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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화 (2/206)

2화

“역시 넥서스의 승리는 모두 데베르 공작 덕분이야.”

아더는 흘러내린 제 금발 머리를 쓸어넘기며 싱글싱글대는 얼굴로 말을 던졌다. 리듬감 있는 그의 말과 함께 손에 들린 위스키가 가볍게 찰랑거렸다.

협탁에 긴 다리를 비스듬하게 꼬고 앉은 데베르의 모습은 제국의 군대장보다는 웨인에 두고 온 공작이란 지위가 더 어울렸다. 퍽 우아했고, 누군가 보기엔 아름다워 보일 법도 했다.

아더는 그런 데베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다가올 새벽, 공습을 앞둔 군대장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제된 모습이었다. 초조함이라곤 모르는 데베르의 태도는 잘 벼린 칼 같기도, 터지기 직전의 고요한 폭탄 같기도 했다.

“‘여명’만 끝나면 전부 끝이겠네. 이번 전쟁도.”

대답 없는 제 친구의 태도에도, 아더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둘의 대화가 이런 식인 건 아더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열다섯부터 전장을 함께 했는데 데베르의 성질 하나 모를 리가.

“돌아가면 또 영애들이 연회장에서 데베르 보겠다고 난리가 나겠네.”

“위스키.”

그제야 열린 데베르의 말문에 아더는 장난스레 고개를 저으며 위스키를 따랐다.

“이 정도로 승전을 이끌면 승리의 여신 니케 같은 게 별명이어야 하는데 말이지.”

넥서스에서 데베르의 클리프가를 모르는 이는 없다.

초대 황제와 함께 제국을 세운 개국공신이자, 끝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특유의 호전적인 기세에 막강한 부와 전쟁 공까지 더해져 혹자는 넥서스가 클리프가의 것이 아니냐는 불순한 농을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웨인’이란 수도명마저도 클리프가의 선조 이름이니.

늑대 새끼, 약쟁이, 전쟁 광증. 심지어 죽은 부친 카시우스의 망령이라 불리면서도 데베르의 이름이 천박해지지 않는 이유였다.

클리프는 넥서스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고, 데베르는 그 임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니까.

공포와 동경을 동시에 살 수 있는 자. 그 모순적인 남자가 바로 데베르 클리프였다.

“젊은 날을 흙바닥에서 뒹구는데, 내가 이번에 이쁜 별명 지어줄게.”

아더의 가벼운 농담에도 불구하고, 협탁 위엔 이내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물론 긴장에서 비롯된 침묵은 데베르의 몫은 아니었다. 최후의 전투인 공습을 앞두고, 전에 없는 초조함을 느끼는 아더의 것이었다.

“재밌는 거 얘기해줄까.”

그리고 그 질 낮은 감정을 숨기는 것 또한 아더의 몫이었고.

“전방 병원에 엄청 예쁜 간호사가 온대.”

매끈한 잔의 입구만 매만지던 데베르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실없는 소리란 뜻을 충분히 내포한, 다분히 건방진 표정이었다.

“진짜래. 호사가 알렌에게 들은 거라고. 진짜 흥미로운 건 여기부터야”

아더의 목소리가 정말 은밀한 얘기라도 할 듯 바짝 낮아졌다.

“그 여자 말을 못-”

“데베르 대장님……!”

급히 막사로 뛰쳐 든 병사 한 명이 아더의 말을 끊었다.

감히 황자의 말을 잡아먹냐는 우스갯소리를 하려던 아더의 입술이 병사의 파리한 안색을 보고는 딱딱하게 굳었다. 협탁 위에 위태롭게 걸쳐진 아더의 잔에선 식은땀 같은 물기가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병사의 말을 듣는 데베르의 표정은 꽤 기묘했다. 표정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번뜩이는 눈동자의 이채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눈빛이 다른 방향으로 비틀린 건,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병사의 보고를 들은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여명 작전지도를 넘기려던 첩자를 잡았는데, 하필 오늘 후방병원도 공습을 당했다는 거지?”

