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럽게 -(1)>
*
“도망은 왜 쳐서...”
서진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도광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무릎을 만지며 끙끙대고 있었다.
도망치다 심하게 자빠져서다.
도광현이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오... 저 이제 흙 만지며 살고 있어요. 땀 흘려 상추도 키우고요. 배추도...”
“5평짜리 주말농장하면서 농부인 척 하지 마. 그분들한테 실례야.”
“어쨌든, 선량하게 사는 국민을 왜 찾아온 거예요?”
“선량? 그런 놈이 도망은 왜 쳐?”
“아니, 검사라고 하는 데 안 도망칠 사람 있어요?”
갑작스레 검사를 만나면 긴장은 할 수도 있지만 도망은 안친다.
서진이 손가락으로 편의점을 가리켰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커피나 한잔하자.”
*
“사기 설계사 도광현, 맞지?”
“손 씻었다고요! 이제 농부라고요. 농부!”
편의점 앞 파라솔이었다.
커피를 내려두는 서진을 보며 도광현이 억울한 눈빛을 보였다.
도광현, 금융 사기를 설계하고 돈을 받아먹는 전문가다.
그럴듯한 계획과 고수익을 보장하며 단기간에 수천억의 투자금을 손에 쥐는 폰지 사기.
사기 친 돈을 조세 피난처로 돌리며 세탁하기 등등.
그 모든 계획이 도광현의 머릿속에 있다.
그런데 도광현은 직접 사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법망을 피할 수 있도록 그 설계를 도와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받는 돈은 보통 1억에서 3억.
놈은 항상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있었기에 수사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꼬리를 잡고 감옥에 처넣었던 게 서진의 전생이었던 서준경 검사였다.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서진의 말에 도광현의 눈이 반짝였다.
서진이 그의 앞으로 담배를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의 선택지. 내가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는 것.”
“네?”
“네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넣고 있을 거야. 그러다 조금이라도 죄를 지으면 바로 전과 2범을 만드는 거지. 네 이름이 내 이력서에 경험치로 쓰이는 거야. 어때?”
도광현이 아랫입술을 잘근 물어뜯었다.
“그럼 두 번째는 뭐예요?”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돕는 거야.”
“...돕는다고요?”
“공짜는 아니야. 적절한 보수도 있을 테고 네 복수도 도와줄게.”
“...복수요?”
“어.”
도광현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돌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며 조금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뭘 안다고.”
알고 있다.
서진이 서준경이었을 때다.
도광현을 잡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었었다.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놈이 왜 사기꾼과 어울렸는지.
떵떵거리며 잘 살던 놈의 집안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원인은 무엇인지.
서진이 도광현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원인. 돈을 벌기 위해 똥통에서 뒹군 이유.”
“......”
“기업구조조정 전문 투자기업, 사모펀드 포이블.”
“......!”
도광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진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나도 그놈들이 마음에 안 들어. 없애고 싶고.”
“......”
“그런데 놈들과 싸우려면 돈이 필요해. 그걸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도광현이 서진의 눈빛을 피했다.
한숨을 내뱉으며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렇게 연기를 내뱉다가 눈동자만 움직여 서진을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서준경 검사님께 들었어.”
“검사님께요?”
“어.”
도광현이 감옥에 있을 때, 병에 걸린 그의 부모를 챙겨준 게 서준경이었다.
그리고 서준경은 장례를 치를 때도 같이 있었다.
도광현에게 서준경은 자신을 잡아 처넣은 사람이자 은인이었다.
도광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비밀로 해준다고 했으면서.”
“걱정하지 마. 나만 알고 있으니까. 나 역시 다른 곳에 떠벌릴 생각은 없고.”
서준경은 죽었다.
이제 서준경의 입에서 비밀이 퍼질 이유는 없다.
도광현이 테이블에 놓인 깡통에 담배를 비벼 끄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세 살 버릇 여든 가고 배운 게 도둑질이에요. 그런데 사기 설계 짜서 돈 받아먹던 놈을 믿을 수 있습니까?”
“안 믿어.”
“네?”
이럴 때는 빈말이라도 믿는다고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진은 당연하다는 듯 못 믿겠다고 말한다.
도광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을 때 서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믿는 놈하고는 이런 일 못 하지. 못 믿으니까 같이 하는 거지. 계속 감시할 수 있고 긴장할 수 있으니까.”
