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하나. -(5) >
*
흑백의 세상, 작은어머니는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인상을 찌푸렸고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어머니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공간을 울렸다.
“그때 잘했으면 됐잖아! 진흙탕 싸움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해! 하······ 알았어. 알아만 볼 거야. 그리고 이게 끝이야. 경고야. 선 넘지 마.”
그렇게 통화가 종료됐다.
그리고 작은어머니가 음산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난 윤환이만 잘되면 돼.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상관없어.”
*
그게 끝이었다.
세상이 색을 되찾았고 서진의 앞에는 작은어머니가 보였다.
작은어머니는 소름 끼치는 눈으로 서진을 보고 있다.
다른 점은 미소 짓고 있다는 거다.
정말 가식적으로.
서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어머니가 들고 있는 휴대폰의 발신 번호만 봤다면, 중요한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던 거지? 친정?’
워낙 짧은 내용이었고 작은어머니의 목소리만 들렸기 때문에 실마리 없이 머리만 복잡해졌다.
서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작은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신문에서 봤어. 요즘 사채시장을 수사하고 있다며?”
“아, 네.”
“이유가 뭐야? 그냥 궁금해서.”
작은어머니의 목소리는 천연덕스러웠고 서진은 원론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민원이 들어와서 수사하다 보니까 덩치가 꽤 크더라고요. 그래서 실적을 위해 수사하고 있어요.”
“아, 실적?”
작은어머니의 표정에 가소롭다는 느낌이 서렸다.
서진이 사채시장을 수사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입에서 경고와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언제까지 할 거야? 아, 내가 그쪽 일을 조금 알고 있는데, 거기 위험해.”
계속 다가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말투.
멈추라는 경고.
하지만 서진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인 답을 내놓았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
“······끝을 보겠다고?”
“네, 끝이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검사잖아요. 위험하다고 그만둘 수는 없죠.”
찰나였지만 서진은 작은어머니의 입꼬리가 휘어지는 것을 봤다.
서진이 위험에 빠지기를 원하는 것 같은 표정과 눈빛.
하지만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서진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조카, 힘들까 봐 걱정돼.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그만둬.”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갈 곳이 있다고 했지? 어서 가 봐.”
작은어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서진의 옆을 스쳤다.
찬 바람이 쌩쌩 분다.
서진이 고개를 틀어 작은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스릴러 영화의 악역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 거다.
* * *
서진은 신지연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핸들을 틀며 사이코메트리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잘했으면 됐잖아?’
불현듯 서진을 밀어 죽인 배경에 작은어머니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섣불리 속단할 수 없다.
이전의 서진은 힘이 없는 상태에서 사채시장을 들쑤셨고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게 꼭 작은어머니의 친정이라는 법은 없다.
의심이 의심으로 이어지며 잘못된 답을 향해 가는 것은 피해야 한다.
*
잠시 후, 서진은 상가의 옥상에 서 있었다.
신지연은 서진이 원한 자료만 건네준 후 떠났고 서진은 서류 봉투를 열어 확인하는 중이었다.
서진이 신지연에게 부탁한 것은 교통사고를 기획했던 외국 여자에 대한 정보.
단서는 안나 루라는 이름과 불법체류자라는 신분뿐이었는데, 신지연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그녀를 찾아냈다.
‘쉽게 찾은 이유’
그 이유는 하나다.
그 여자는 나름 거물, 그러니까, 신마그룹의 네트워크에도 잡혀 있었던 거다.
서진의 시선이 서류로 향했다.
여자의 정보가 보인다.
-이름 : 안나 루(가명일 가능성이 높음).
-나이 : 30세(추정).
-국적 : 중국계 캐나다(추정).
-특징 : 불법체류 중.
그런데 신마그룹이 알고 있는 것도 안나 루라는 가명뿐.
거주지는 물론 어떤 것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은 있다.
안나 루가 신마그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던 이유.
