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34화 (34/250)

<유치하게. -(7)>

***

‘...내가 미쳤지, 미쳤어.’

랜우드의 브레인 한상준.

취조실로 끌려온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한상준은 피해자들의 돈이 든 통장과 기타 잡다한 것을 들고 일본으로 밀항하려던 찰나였다.

꼬리가 밟힐 경우를 대비해 준비했던 도주로였고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감시하고 있던 수사관들이 몰려나왔다.

‘하... 내가 바보지.’

검사가 왔다 갔고 대표가 잡혀갔다.

그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마음이 초조했고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서진이 찾아와 수갑을 채울 것 같았다.

그래서 폭주했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젠장.’

한상준이 머리를 쥐어뜯을 때 ‘툭’ 테이블에 서류가 놓였다.

서진이 나타난 거다.

눈을 마주친 한상준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서진 때문에 모든 게 망쳤다.

서진만 없었다면 지금쯤 피해자들의 돈을 뿌리며 여자를 품고 있었을 거다.

서진이 한상준의 눈빛을 마주하며 몸을 기울였다.

“내가 퇴근 후에 할 일이 있거든? 그러니까 쉽게 가자.”

*

“임정택 수사관님?”

화장실 앞이었다.

임정택 수사관이 물기 묻은 손을 슥슥 닦고 있는데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틀자 MBS ‘세상을 본다’의 이하은 기자가 보인다.

화장실 앞에서 이하은 기자를 볼 확률은 제로.

깜짝 놀란 임정택 수사관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네. 제가 임정택입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이하은 기자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동영상 파일을 꾹 누르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배 타고 도망치려던 한상준을 잡았습니다!

“수백억의 돈을 들고 도망치는 범인을 현장에서 잡은 수사관님. 당연히 기억해야죠. 그런데 위험하지는 않으셨어요? 다친 곳은요? 어, 여기 긁힌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하하하.”

텔레비전에 나오는 예쁜 여자가 사근사근 웃으며 걱정해주는데 안 좋아할 남자 없다.

임정택은 멋쩍게 웃는데 이하은 기자가 한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지청장님께 인터뷰 허락도 받았거든요? 인터뷰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

“...그러니까, 다 김서진 검사님의 생각이었다고요?”

“네.”

“부장검사님이나 다른 검사님들의 계획이 아니고요?”

복도 끝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이하은 기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임정택 수사관을 바라봤다.

“수사관님, 지금 저 놀리는 거죠?”

임정택 수사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부 김 검사님의 계획입니다.”

“정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이하은 기자가 구깃구깃한 서류를 꺼내 착착착 펼쳤다.

“제가 받은 자료를 보면 김서진 검사님은 신임이라고 적혀 있거든요? 수습을 막 벗어났고...”

“맞아요. 신임이죠. 얼마 전까지 수습이었어요.”

“그런데 신임 검사 두 명에게 사건을 통째로 맡겼다고요? 이 타이밍에?”

70여 명의 피해자, 300억 대의 피해액, 그리고 한 명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피해자들의 분노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상황.

누군가 그들의 분노를 바늘로 툭 건드렸다면, 그리고 그 분노의 방향을 검찰과 경찰의 무능으로 틀었다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 구원 투수로 오른 것이 두 명의 신임 검사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이하은 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서진 검사님이요. 혹시 지청에서 버리는 카드였나요?”

“버리는 카드?”

“그런 것 있잖아요. 윗선에 미움을 받는다든지 그래서 제물로... 아니죠. 그렇다면 얼굴마담으로 인터뷰를 시켰을 리도 없었겠죠. 그럼, 뭐죠? 말이 안 되잖아요.”

큰 눈을 깜빡이며 미간을 찌푸리는 이하은 기자를 향해 임정택 수사관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가끔 그런 사람 있잖아요? 타고난 사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사람. 그게 김서진 검사예요.”

말을 마친 임정택 수사관이 웃으며 커피를 입에 댔다.

그리고 이하은 기자의 시선은 휴게실을 지나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임정택 수사관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자면 김서진 검사가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김서진?’

이하은은 기자라는 직업상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한다.

해서 거짓을 보고 진실을 가려낼 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진을 인터뷰할 때는 그저 잘 웃고 쾌활한 성격의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하은 기자의 생각이 어긋난 것 같다.

이하은 기자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매력 있네.’

***

한상준의 첫 번째 취조가 끝났다.

사무실에 들어온 서진을 향해 도민지 실무관이 물었다.

“입 안 열었죠?”

“네, 하루 만에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 안 해서 저도 슬슬 했어요.”

“그런데 내일부터 시끄러워지겠어요.”

“시끄러워지다니요?”

“다들 우리만 보고 있는 거 모르세요?”

“엥?”

내일까지 보지 않아도 된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모인 곳이면 이번 사건을 두고 수군거린다.

-이재승 부장 검사가 유치했지. 등신짓 하면서 형사 1부가 엿 먹은 거잖아? 맞지?

-어. 욕 안 먹으려고 신임에게 일 떠넘겼는데 그놈이 덜컥 해결한 거야.

-형사 4부는 축제겠어. 흐흐흐.

-신임이 걔지? 유아성 잡아낸 애.

-맞아. 걔가 위준상 의원도 찍어냈잖아.

-그래?

지청이 술렁이는 중이다.

사건을 해결한 게 새파란 신인 그것도 신분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놈.

그런 놈이 닳고 닳은 형사 1부 이재승 부장검사의 예상을 뒤엎은 거다.