“씨발, 그 말이 더 무섭네요.”
도광현은 관찰하는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사기꾼, 도박꾼, 깡패와 거래하려면 사람을 파악하는 게 1번이다.
까딱하면 시체가 되어 바다에 버려질 수 있어서다.
그런데 서진의 눈빛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도광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작은 돈 세탁이죠?”
검사가 사기 치자고 찾아왔을 리는 없다.
어디서 눈먼 돈을 얻어 세탁하려 하는 게 분명하다.
몇 천만 원이라도 출처가 불분명한 돈이 통장으로 거래되면 조사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얼마입니까? 얼마를 베팅하려고 찾아온 거예요? 1억이나 5억, 그런 거면 그냥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현금으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84억.”
“84억이면... 엥? 84억이요?”
“어.”
“와, 이거 큰일 날 분이네!”
도광현은 놀란 눈을 껌뻑거렸다.
하지만 서진은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를 손에 쥐었다.
“세탁할 수 있겠어?”
*
“가장 쉬운 게 대포통장으로 쪼개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보이스 피싱 새끼들 때문에 통장 공급이 부족해졌죠.”
서진과 도광현은 다시 텃밭에 와 있었다.
도광현이 삽을 정리하며 대포통장에 관해 설명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몇 십만 원이면 살 수 있었어요. 노숙자나 급전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 팔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경찰의 단속 강화로 대포통장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이제는 하나당 500만 원에도 거래가 된다.
“84억을 냄새 없이 세탁하려면 필요한 통장이 적어도 1000개.”
그럼 통장 값만 50억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
서진이 손을 저었다.
“설명은 됐고. 방법만 말해.”
“일단 통장 10개만 구입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살게요. 통장이 열 개뿐이라 품삯은 좀 나오겠지만 자잘한 것 몇 개 사고팔면 되겠네요. 수수료가 10%쯤 나올 텐데, 그건 감안하셔야 해요.”
예술품은 탈세와 비자금의 목적으로 소장하고 판매되기도 한다.
“시체를 숨기려면 전장에 숨기고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
그러니까 돈을 세탁하려면 돈세탁의 장소로 가는 거다.
수천억이 움직이는 예술품의 거래 현장에서 몇 십억은 해변의 모래도 못 된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요.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좋아, 그렇게 해.”
“그다음은요?”
세탁을 한 후가 문제다.
서진은 도광현의 복수를 해준다고 했다.
상대는 몇 조원을 주무르는 사모펀드 포이블.
몇 십억으로 어떻게 할 문제가 아니다.
서진이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은 있어.”
*
주말농장의 주차장.
서진의 자동차 앞이었다.
서진은 다시 동남군으로 떠나야 한다.
“밑그림 그리면 연락드릴게요.”
서진은 말없이 백만 원을 꺼내 도광현에게 내밀었다.
도광현이 눈을 찌푸린다.
“이건 뭐예요? 설마 계약금으로 백? 저기, 검사님. 제가 이래봬도 꽤 비싼 놈이거든요?”
“이발 좀 해. 옷도 사 입고 밀린 공과금 있으면 정리하고. 아버지 좋아하시는 술 사서 찾아뵙고.”
“...네?”
“그럼, 나중에 보자.”
서진은 차에 올라탔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도광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서진의 말투가 꼭 서준경 검사 같았다.
도광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그가 감옥에 있을 때였다.
장례 절차를 위해 일시적으로 풀려나 장례식장에 찾아갔었고 그는 오열했었다.
그때 서준경 검사가 도광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었다.
-아버지 좋아하시는 술 사서 찾아뵙자.
그 목소리를 기억하며 도광현이 픽 웃었다.
“김서진이라고? 마음에 드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나보다 동생 아니야? 왜 계속 반말이야?”
***
-기획부동산 랜우드의 대표 윤 모 씨가 살인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다만 우발적이었을 뿐 절대 계획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중입니다. 동남 지청의 김서진 검사는...
며칠 후.
형사 1부 이재승 부장 검사의 안색이 어두웠다.
신임검사에게 사건을 떠넘겼다가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다.
어디를 가도 수군댄다.
-인간적으로 쪽팔리지 않겠냐?
-쥐구멍 있으면 찾아가서 얼굴 처박고 싶겠지. 흐흐흐.
