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하나. -(4) >
화면에 보이는 것은 골목, 상대는 CCTV가 잡히지 않는 곳에 교묘히 숨어 있다.
그것도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쓴 채 얼굴까지 가린 상태.
하지만 남자의 대답에 따라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다.
드디어 큰손이라는 이름의 사채업자와 연결되는 거다.
그런데 남자는 두려워했다.
“그, 그냥······ 길을 물어봤어요.”
사채업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들바들 떨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한다.
‘하······.’
서진이 남자의 점퍼를 확 열어젖힌 후 그 안에서 담뱃갑을 빼내 책상에 툭 던져뒀다.
남자의 눈이 부릅떠질 때, 서진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관님, 이 담뱃갑에 묻은 지문 좀 확인해 주세요.”
“네.”
수사관이 담뱃갑을 들었고 서진의 시선은 다시 남자에게 향했다.
“담배를 전해 준 사람, 지문이 나오면 금방 밝혀질 테니까 숨길 필요 없어요.”
“······.”
“좋아요. 그럼, 바꿔 물어보죠. 여자였습니까?”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가 일어났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다.
CCTV의 영상만으로 성별까지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진이 상대의 당황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 여자는 사채업자? 빌린 돈을 탕감해 줄 테니까, 제 차에 뛰어들라고 했나요?”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말한 적이 없는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압박감.
남자는 분위기에 휩쓸릴 것만 같았고 서진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순간 서진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쾅! 내리 찍었다.
“저기······ 지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그쪽은 혐의 없으니까 이만 가세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
“죽어요, 쟤들한테.”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진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검사를 노렸는데, 실패. 심지어 중앙지검까지 끌려왔다가 풀려난 사람.”
“······.”
“당신은 놈들에게 말하겠죠.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그럼 쟤들이 ‘아이고, 입이 무거운 분이네요.’ 하면서 믿어 줄까요?”
남자의 갈 곳 없는 눈동자가 계속해서 흔들릴 때, 서진이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만 죽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검사를 공격하려 한 놈들입니다.”
“······.”
“속지 마세요. 당신을 죽인 다음에 자식들에게 빚을 받아낼 겁니다. 상속 포기? 할 수 있겠죠. 그럼, 후순위 상속자를 찾아가 쥐어짤 겁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막대한 빚을 갖고 있을 경우 상속 포기를 한다.
하지만 상속을 포기했다 해서 빚의 구렁텅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직계비속, 존속, 형제, 자매 등 4촌 이내로 상속자가 이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형제 또는 삼촌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는 거다.
“죽어서도 원망받고 싶습니까?”
“그, 그······.”
남자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아직 용기가 없는지 열리지 않는다.
서진이 남자를 스치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한다면, 6개월 정도 구치소에 있게 만들어 주죠. 지금 그쪽한테는 구치소가 가장 안전한 곳인 것 같은데요.”
“······.”
“난 그쪽이 구치소에 있을 6개월 동안 저놈들을 다 잡을 자신 있고. 이제 그쪽의 선택이 남았네요. 생각할 시간은 3분 드리겠습니다.”
서진이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남자의 입은 생각보다 빨리 열렸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사, 사채업자 맞아요. 그런데 한국인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돈을 빌린 곳은 한국 사람이 사장이었는데요. 찾아온 여자는 외국인이었어요.”
“······외국인이요?”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다.
* * *
며칠 후 밤.
서진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
그리고 책장을 들어낸 채 낙서 같은 문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글자가 일그러진 것도 모자라 A, B, C 등 자신만이 설정해 둔 약어로 복잡하게 채워진 벽면.
하지만 서진은 그 문자들을 세세히 확인하며 혹시나 눈에 띄는 것이 있는지 살폈다.
이번에 차에 뛰어든 남자를 통해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새롭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자를 만나 차에 뛰어들라고 지시했던 여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지문은 등록되지 않은 상태.
즉, 밀입국한 외국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남자의 자백과 일련의 상황을 되짚어 봤을 때, 그녀의 뒤에 선 조직은 외국계 자본일 확률이 높아졌다.
그래서 다시 책장을 열고 벽면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는 중이다.
혹시 이전의 서진이 외국계 자본을 쑤시고 있었는지, 그게 맞는다면 왜 작은어머니의 이름이 벽에 적혀 있는지.
그 모든 수수깨끼를 풀어내면 진실이 보일 거다.
하지만 약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동생 진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어머니는 친정과 연을 끊었다고 했지?’
김영준 검사장은 처갓집과 등을 돌렸다.
이유를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아마도 앞으로의 행보에 사채 집안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정말 그 이유일까? 아니, 정말 연을 끊고 남처럼 살고 있을까? 혹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나? 그럼 그걸 김영준이 알고 있을까?’
서진이 입술을 쓸며 더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답은 없다.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작은아버지 도착하셨대.”
*
잠시 후, 응접실에는 부모님과 서진 그리고 김영준 검사장과 작은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족 모임, 하지만 빈 의자가 많다.
동생 진영은 김영준 검사장의 가족이 싫다며 야근을 선택했다.
그리고 김영준 검사장의 딸 김유미는 병원 일이 바쁘다는 핑계.
마지막으로 김윤환은 미국에서 생활하는 중이라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상황이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아니, 아버지와 김영준 검사장을 제외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와 작은어머니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없는 취급하고 있다.
서진은 긴장된 숨을 조용히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작은어머니가 보인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나쁜 놈을 만나며 얻은 느낌이 말하는데, 작은어머니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스테이크를 써는 칼을 들고 당장 자해를 하며 비명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 소름 끼쳤다.