이재승 부장 검사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형사 1부는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다.

재밌는 것은 지청의 분위기다.

처음에는 이재승 부장검사의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 ‘쌤통이네.’라고 낄낄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매 사건도 그놈이야.

-그것도? 말도 안 돼.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동남군에 처박힌 것도 쪽팔린데 후배한테 밟히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씨발, 열심히 해야겠네.

그동안 유배를 당해 게을리 지내던 검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꿈틀대기 시작했다.

*

‘슬슬...’

서진이 벽시계를 보며 자리를 정리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다.

그런데 임정택 수사관이 퇴근할 생각을 안 한다.

자연스레 야근 준비를 하고 있다.

도민지 실무관도 마찬가지다.

서류를 꺼내고 있다.

서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퇴근 안 하세요?”

임정택 수사관과 도민지 실무관이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퇴근이라니 무슨 말이에요?’라는 눈빛이다.

평소 제시간에 퇴근한 적 없는 블랙 기업의 사원들.

서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더 바빠질 테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죠.”

“...정말요?”

도민지 실무관이 눈을 깜빡였고 서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도민지 실무관의 표정이 불안하게 변했고 임정택 수사관이 다급히 물었다.

“오늘도 숨 막힐 정도로 바쁜데 내일은 더 바빠진다고요? 대체 내일 몇 시 퇴근을 예상하는 거죠?”

*

퇴근 후, 서진은 곧장 산을 올랐다.

공사 현장 그리고 그 안의 호두나무 서진은 삽을 들고 힘차게 땅을 팠다.

돈을 끄집어낸 후 자동차의 트렁크를 비롯해 빈자리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승용차라 한 번에 옮기기는 무리다.

몇 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차량 내부에 흙이 묻어 지저분해졌지만 상관없었다.

승용차, 그까짓 것 얼마나 한다고.

*

-84억 5천만 원.

거실에 수북이 쌓인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의 숫자였다.

윤기수 대표는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했고 그 돈을 호두나무 아래 숨겨뒀다.

사기꾼이 출소 후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돈이 서진의 손에 들어왔다.

살뜰히 써줄 생각이다.

서진의 목표는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 등등,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쥐는 것.

환생까지 한 마당에 그 정도 목표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눈앞에 생겼다.

“큭큭큭.”

돈이 눈앞에 있지만 머릿속을 차갑게 하려 했다.

그래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웃음이 새어 나온다.

결국.

“하하하!”

터져 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기쁨을 참지 않았다.

5만 원 한 다발, 정말 얇은데 500만 원이다.

두 다발이면 천만 원.

양손에 두껍게 쥐면 1억이다.

서진은 돈 위에 누워보고 하늘로 던져보기도 했다.

영화 속 일확천금을 얻은 주인공들이 하던 행동.

쏟아지는 현금을 맞는 것.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잠시 후 서진은 빙긋이 웃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지금은 84억.’

정말 많은 돈이지만 세상을 바꾸고 서진의 꿈을 이룰 만큼 많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

-동남군 일대의 야산이 많이 오를 것이라며 시세보다 비싼 값에 땅을 판 기획부동산 업자들이 검찰에 붙잡혔습니다. 동남 지청의 김서진 검사는 약 300억 원의 돈을 가로챈 혐의로 총책 51살 윤 모 씨 등 2명을 구속하고 18명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서진이 라디오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취조실에는 윤기수 대표의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서진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윤기수를 바라봤다.

“죽였지?”

“아닙니다. 안 죽였어요!”

윤기수가 거칠게 말했고 서진이 그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직원들이 조사를 받을 거야. 그런데 걔들이 입 다물고 있을 것 같아? 잘 못하면 같은 취급 받을 텐데? 자백하는 게 편할 거야. 그래야 판사 입에서 ‘깊은 반성을 하므로 감형한다.’라는 말이라도 듣지.”

“하...”

서진이 손목을 틀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서진이 윤기수 대표를 향해 메뉴판을 건넸다.

“골라. 설렁탕에 고기 추가해도 괜찮아.”

“...고기를 추가하라고요?”

“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켜. 내가 살게.”

부드러운 목소리에 윤기수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검사님, 이런다고 입 안 열어요.”

입 열라고 사주는 거 아니다.

84억 5천만 원에 대한 개평이다.

서진이 윤기수 대표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원하면 파전도 시켜.”

***

경기도 안산의 한 주말농장.

한 남자가 땅을 뒤집고 있었다.

모종을 심기 전 땅을 개간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남자의 머리는 덥수룩하고 옷은 다 해져있다.

얼굴은 깡 말러서 볼이 움푹 팼을 정도, 노숙자라 해도 믿을 것 같은 외형이다.

한참 땅을 뒤집던 남자가 숨을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뚜껑을 뜯는다.

안주는 준비해온 두부와 김치.

남자가 소주를 깡으로 마신 후 젓가락으로 두부와 김치를 쥘 때였다.

“도광현.”

도광현, 남자의 이름이다.

낯선 목소리에 도광현의 시선이 천천히 틀어졌다.

나타난 것은 서진이었다.

도광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진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 서진은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냐?”

“아, 검사.”

도광현이 눈을 부릅떴고 동시에 욕을 내뱉으며 소주병을 집어 던졌다.

“씨발!”

서진이 주춤하는 사이 이를 악물고 무조건 도망친다.

서진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야! 너 잡으러 온 거 아니야!”

-도광현. 31세.

-전과 1범.

-금융사기 및 돈세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