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지 못할 숙제. -(2)>
“사기꾼.”
남자의 목소리는 음침했다.
얼굴을 봤으면 좋겠지만 서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손에 든 가방뿐이다.
놈이 그 가방을 툭 내려뒀다.
그러자 쿵! 무거운 소리가 들린다.
그곳에 든 것은 갖가지 공구.
놈이 그곳에서 낫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김장 비닐 위.
한 여성이 벌거벗겨진 채 밧줄에 구속된 채 앉아 있다.
녹색 테이프로 입이 가려져 있으며 구타를 당했는지 시퍼런 멍 자국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웁! 우웁!”
남자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이제야 나를 봐줄 마음이 생겼나?”
“읍! 읍!”
“늦었어!”
남자는 손에 든 낫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퍽!
퍽!
퍽!
*
사이코 메트리가 끝났다.
서진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미친 새끼.’
검사라는 직업 때문에 잔인한 현장과 사진은 숱하게 봤고 익숙했다.
하지만 살인을 지켜보는 것은 역하다.
서진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낫과 김장 비닐.’
사이코 메트리를 통해 본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특정할만한 것은 없다.
모두 평범히 구할 수 있는 것.
서진의 시선이 남자가 나온 문으로 향했다.
오래된 문은 썩어 있다.
‘가보자.’
서진은 휴대폰 플래시에 의지한 채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방이 보인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그런지 섬뜩한 기운이 살갗을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하...”
서진은 긴장된 숨을 토해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더듬더듬 만져보며 사이코 메트리가 나오기를 바랐지만.
‘젠장.’
적막하기만 하다.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서진은 손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김장 비닐.
-공구와 낫.
-범인은 피해자를 사기꾼이라 불렀다.
-‘이제야 나를 봐줄 마음이 생겼나?’라는 말을 내뱉었다.
-면식범이라는 것.
-치정 또는 원한에 의한 살해.
서진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가는 문을 잡는 순간 세상은 다시 흑백으로 물들었다.
연이어진 두 번째 사이코 메트리.
서진이 인상을 찌푸릴 때.
*
어둠속에 살인범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바람을 펴? 내가 그동안 퍼다 준 돈이 얼만데?”
살인범이 장갑을 낀 손으로 깍지 끼며 우두득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부엌과 연결된 문으로 향한다.
“너 다음은 그놈이야. 지옥에서도 행복하나 보자. 개 같은 놈들.”
살인범은 흐느꼈다.
*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서진의 눈에는 살인범이 아니라 휴대폰 플래시에 흔들리는 문고리가 보였다.
‘연쇄 살인?’
서진이 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벌어졌는지, 진행 중인지 아니면 시작 전인지 모른다.
하지만 시작 전이라면 무조건 막아야 한다.
***
작년 12월, 약초꾼이 사용하던 폐가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유골의 주인은 이십 대 여성.
실종 신고가 된 지 2개월 만의 발견이다.
현장은 등산객 조차 드나들지 않는 산속.
당연히 CCTV는 존재하지 않았고 경찰청 과학 수사과가 샅샅이 뒤졌지만 지문 등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몇 개월 동안 이어진 수사는 사실상 종결되며 미제라는 이름으로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10월이요?”
“네.”
“그때면 김장 비닐을 많이 사갈 시기라 일일이 기억하기 어렵죠.”
“공구도 이것저것 샀을 것 같은데요. 낫이랑...”
“...없는 것 같은데요.”
현장을 다녀온 지 며칠 후.
그동안 서진은 틈만 나면 철물점을 찾았다.
“키가 크고 덩치 큰 남자, 기억 안 나세요?”
철물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서진은 한숨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섰다.
들고 있던 수첩에 엑스가 그어진다.
“이제 남은 곳은 두 군데.”
서진은 춘천에 있는 모든 철물점을 확인하고 있었다.
놈이 갖고 있던 것은 김장 비닐과 공구.
김장 비닐은 마트에서도 팔지만 놈은 대량의 공구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놈의 범행 수법을 봤을 때, CCTV가 존재하는 마트는 의도적으로 피했을 거다.
높은 확률로 철물점을 이용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도 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제 남은 철물점은 2곳.
‘그 안에 있어라.’
서진은 간절한 마음으로 차량에 올랐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동영 수사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국을 알아봤는데 그런 사건은 없었습니다.
서진은 이동영 수사관에게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는지 찾아 달라 부탁했다.
예고했던 대로 또 살인을 저질렀다면 수법은 같았을 거다.
“없다고요?”
-네.
하지만 비슷한 범행은 없다.
이유는 두 가지.
-아직 죽이지 않았던가.
-아직 발견되지 못했던가.
서진이 말을 이었다.
“그럼, 피해자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 그중에 실종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네, 그리고요?
“저장된 연락처 중에 남자만 따로 뽑아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이동영 수사관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살가운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바뀌는 중이다.
서진은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이제 다음 철물점으로 이동할 시간이다.
*
잠시 후, 서진은 마지막 철물점에 섰다.
현장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군부대 앞.
“실례합니다.”
서진은 다른 곳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작년 10월, 김장비닐과 공구를 사 간 사람이 있는지.
주인이 눈을 깜빡였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게 뭔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가.
“아, 기억나요. 우리 손님은 대부분 군인이고 여기 주민은 제가 다 알거든요. 그런데.”
그날,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김장비닐이랑 톱, 낫, 펜치, 또 뭐더라?”
“빨랫줄이랑 토치도 사 갔잖아.”
주인이 말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말을 거들었다.
서진과 주인의 시선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틀어졌다.