그런데 이 수군거림이 하루 이틀로 사라질 것 같지 않다.
MBS 방송의 ‘세상을 본다’가 특별 2부작으로 편성되었고 거기서도 ‘김서진’이라는 이름이 쉬지 않고 이어질 게 뻔했다.
문제는.
-지청장님 지시 사항 : 검사 전체 회식.
장소 : 이모네 횟집.
시간 : 오늘 밤 오후 9시.
이모네 횟집은 대형 스크린을 자랑하는 곳.
그리고 오늘 밤 오후 9시면 ‘세상을 본다’가 하는 시간이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재승 부장검사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이재승 부장검사는 피가 말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회식을 보이콧하고 싶었지만 안 바쁘다.
‘미쳐 버리겠네.’
*
-혼자 칭찬 많이 받아라.
서진은 이소희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터진 사건으로 지청에 남아 있어야 했다.
“내가 네 몫까지 많이 먹을게.”
-사진 찍어줘. 대리 만족하게.
통화를 종료한 서진은 지난번 회식에서 먹지 못한 회를 이번에는 실컷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횟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횟집에 모인 동남 지청 검사들은 묘하게 흥분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메인 회가 나오기 전인데 벌써 밑반찬을 안주 삼아 꼴깍 꼴깍 소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다.
지금껏 유배지로 알려졌던 동남 지청이다.
그런데 시사 프로그램을 탔다.
그것도 시청률이 5~6%에 육박하는 ‘세상을 본다’.
라인을 타고 승승장구하는 동기에게 ‘거기 시끄럽다며?’라는 전화를 받은 검사도 있다.
뭔가가 바뀌고 있는 거다.
아마 이번 방송이 나간다면 동남 지청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누군가는 다시 서울로 갈 수도 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지청장이 들어왔다.
검사들이 모두 일어서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지청장이 손을 저었다.
“깡패 새끼들도 아니고 무슨 구십도 인사야? 됐어. 앉아.”
검사들이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두웠던 동남군의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지는 중이다.
지청장이 재킷을 벗으며 시선을 스크린으로 향했다.
“아직 시작 안 했지?”
김관용 부장 검사가 지청장의 재킷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입니다.”
지청장의 시선이 검사들에게 향했다.
무기력했던 검사들, 그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서진이 그 원인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서진을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또 시기한다.
그 모든 것이 좋은 변화다.
지금까지 그들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시간만 때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청장의 시선이 서진에게 향했다.
이명수 검사와 나란히 앉아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철없는 애송인데...’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지청장의 눈에 서진은 그 나이대의 아이들로 보일 뿐이다.
‘조만간 면담을 해봐야겠어.’
서진이 어떤 놈인지 기대를 하며 지청장이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지청장의 옆에 앉아 있던 형사 1부 이재승 부장검사가 중얼거렸다.
“...편집 더럽게 했으면 어떻게 하죠?”
“어?”
지청장을 비롯해 모든 부장검사의 시선이 이재승 부장검사에게 옮겨졌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악마의 편집이라거나 그런 것 있잖아요? 좋은 말만 했는데 병신 같이 나오고.”
“......”
“1, 2부로 편성한 거 보면 시청률 좀 뽑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이곳은 동남 지청이고 동네북이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거 몰라? 이재승 부장검사님 말도 일리가 있어.”
검사들이 소주잔을 내려뒀다.
일단 보면 알겠지만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방송국에 항의해야 한다.
그럼, 술을 처먹지 말고 최대한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지렁이도 꿈틀댄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이재승 부장검사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자극적인 내용이 필수기도하고. 기레기들이 하는 짓이 원래...”
그때였다.
“어마, 제가 정말 기레기도 아니고. 그런 장난 안 쳤어요.”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뜬금없이 이하은 기자가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모두가 눈을 깜빡일 때 그녀가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최대한 좋게 편집하려고 노력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하은 기자의 등장에 이재승 부장검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고 지청장이 슬쩍 말했다.
“내가 이 기자한테 시간 괜찮으면 같이 보자고 이야기했어. 흔쾌히 좋다고 하더라고.”
이재승 부장검사가 고개를 숙였다.
쪽팔렸다.
그렇게 이재승 부장검사가 엿을 먹은 순간, 이하은 기자는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고 그 시선이 구석에 앉아 있는 서진에게서 멎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김서진 검사님, 안녕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서진에게 주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