안나 루는 정계의 인물이 모일 때,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뇌물을 주겠지? 어쩌면 성 상납을 할 수도 있겠고.’
안나 루는 꽤 미인이다.
발정 난 개들은 안나 루를 보면 군침을 흘릴 거다.
서진이 서류를 넘겼다.
가장 마지막 장, 안나 루를 만났던 의원들의 목록이 보인다.
서진이 손가락으로 놈들의 이름을 툭 치며 중얼거렸다.
“너희는 미끼.”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던 서진이 슬쩍 웃었다.
안나 루는 놈들의 조직에서 꽤 고위급.
그런데 그런 고위급이 서진을 테러하기 위해 직접 나섰고 사주했다.
서진을 반드시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의지다.
‘고맙네.’
놈들은 그 의지 때문에 꼬리를 밟혔다.
서진은 그 꼬리를 타고 올라 몸통을 확인할 생각이다.
서진이 몸을 틀고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작은어머니와 이놈들이 겹쳐 보인다.
미간을 찌푸린 서진이 생각했다.
‘그것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 * *
다음 날.
서진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차에 뛰어들었던 남자가 보인다.
테이블에 안나 루에 대한 서류를 내려 두며 물었다.
“맞아요?”
남자가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맞아요. 이 여자예요. 확실해요!”
이제 확실해졌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저······.”
서진의 시선이 남자를 향해 틀어졌다.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구치소로 갈 수 있을까요?”
남자는 밖에 나가는 순간 죽는다.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의 채무가 가족, 형제에게 이동하는 것은 싫었다.
남자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구치소.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보험 사기 방지 특별법 위반 혐의로 갈게요.”
남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구속된다는데 좋아하는 중이다.
그렇게 남자가 떠났고 서진은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봤다.
안나루의 얼굴이 확인됐고 그녀가 정치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조만간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다.
‘그건 그렇고.’
서진은 사이코메트리에서 봤던 것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작은어머니는 누군가와 통화했고, 서진은 그 상대가 높은 확률로 친정일 것으로 추측하는 중이다.
‘발신 번호만 확인할 수 있으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통화 내역을 조사하다가 김영준 검사장에게 들킬 수도 있다.
아무래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통화 내역을 확인하려 한다면, 그 귀에 들어갈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합법적으로 영장을 받아 할 수도 없는 일.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나? 어떻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서진은 문뜩 사이코메트리에서 작은어머니가 했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렸다.
-······난 윤환이만 잘 되면 돼.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상관없어.
김윤환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
그걸 이용하면 작은어머니와 마주 앉을 수 있다.
서진이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작은어머니. 서진이에요.”
서진의 목소리는 밝았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사채시장을 안다고 하셨잖아요. 여쭤볼 것도 있고······.”
하지만 작은어머니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내가 좀 바쁜데?
바쁘기는 개뿔, 별다른 스케줄 없이 쇼핑이나 다니는 사람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서진을 만나기 싫은 거다.
뭐,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서진은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아, 윤환이 형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
-윤환이?
“네,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가.
-신마백화점인데, 이쪽으로 올 수 있어?
“네, 지금 가면 될까요?”
서진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
잠시 후, 서진은 백화점 건너편의 커피숍에서 작은어머니를 만났다.
“백화점 라운지에서 보면 되는데, 왜······ 이런 곳에 오자는 거야?”
작은어머니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커피숍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거지 보듯 보고 있다.
그러다가 서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서진을 보는 작은어머니의 눈빛에 애정은 제로였다.
철저히 남을 보는 시선으로 쏘아보며 입을 연다.
“윤환이가 왜?”
이런저런 인사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거다.
서진도 바라는바, 작은어머니와 가식적인 인사말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서진은 조심스레 작은어머니를 바라봤다.
아니, 손바닥만 한 가방에 들어 있는 작은어머니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 친구들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애들이 꽤 있거든요. 윤환이 형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요.”
그때, 작은어머니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잠깐만.”