“여기, 장부.”
아내가 재고 관리를 위해 일일이 적어두던 장부를 흔들었다.
서진이 장부를 살폈다.
놈이 산 물건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현금으로 계산했지만.
“자세히 기억하시네요?”
“철물점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구석까지 찾아와서 바리바리 사가는 게 이상했어요. 그래서 기억해요.”
“혹시... 다시 보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주인의 아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놈의 발자국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 흔적을 쫓아 올라가면 언젠가 놈의 흉악한 얼굴과 마주하게 될 거다.
*
강원 지검.
사무실에 들어온 서진을 향해 이동영 수사관이 입을 열었다.
“실종신고는 없었습니다.”
살인범은 피해자와 연인이었던 사람을 죽이려 한다.
그런데, 실종신고가 없다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바삐 움직이면 두 번째 살인은 막을 수 있다.
이동영 수사관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와 얇은 파일철을 넘겼다.
“말씀하신 거요. 피해자 휴대폰에 저장된 남자의 인적 사항입니다.”
피해자와 살인범은 면식범이다.
그래서 이 안에 살인범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장된 연락처가 워낙 없기도 하지만 그중에 남자는 셋밖에 없었어요. 아버지하고 동생 그리고 보험회사 직원이요.”
“셋이요?”
“네.”
연인 관계, 남녀 문제의 사건을 보면 피해자의 휴대폰에 이성의 연락처가 가득해야 한다.
그런데, 셋.
그것도 아버지, 동생, 보험회사 직원이라니.
사건 꼬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서진은 파일철을 넘기며 보험회사 직원의 얼굴을 살폈다.
사진을 봤을 때, 사이코 메트리에서 봤던 놈과 매치되지는 않는다.
놈은 덩치가 컸지만 보험회사 직원은 마른 체형의 소유자다.
하지만 체크할 필요는 있다.
서진이 손가락으로 보험회사 직원의 얼굴을 톡 치며 입을 열었다.
“참고인으로 소환해 주세요.”
“네.”
그 말을 끝으로 서진은 철물점에서 가져온 장부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복도로 나서 부장검사실로 향하는데 누군가 서진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이명수 검사다.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어? 찾은 것은 있고?”
“그림자는 본 것 같습니다.”
“어?”
서진이 들고 있던 장부를 보였다.
이명수 검사가 깜짝 놀라며 장부를 받아들고 착착 넘겼다.
“...이거?”
-라텍스 장갑, 모자 그리고 비닐...
확실한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범인이 사 갔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깊은 물에 가라앉았던 사건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이다.
이명수 검사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급기야 크게 웃는다.
“크핫핫핫!”
서진이 스스로 깡치를 맡았다는 소식에 지검은 우려와 기대가 공존했다.
-연이어 미제를 해결했던 운 좋은 놈이 이번에는 뭘 보여줄까?
하지만 며칠이 지나며 기대는 사라지고 우려만 가득했다.
-아직 담당 형사도 안 만났대.
-정말? 기록도 제대로 안 본 거야? 그럼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현장 오가며 탐정 놀이하는 것 같은데.
-영화 찍어? 드라마야?
-그만 욕해라. 짬 없을 때 한 번씩 그러고 싶잖아.
-탐정 놀이도 사건 나름이지. 살인 사건에 저 지랄이라고? 아이고, 쪽팔리니까 어디 가서 우리 지검이라고 말 안 했으면 좋겠다.
서진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응이라 덤덤했다.
해결만 하면 그 비웃음이 바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수 검사는 달랐다.
괜히 성질이 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껏 잘해왔던 서진이 ‘이 한 번으로 삐끗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마저 하고 있었다.
서진은 어리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모를 나이다.
타인의 시선과 비난을 이겨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자칫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움츠러들 수도 있다.
그럼, 제멋대로 행동하며 사건을 해결하던 장점이 사라지는 거다.
그래서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네.”
“네?”
“됐어. 지세헌이한테 가봐. 좋아할 테니까.”
이명수 검사가 크게 웃으며 서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
지세헌 부장검사가 벌떡 일어섰다.
부릅뜬 눈으로 장부를 바라본다.
“...벌써?”
경찰이 몇 달 동안 두들겼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은 사건이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사건의 조각을 들고 왔다.
지세헌 부장검사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이 새끼...”
그동안 따가운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지세헌 부장검사다.
다른 부장검사들과 마주할 때마다.
-쪽팔리기 싫어서 이기적인 놈 한다더니, 진짜 이기적인 놈 되려고 그래? 막 들어온 새끼를 제물로 바쳐? 미친 새끼.
사건을 묻을 때, 특히 살인 사건일 때, 그 유가족에게 바쳐야 할 제물이 필요하다.
가족 앞에 서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 숙여야 할 사람.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그들이 토해내는 감정을 받아줘야 한다.
-제대로 수사한 거야!
-네 자식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아!
-우리가 높은 사람이었다면 전 경찰을 동원했겠지!
-계속해! 잡아 달라고! 수사를 멈추지 마. 제발...
물론 지세헌 부장검사는 서진을 제물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끌어안고 희생할 생각이었다.
성공하면 서진의 어깨에 올려주려 했고.
그런데 그 말을 다른 부장검사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온갖 욕을 다 처먹고 있었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지세헌 부장검사는 갑자기 서진이 예뻐 보였다.
“야, 이리와 크게 한번 안아줄게.”
“네?”
잠시 당황했던 서진이 정말 간절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죄송하지만 징그럽습니다.”
“새끼가... 해본 말이야. 나도 징그러워.”
지세헌 부장검사가 장부를 던져두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