기록이 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선혜의 말대로 거물.

가볍게는 인기 연예인부터 각 기업인의 자식, 정치인의 자식, 각 지역 유지의 아들, 딸.

서진의 굳어진 표정을 본 최선혜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가 고파 계란 몇 개를 훔친 사람이 1년 6개월을 받았다죠? 그런데 마약에 손댄 그 사람들은 몇 년을 받을까? 내가 예상해 볼까요?”

“…….”

“1심에서는 언론의 눈치를 보며 징역 3년, 하지만 세상이 잠잠해진 2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휴대폰을 보던 서진의 시선이 최선혜에게 향했다.

그러자 최선혜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란 훔친 사람은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어야 하지만 우리 고객님은 즐겁게 사회생활 하시겠네.”

“저기…… 그 걱정도 네가 할 필요는 없고.”

“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데, 모든 검사가 네 생각처럼 더럽지는 않아. 더러운 것은 소수. 대다수는 어떻게든 잡아내려고 하지.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그러니까 기대해. 이 안에 있는 이름, 전부 잡아넣어 줄 테니까.”

서진이 최선혜의 휴대폰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건 땡큐. 그리고 특별 서비스로 침대 넣어 줄게.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자라고요?”

“어.”

서진의 태도에 최선혜가 당황했다.

휴대폰을 까라고 하더니, 침대를 넣어 준다는 갑작스러운 말.

지금껏 신경전을 벌이며 검사의 우위에 서려던 자신이 우스워지는 순간이다.

“거, 검사님? 취조는요?”

“새벽 3시에 무슨 취조야? 취조는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당연히 담당 검사는 내가 아니라 너 잡아 온 장지혁 검사님이고.”

“그럼 휴대폰은?”

“증거물 확인이지. 다시 한번 땡큐.”

서진이 나갈 때까지 최선혜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당한 느낌이었다.

*서진은 최선혜의 휴대폰을 노트북에 연결 후 주소록을 모두 인쇄했다.

그리고 샅샅이 훑었지만 예상대로 김윤환의 이름은 없다.

그놈은 제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는 것인데…….’

김윤환의 끄나풀이 되어 대신 약을 구입한 놈.

그놈을 찾아야 한다.

연결된 손을 잡아내면 김윤환을 끄집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진이 손에 든 주소록을 책상에 내려 두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

밖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

다음 날.

서진은 간단히 세수를 한 후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사이 출근한 이동영 수사관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 휴대폰 번호, 통화 내역 좀 조사할 수 있을까요?”

서진이 연락처 몇 개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내려 두자 이동영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누구죠?”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네?”

서진은 밤새 주소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김윤환과 연결된 고리로 보이는 연락처 몇 개를 간추렸다.

비슷한 나이, 김윤환과 같은 지역에서 학교를 나온 놈들, 한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놈.

그렇게 정리한 게 셋, 연결 고리는 그 안에 있을 거다.

물론, 저놈들이 아니라 김윤환의 통화 내역을 확인하면 단번에 알아낼 수 있는 일.

하지만 수사가 들어가는 순간 김영준 총장의 귀에 들어갈 게 분명하다.

영장은 없이 비공개로 확인한다 해도 위험 요소는 존재한다.

서진은 김윤환을 잡기 위해 돌다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세상에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다.

그리고 이동영 수사관은 서진의 마음을 알아챘다.

쪽지에 적힌 연락처를 확인하며 입을 연다.

“영장은 없는 거죠?”

“네.”

“오후까지 확인하겠습니다.”

이동영 수사관의 시원한 대답을 들으며 서진은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배를 채운 서진이 사무실로 올라갈 때였다.

이소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미치겠어. 김윤환 얼굴이 꿈에도 나와. 어제는 꿈에 김윤환이 나와서…….

이소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최근 김윤환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는다고 한다.

-뭐 하세요?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세요. 제가 또 검사 선배잖아요.

-소희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어요? 아, 이거 드라마에서 나왔던 말인데. 하하하.

-신혼집은 북유럽 스타일로 꾸미려 하는데, 제가 미국 스타일이라…….

결국 꿈에도 김윤환이 나왔다.

꿈의 배경은 결혼식 날, 이소희는 드레스를 입은 채 울고 있었으며 김윤환이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소희가 힘없이 말했다.

-정말 끔찍해. 가위 눌린 줄 알았어.

서진이 슬쩍 웃었다.

얼마나 싫으면 꿈에도 나올까.

“로또 사야겠네.”

-야…… 로또를 왜 사?

“꿈은 반대라잖아. 나쁜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생길 징조야. 일단 로또부터 사.”

서진의 여유로운 목소리는 이소희에게 희망처럼 여겨졌다.

-그렇겠지? 그래야 해.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생각만 해도 역겨워.

“내가 그렇게 해 준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이 상황을 즐겨. 원하는 가방 있으면 이참에 사 달라고 하면서.”

결혼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서진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이소희는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즐기면 되는 거지?

“응, 내 말 믿어.”

서진은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뤄 낸 사람, 이소희는 그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믿기로 했다.

-믿을게.