아더가 두 병사의 보고를 종합했다. 이번엔 제 친구가 아닌, 넥서스의 군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이.

“오늘은 쥐새끼 잡는 날이군.”

데베르의 감상평은 짧았다.

* * *

어둠을 내달리는 차 안에서 데베르는 생각에 잠겼다.

기다리던 거였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제 편을 다시 점검하는 건 늘 있는 일이니까. 아무리 숨어대도 때가 되면 꼬리가 밟히는 첩자를 잡아내기란 데베르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덫을 놓았고, 잡았다.

처음 막사에 들어온 정찰병이 보고했을 때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제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변수는 그다음. 그을음으로 엉망이 된 통신병이 들어왔을 때 생겨났다.

하필 작전을 앞둔 밤에 군 병원 공습이라.

데베르의 잿빛 눈동자가 밤기운을 담아 더욱 짙어졌다. 군 병원이 있는 곳은 데베르의 영역이었다. 감히 이곳까지 들어온 것을 적의 안타까운 오만이라 해야 할까, 치밀하게 계획된 덫이라 봐야 할까.

덫을 놓았던 데베르는 이젠 제 발밑에 덫이 있는지를 의심해야 했다.

“멈춰.”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지나, 막 숲길에 들어선 차가 멈춰 섰다. 후방 병원으로 이어지는 길의 본격적인 시작 지점이기도 했다.

“라이트 꺼.”

잽싸게 명령을 받아든 운전병의 어깨가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힐긋 바라본 군대장은 심연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보인다고. 그에 맞춰 운전병 또한 눈을 부라려봤지만, 짐승의 아귀처럼 뻗어진 길 어귀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서는 데베르의 군화가 소리 없이 낙엽을 밟았다. 뒤따라 내린 아더와 몇 호위 병사의 발걸음은 데베르의 손짓 한 번에 멈춰졌다.

데베르는 사냥감을 주시하는 짐승처럼 느릿하게 어둠으로 들어갔다.

늘어선 나무들이 서로 머리를 얽은 채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길은, 찾는 자에게도 숨는 자에게도 좋은 은신처였다.

홀로 들어선 건 본능이었다. 이 고요를 틈타 숨은 것들을 찾아내는 데베르의 본능. 그런 것들을 잡아낼 땐 소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기민한 것들이 도망치지 못하게끔, 철저히 홀로 있다고 믿게끔 숨소리마저 죽이고 다가가야 한다.

“윽. 아파……. 살려줘. 제발.”

그래야 이런 것들을 잡아낼 테니까.

한참을 걸어 들어간 데베르의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데베르는 당장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짐승이 되기보단 연극의 관객이 되기로 했다. 더 완벽한 관람을 위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달빛도 한 걸음 물러선 그의 그림자를 잡아채지는 못했다.

“살, 살려주세요……. 헉, 헉…….”

숨넘어가게 살려달라 읊조리는 부상병의 가슴팍은 이미 피로 척척했다. 시퍼렇게 질린 안색이며, 쿨럭거릴 때마다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피까지. 한 시간이나 더 살려나. 데베르는 의미 없는 셈을 했다.

봐줄 만한 건 데베르에게 등을 돌린 채, 뭐라도 해 보겠다는 듯 허둥대는 나머지 병사 한 명이었다.

한눈에 봐도 한참 품이 큰 군복을 입은 병사 하나가 정신없이 제 주머니를 뒤져댔다. 그 속에서 튀어나온 붕대며 약품 따위가 정신 사납게 낙엽 위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주사기 한 대까지.

어설프게 헤매던 처음의 손짓과 달리, 진통제를 흔든 뒤 주워든 주사기를 꽂는 거 하며, 지혈대 대신 부상병의 혁대를 풀어 팔에 감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넥서스에선 의무병이 불법인데도 말이다.

그 사이, 얄궂은 달빛이 다시금 데베르의 그림자를 물고 늘어졌다.

“헉, 으윽…….”