작은어머니가 휴대폰을 꺼내 패턴을 입력한다.
그리고 “스팸이네.”라고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린 후 서진을 향했다.
서진의 시선이 힐끗 휴대폰으로 향했다.
일단 가방에서 꺼내는 것은 성공이다.
“그런데? 윤환이가 뭐 어떻다는데?”
“······동거를 한대요.”
“······!”
거짓말은 아니다.
서진은 도광현을 통해 미국인을 섭외했고 김윤환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놈이 언제 한국에 들어와 발목을 잡으려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약점은 많을수록 좋은 거다.
그리고 예상대로 작은어머니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들에 대한 집착.
누군지 모를 여자와의 동거는 작은어머니의 분노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서진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세 살 연상이고요.”
“잠깐. 윤환이가 세 살 연상을 만난다고?”
“아, 네.”
“말해 봐.”
서진이 커피를 입에 댄 후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제가 묻고 싶어요. 사채시장······.”
“야! 지금 그게 문제야!”
작은어머니가 화를 내고 있을 때였다.
발렛 파킹 직원이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작은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벤츠 차주 분?”
“네?”
발렛 파킹 직원이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접촉 사고가 났거든요? 확인을 해보시는 게...”
“접촉 사고? 그게 무슨?”
“어떤 분이 주차를 하다가 범퍼를 살짝 박았어요. 심하지는 않은데요.”
작은어머니가 입술을 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김윤환이 동거를 한다는 말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런데, 접촉 사고라니.
백화점에서 만났으면 마음 편히 VIP 발렛파킹을 했을 텐데, 이런 거지 같은 곳은 주차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오자고 한 서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정말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작은어머니가 짜증 섞인 걸음으로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서진은 웃고 있었다.
작은어머니가 놓고 간 휴대폰을 본 거다.
“땡큐.”
접촉사고부터 모든 것은 서진의 계획이다.
만약 작은어머니가 휴대폰을 들고 갔다면 번거로운 작업이 몇 번 더 있었을 텐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서진은 곧장 휴대폰을 손에 들고 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들어온다.
패턴으로 잠긴 비밀번호.
그때, 서진의 옆에 선 경호원이 입을 열었다.
“N입니다.”
방금 작은어머니가 받은 스팸 메시지는 경호원이 보낸 것, 그것 역시 서진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가 메시지를 확인할 때, 경호원이 뒤에 서서 작은어머니가 패턴을 푸는 것을 지켜봤다.
“감사합니다.”
서진은 휴대폰의 잠금장치를 풀고 곧장 통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김윤환과 가족의 이름은 제외하고 다른 이름은 일일이 터치하며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이 중에 작은어머니와 통화한 상대가 있다.
*
차를 주차한 곳으로 향하던 작은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휴대폰을 놓고 왔다.
‘하······.’
김윤환의 동거 소식에 접촉 사고 그리고 휴대폰까지 놓고 왔다니.
거지 같은 상황이 연속되자 작은어머니의 눈에 짜증이 가득 섞였다.
“잠깐만요. 휴대폰을 놓고 와서.”
작은어머니가 발렛파킹 직원에게 말한 후 몸을 틀었다.
그리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다시 커피숍으로 향했다.
*
“검사님? 작은어머니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경호원의 다급한 목소리에 서진이 눈을 찌푸렸다.
아직 통화 목록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
지금을 놓치면 언제 또 휴대폰을 확인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잠깐만······ 막아 주세요. 부딪친다든지 뭐든 상관없으니까 3분만.”
“알겠습니다.”
경호원은 몸을 틀었다.
일단 대답은 했는데, 딱 봐도 드세 보이는 서진의 작은어머니를 3분이나 어떻게 막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작은어머니의 휴대폰이 부르르르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엄선주.
‘엄선주?’
작은어머니의 이름이 ‘엄시영’.
엄선주가 처가의 누군가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진흙탕 싸움은 할 생각이 없고. 장사는 계속해야지?
< 일단 하나.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