김영준 검사장도 작은어머니의 상태를 아는지 힐끗힐끗 작은어머니의 행동을 살피고 있다.
그렇게 즐거워야 할 테이블에서는 장전된 총이 놓인 것처럼 서늘한 긴장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김영준 검사장만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 가는 중이다.
“올해는 담배 좀 끊어.”
“총장이 되면 그 기념으로 끊으려고.”
“가능성은 어때?”
“반반.”
“그런데 이번은 안 되는 게 좋지 않아?”
“왜?”
“박무혁 대통령 임기가 이제 몇 달 안 남았잖아. 새 정권이 들어오면 싹 갈리는 거 아니야?”
김영준 검사장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임기 채우는 총장이 몇이나 된다고. 나도 총장은 통과 지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어.”
“그래?”
“그리고 걱정하지 마. 떠나기 전에 서진이 길은 터 주고 갈 거니까.”
아버지가 슬쩍 웃으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거 고맙네.”
김영준 검사장도 와인 잔을 들어 아버지의 잔에 살짝 부딪쳤다.
그리고 와인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검찰 생활이라는 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적이 많아져.”
“알지. 너 예전에 집에 걸어 둔 자물쇠만 스무 개 정도 됐었나? 그때 생각하니까 우습네. 출소한 놈들이 보복한다고 우리 집까지 찾아왔잖아.”
아버지가 이해한다는 듯 말하자 김영준 검사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서진이, 얼마 전에 신무학 회장한테 끌려갈 뻔했어.”
“······!”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이고 조용히 식사를 하던 서진의 행동도 멈칫거렸다.
김영준 검사장이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서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영준 검사장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서진은 김영준 검사장이 입을 열기 전에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했다.
“얼마 전에 뉴스 나온 신일승이요. 그거 제가 구속시켰거든요. 그런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하지만 김영준 검사장은 멈추지 않았다.
빙긋이 웃으며 서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연다.
“내가 신무학 회장을 찾아가 거래했어. 압수 수색을 하지 않을 테니, 검찰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김영준 검사장이 신무학 회장과 거래한 것, 단순히 서진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김영준 검사장은 권력자의 모임에서 한 계파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계파에는 국회의원과 기관장 등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위에 계속 서 있으려면 단 한 번이라도 밀리면 안 된다.
권력은 파워 게임.
꼬리를 말고 고개 숙인 모습을 보이는 순간 썩은 냄새를 맡은 들개들이 이빨을 드러낸다.
강자로 있기 위해서는 강자로 남아야 한다.
이번 거래는 그 이미지를 지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김영준 검사장의 성격을 알고 있다.
이런 말을 꺼냈을 때는 원하는 게 있는 거다.
“총장이 되면 뭐 해 줄까? 원하는 것 말해. 형이 그 기념으로 뭐든 해 줄 테니까.”
그때 서진은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앞에서 느껴지는 살기, 작은어머니다.
‘설마······.’
아버지의 뭐든 해 준다는 말에 “회사를 윤환이한테 넘겨요!” 같은 헛소리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서진의 예상이 어긋났다.
“슬슬 백기호 의원을 치울 생각인데, 지금은 힘이 비등비등하네.”
“그래서?”
“형이 도와주면 저울이 기울어질 것 같아.”
아버지 역시 그동안 많은 인맥을 쌓아 왔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고위 공무원과 선이 닿아 있다.
김영준 검사장이 조용히 웃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형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야. 수도권 임대 아파트는 수형건설이 잡고 있는 거 알지? 수형건설 뒤에 백기호가 있어. 그놈을 치우면, 수도권은 재정이 먹을 거야.”
두 형제는 오랜만에 기쁘게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작은어머니는 예상과 달리 조용했다.
*
식사를 마친 후 서진은 방으로 돌아왔다.
어른들은 아직 응접실에서 와인을 주고받는 중이지만 계속 그 자리에 끼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복잡하네.’
서진은 책상에 앉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김영준 검사장이 백기호 의원을 쳐 내면 권력의 균형이 깨진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정건설을 생각하면 또 나쁜 일은 아니다.
‘임대 아파트를 신마건설에서 지을 일은 없고.’
이야기를 들은 김에 싹 빼돌려서 신마건설로 돌릴까 생각했지만 그들은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화시키는 중.
서민 중에서도 돈 있는 사람을 위한, 그들의 허영심을 채워 줄 브랜드에 집중하고 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작은어머니가 들어왔다.
작은어머니는 냉랭한 눈으로 책상에 앉은 서진을 바라보며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책 보고 있었어?”
“네.”
작은어머니의 시선이 책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책장은 원 상태다.
물론 벽에 적힌 글씨는 본다 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작은어머니가 책을 하나 꺼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그 순간 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품에 있는 게 아니라 책상 서랍에 넣어 둔 것.
꺼내서 확인하자 발신 번호는 신지연이다.
서진이 작은어머니에게 죄송하다는 표시를 한 후 휴대폰을 귀에 댔다.
“네, 김서진입니다.”
-부탁한 사람, 찾았는데.
서진은 그 외국 여자에 대한 정보를 신지연에게 부탁했다.
국정원과 경찰급이라 알려진 신마그룹의 정보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지금 만날 수 있어?
“네, 가겠습니다.”
서진이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작은어머니를 향했다.
“죄송한데요. 일이 생겨서요. 나중에 말씀하셔도 될까요?”
작은어머니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고개를 끄덕.
“가.”
서진이 재킷을 팔에 걸치고 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작은어머니가 서진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을게.”
“아, 네.”
서진의 옷깃을 쥔 작은어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너······ 사채업자를 수사한다고?”
“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서진의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 일단 하나.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