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하게. -(6)>
*
서진이 마지막으로 끄집어낸 것은 낚시 가방이었다.
거침없이 지퍼를 열자 세종대왕이 가득하다.
흙 묻은 손을 툭툭 털며 주변을 둘러봤다.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이곳저곳의 땅이 깊게 패 있고 20L 페인트 통 8개, 사과박스 5개 그리고 007 가방 4개가 보였다.
저 안에는 모두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이 들어있다.
지금 꺼낸 낚시가방까지 합치면 50억은 훌쩍 넘을 것 같다.
‘피해액인가?’
사기꾼들은 사기 친 돈을 꽁꽁 숨겨두는 습성이 있다.
형사나 민사가 들어와도 돈을 돌려주지 않기 위해서다.
즉, 이 돈은 이번 사건의 피해액일 가능성이 높다.
전체 피해액 300억 원에 비하면 극히 일부지만 땡전 하나 돌려받지 못하는 사건에 비하면 엄청 운이 좋은 거다.
서진은 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당장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판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먼 돈으로 취급되어 고위직 누군가가 꿀꺽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지금은 돈을 묻어두는 게 좋다.
‘다시 돈을 끄집어낼 시기는...’
서진이 돈을 꺼낼 시기는 3가지 조건이 모두 일치하는 상황이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사기라고 확정 될 때.
-피해자들에게 돈을 돌려주라는 명령이 내려올 때.
-이 돈이 자연스레 피해자의 손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
서진은 그때를 기약하며 페인트 통을 파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벌써 걱정되는 게 있다.
‘어떻게 찾았다고 해야지?’
여기는 공사 현장에서도 한참을 올라와야 한다.
게다가 등산로도 아니고 볼 것 없는 능선이다.
갑자기 이곳으로 올라와 돈 가방을 찾았다고 하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솔직하게 사이코메트리로 봤다고 말할까?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서진은 혼자 낄낄 웃으며 삽질을 이어갔다.
***
-커피?
다음 날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던 서진의 휴대폰에 이소희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서진이 ‘콜.’이라고 답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
“그런데 왜?”
이소희를 만난 것은 지청 앞 커피숍.
이소희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 인터뷰 있잖아?”
오늘 시사 프로그램 세상을 본다와 인터뷰가 계획되어 있다.
서진은 이소희에게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이소희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못 할 것 같아.”
“왜?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서진이 이소희에게 인터뷰를 넘긴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은 외모지상주의며 그녀는 예쁘다.
이 커피숍에서도 힐끗거리며 그녀를 보는 사람이 열 명은 넘는 것 같다.
그런데 방송까지 탄다면?
‘미녀 검사’, ‘우유빛깔 이소희’같은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얼굴마담을 원하는 검찰 고위 관계자에게 연락을 받을 수도 있고.
그래서 넘긴 거다.
“그런데 왜?”
“내가 카메라 울렁증이 있거든.”
“뭐?”
그럼 어제 거절을 해야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
서진이 이상하게 바라보자 이소희가 미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좀 해줘. 종일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못 하겠어. 부탁할게.”
서진은 이소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이소희는 지금 난처해하고 있다.
웃고 있지만 속은 힘들어하는 게 빤히 보인다.
그게 인터뷰 때문이라면 굳이 밀어붙일 필요 없다.
“그래, 내가 할게.”
“땡큐.”
이소희는 조용히 웃으며 스트로우를 입에 댔다.
그리고 잠시 후, 이소희가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드르륵.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서진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옮겨졌다.
발신 번호는 엄마.
휴대폰이 또 한 번 드르륵 울리더니 노랫소리가 나온다.
진동 후 벨이다.
계속 울리면 다른 테이블에 민폐다.
벨 소리를 줄이기 위해 이소희의 휴대폰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세상이 색을 잃었다.
*
-...원치 않으셔.
“엄마, 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내가 왜 숨어야 해?”
이소희는 창밖을 보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엄마가 미안해...