통화를 종료한 서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자 이동영 수사관이 서진에게 서류 한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결과 나왔습니다.”

아침에 부탁했던 세 명의 통화 내역.

“감사합니다.”

“그런데 좀 주무셔야 하지 않아요?”

서진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 이동영 수사관이 걱정스럽게 물었고 서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아요.”

“그러다 병 나요.”

“뭐, 오늘은 일찍 퇴근할 수 있겠죠.”

서진은 자리에 앉아 김윤환과 통화한 놈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찾았다.

‘김광원.’

놈은 200억에 달하는 빌딩을 소유한 건물주.

나이는 30대 중반, 직업은 건물 관리, 취미는 골프.

남들이 열심히 일할 때, 부모 잘 만나 인생 즐기는 사람.

이놈이 김윤환과 연결된 자.

서진이 곧바로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장지혁 검사님, 참고인 조사 시작했죠? 김광원이라는 사람부터 불러 주세요.”

-김광원?

장지혁 검사에게도 휴대폰에서 나온 주소록이 전달됐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검찰에 불려 나와 참고인 조사라는 명목으로 마약 검사를 하게 될 거다.

-오케이. 바로 불러 줄게.

김광원이라는 놈, 그 입에서 김윤환의 이름이 나오게 된다면, 오랜만에 김영준 총장의 난처해진 얼굴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

다음 날, 김광원의 입에서 김윤환의 이름이 나온 것은 순간이었다.

서진은 묻지 않았지만 장지혁 검사의 방으로 끌려온 그 놈은 마약 거래를 순순히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윤환이라고 아세요?”

마약왕이라 불렸던 최선혜도 건방졌는데, 이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서진과 장지혁 검사를 앞에 두고 다리를 달달 떨며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

“윤환이 아버지가 총장이라고 그랬는데, 나 잡으면 윤환이도 잡아야 할 텐데, 그럴 수 있나 몰라? 혹시, 나는 잡아넣고 윤환이는 풀어 주면, 그 뒤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놈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흉내를 내며 말을 이었다.

“인터넷에 올릴 거예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난리 나겠네. 알죠, 요즘 네티즌 무서운 거? 검사님들 신상이 털릴 수도 있어요.”

서진은 테이블에 올라온 놈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발신 번호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렇게 당당하면 잡혀 오면서 윤환이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그런데 연락은 안 했네?”

놈이 입술을 찢어 웃는다.

“히든카드 몰라요?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꺼내야지. 어쨌든, 이야기 끝났으면 가도 될까요?”

“앉아. 건방 떨지 말고.”

“왜 그러세요? 계속해 봤자 결과는 똑같을 텐데, 관례대로 하죠.”

그 순간 ‘빡!’ 소리가 흘렀고 김광원은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장지혁 검사가 놈의 뒤통수를 때린 거다.

정말 세게.

김광원이 불같은 눈으로 장지혁 검사를 쏘아봤다.

“때, 때려? 지금 때린 거 맞지?”

하지만 장지혁 검사가 더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관례? 듣다 보니 헛소리가 논문감이네. 그럼 약쟁이는 때려도 된다는 관례는 모르나?”

“씨발, 내가 누군 줄 알…….”

장지혁 검사가 허리를 굽히며 놈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싸늘한 말을 이어 갔다.

“새끼야, 생각 좀 해. 취조실이 아니라 왜 여기로 불렀을 것 같아? 여기는 때려도 돼서 그런 거야.”

장지혁 검사의 외모는 험상궂다.

짧은 머리, 큰 덩치 그리고 심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쥐인 주먹.

김광원은 스르륵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고소할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장지혁 검사가 픽 웃었다.

“고소? 해 봐. 내 방에는 CCTV 없고 녹음기도 없어. 그런데 판사가 약쟁이 말을 믿어 주겠냐? 손가락 내밀면 레이저 나온다는 놈들인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좀 맞자. 진단서 안 나올 정도만 때려 줄게.”

당근과 채찍, 험악하게 생긴 장지혁 검사가 분위기를 잡고 착하게 생긴 서진이 다독이는 것.

대부분의 범죄자는 이 상황에 넘어간다.

서진이 장지혁 검사를 말리는 척 입을 열었다.

“검사님, 왜 그러세요?”

“비켜. 이런 새끼는 처맞아 봐야 정신을 차려.”

장지혁 검사의 살벌한 목소리가 이어질 때, 서진이 김광원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야, 빨리 명단 적어. 누구한테 약을 줬고 누구랑 같이 했는지. 관례는 우리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결정하는 거니까, 히든카드도 함께 적어. 그럼 되는 거야.”

서진이 사람 좋은 목소리로 타이르며 종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재촉했다.

“어서.”

김광원이 펜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두고 봐.”라고 중얼거리며 히든카드라고 말한 김윤환의 이름을 가장 위에 적었다.

아주 크게 ‘김윤환’이라고.

그 글씨를 보며 서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잠시 후, 서진은 장지혁 검사의 방을 빠져나오며 장석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윤환과 약속 잡아.”

이제 김윤환의 비명을 들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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