“하...”
이소희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안 할게. 됐어?”
-고마워, 소희야.
“분명히 말하지만 내 선택이야.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야.”
이소희가 분한 듯 아랫입술을 물었고 휴대폰 너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밥은? 먹었고?
“제발 그만, 잘 먹고 있다고. 몇 번을 말해.”
*
세상이 다시 색을 찾았다.
서진의 앞에는 벨 소리가 소거된 이소희의 휴대폰이 보였다.
“전화 왔어?”
어느새 이소희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서진에게 휴대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다.
휴대폰을 건네자 발신 번호를 확인 후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아 입을 연다.
“프레즐 먹을래?”
서진의 대답은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이소희의 손에는 이미 결제한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뭐야? 시키고 물어보는 게 어딨어?”
“안 먹는다고 하면 나 혼자 먹게.”
“혼자 먹겠다는 뜻이지?”
“내가 그렇게 못된 애는 아니거든. 먹을 것은 나눠 먹어야지.”
이소희는 빙긋이 웃으며 프레즐이 언제 나오는지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맥주랑 먹으면 맛있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서진은 다리를 외로 꼬며 물끄러미 이소희를 바라봤다.
지난번 그녀는 말했었다.
-동남군에 있는 거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 선택이야.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야.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는 ‘그 사람’이다.
서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안녕하세요? 세상을 본다의 이은하입니다.”
“김서진입니다.”
결국 서진이 인터뷰를 하게 됐다.
아마 이 인터뷰를 가장 기뻐할 것은 서진이나 이소희가 아니라.
‘아버지겠지.’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세상을 본다’와 인터뷰를 한다고 전화 드렸다.
그랬더니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마구 그리며 벌써 본방 사수는 물론이고 녹화까지 준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서진의 시선이 옆으로 틀어졌다.
이은하 기자가 보인다.
3년째 시사프로그램 세상을 본다의 메인 MC를 맡고 있으며 시원한 외모와 똑 부러지는 말솜씨 그리고 적극적인 취재로 인기가 꽤 많은 사람.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김서진 검사님이라면 최근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데 중심이었던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
“윤기수 대표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고 합니다.”
형사 1부 부장검사실.
들려온 말에 부장검사가 끌끌끌 웃었다.
형사 1부 부장검사의 이름은 이재승.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니까.”
이재승 부장검사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진이 윤기수 대표를 끌고 왔을 때만 해도 ‘설마?’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기수 대표는 입에 지퍼를 채운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담뱃재를 털며 입을 열었다.
“윤기수, 그놈이 닳고 닳았어. 검사 앞에서도 겁을 먹는 놈이 아니야. 그런데 48시간 안에 입을 연다고? 취조도 이소희였나? 그 귀엽게 생긴 애가 하고 있다며?”
“......”
“그리고 혹시나 사건을 해결해도 좋지. 우리가 다시 가져오면 되니까.”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형사 1부의 막내 검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부, 부장검사님!”
이재승 부장검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봤다.
“왜! 뭐!”
막내 검사가 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혀, 형사 4부가 미쳤습니다.”
“뭐?”
“세상을 본다, 그 이은하 기자 있잖습니까? 지금 지청에 와 있습니다!”
“알아듣게 좀 얘기해라! 형사 4부가 미친 것은 뭐고 이은하는 또 뭐야?”
“김서진 그놈이 이은하를 불러서 인터뷰했다고 합니다!”
이재승 부장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가!”
이제는 사건이 잘 되고 잘 안 되고의 문제를 떠났다.
최악의 경우 방송에 나갔는데 사건이 박살 나고 그래서 피해자가 울고불고 그러다가 한 명 죽으면?
세상은 분노할 테고 그 분노의 화살은 모두 검찰로 향할 거다.
‘씨발, 그거 내가 책임져야 하잖아!’
그 사건은 아직 형사 1부의 것이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
“뭐 하는 짓이야!”
형사 4부 김관용 부장검사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와 벼락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누가 인터뷰하래!”
소파에 앉아 서진과 대화를 나누던 김관용 부장검사의 시선이 이재승 부장검사를 향해 틀어졌다.
“대답 안 해!”
김관용 부장 검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선배지만 지금 이 태도는 선을 넘었다.
하지만 김관용 부장검사는 화를 꾹 참았다.
“지청장님 허락이 있었고 절차상 문제도...”
이재승 부장검사의 표정이 삐뚤어졌다.
“뭐? 절차상 문제가 없어?”
“없었습니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야.”
아무리 하늘 같은 부장검사라 하지만 대뜸 ‘야’라고 한다.
만만한 게 신임인 거다.
이재승 부장검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윤기수 그 새끼 긴급 체포했다고 했지? 현장을 덮친 것도 아니고 심증만으로 긴급체포한 거지? 지금이 쌍팔년도야!”
“......”
“그러다가 무죄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윤기수 그 새끼가 선량한 시민 범죄자 만들었다고 노발대발하면 어쩌려고? 그래놓고 절차를 지켰어? 방송국 전화해서 이 사건 방송하지 말라고 해. 어서!”
김관용 부장검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이재승 부장검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건 잘못되면 우리가 손 빼고 형사 1부가 뒤집어쓸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잘 아네? 네가 지금 하는 꼴 보면 나 엿 먹이려고 하는 거잖아! 어디서 거지 같은 애송이를 인터뷰? 긴급체포? 이 미친 새끼들!”
“그럼, 정식으로 주세요. 책임도 우리가 지고 욕도 제가 처먹을 테니까.”
두 부장검사의 분위기는 서릿발 같았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손에 든 서류를 테이블 위에 집어 던졌다.
“줬다. 새끼야.”
김관용 부장검사의 시선이 테이블로 기울어졌다.
서진이 서류를 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러자 김관용 부장검사가 서진에게 서류를 건네받고 사인을 슥슥했다.
이 사건이 정식으로 형사 4부로 넘어왔다는 거다.
“싸인 했습니다.”
김관용 부장검사의 눈빛에 이재승 부장검사가 치아를 빠득 갈았다.
“그래, 한번 해봐. 지금부터 내가 모든 절차를 확인할 거야. 어긋나는 게 있다면 정식으로 문제 삼을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 그리고 김서진? 어디서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못된 것만 배워서.”
그때, 문이 달칵 열리고.
“...왜 그러세요?”
이은하 기자가 들어왔다.
인터뷰를 마치고 차 한잔하자는 김관용 부장 검사의 말에 들른 거다.
그녀의 등장으로 이재승 부장검사의 욕설은 멎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서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순간 ‘지이이잉.’ 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김서진입니다.”
-임정택입니다.
서진이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임정택 수사관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지금 배 타고 도망치려던 한상준을 잡았습니다!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상준은 윤기수 대표의 브레인.
그가 잡혔다는 소식에 사무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해졌다.
하지만 각자의 표정은 다르다.
이재승 부장검사의 입술은 바짝 말랐고 김관용 부장검사는 상기되어 있다.
그리고 이은하 기자는 다급히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임정택 수사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악질이라고 해야 할지. 피해자 돈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어요. 대포 통장에 쪼개서 넣어뒀네요.
이은하 기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기도 해결됐고 피해액도 해결된 거다.
이제 살인에 대한 의혹만 해결하면 완벽하다.
방송에 나가면 드라마틱한 상황에 다들 깜짝 놀랄 게 분명하다.
동시에 이재승 부장검사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김관용 부장검사의 목소리는 더듬거렸다.
“도, 돈도 찾았다고?”
한상준을 궁지에 몰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사기꾼의 습성상 피해액이 해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다.
“대박.”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말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안에서 가장 놀란 것은 서진이다.
‘...그럼, 그 돈은 뭐야?’
진짜 눈먼 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