부상병의 퍼런 입술이 별안간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기어보겠다고 굳은 팔다리를 휘젓는 통에 기껏 꽂아놓은 주사기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데도,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허우적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데… 데베르……!”

주사기의 바늘을 따라 삐뚜름하게 기울여졌던 데베르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왔다.

“코바흐군이군.”

연극은 끝났다.

관객석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를 따라 총구가 반짝였다.

길 너머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통신병은 병원장이 적군과 내통했을 것이라 전했다. 병원엔 여분의 군복이 늘 있고, 그걸 넘겨줬을 것이고, 아군의 군복을 입고 있는 이상 넥서스의 국경선을 넘기도 수월했을 것이라고.

“제, 제발. 살려-”

이토록 진부해서야.

마지막 애원이 끝나기도 전에 장전이 끝난 데베르의 방아쇠가 먼저 당겨졌다.

홀가분하게 돌아선 데베르의 말끔한 군화 코가 이번엔 좀 더 흥미로운 쪽으로 향했다. 떠는 법도 잊었는지, 멍하니 그를 올려보기만 하는 가련한 사냥감에게로.

덮어쓴 군모 밑으로 드러난 얄팍하고 허연 턱은 한눈에 봐도 코바흐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넥서스군이라는 건데. 적군을 살리는 아군이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는 전개에 데베르는 헛웃음을 뱉었다.

데베르는 병사의 무르팍에 떨어진 주사기를 천천히 주워들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혔음에도 불구하고 왜소한 병사는 데베르와 시선이 맞지 않았다. 군모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데베르에게 보이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소속.”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데베르는 조금의 인내를 더 갖추기로 했다. 어쨌건 저 길 너머의 상황을 아는 유일한 자이고, 제법 괜찮은 대답을 들려줄 것 같았으니까.

“저 길에서 올 수 있는 자는 두 부류야. 아군이거나,”

생긴 것만큼이나 곧게 뻗은 데베르의 손가락이 뒤의 시체를 가리켰다.

“아군인 척하는 적군이거나.”

데베르의 손이 천천히 병사의 턱을 감쌌다. 열릴 생각이 없는 입술이 데베르의 거친 엄지를 따라 꼴사납게 짓뭉개졌다.

“넌 어느 쪽이지.”

바르르 떠는 턱을 쥔 데베르의 손아귀 힘이 억세졌다. 덩달아 입술을 겉돌던 굵은 손가락이 그대로 병사의 잇새를 벌렸다. 차가운 밤공기와 대조되는 눅눅한 온기가 가감 없이 전해졌다.

딱 이 열기만큼 겁을 먹었을 테지.

“말해.”

목구멍까지 집어삼킬 듯 우악스럽게 입안을 헤집는 손길에도 병사에게선 비명 하나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밭은 숨이, 적어도 병사가 시체는 아니란 걸 말해줬다.

주사기를 집어 던진 데베르의 손이 병사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병사는 남아도는 군복 탓에 그물에 걸린 것 같은 꼴이었다. 우악스럽게도 끌고 가는 데베르의 시선은 달빛을 온전히 받은 아름드리나무에 고정돼 있었다.

버둥거리는 병사를 나무 밑동으로 집어 던지자, 악소리 하나 없이 바닥을 기며 숨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데베르를 더욱 여유 없게 만든다는 걸 알긴 할까.

데베르는 손자국이 남은 병사의 멱살을 다시금 올려붙였다. 나무에 등을 기대 세워 들어 올리자, 바르작거리는 병사의 발이 나무에 탁탁 부딪혔다. 숨이 막히는지 꽉 감긴 두 눈은 떠질 기미가 안 보였다.

“눈 떠.”

병사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늘진 모자 탓에. 병사의 눈은 본래보다 어두워 보였다.

“말해.”

그와 마주한 데베르의 잿빛 눈동자가 짐승의 안광처럼 번뜩였다.

그 순간, 매서운 바람이 고요한 숲을 세차게 흔들었다. 끝을 모르고 뻗어있는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음산한 소리를 냈고, 흐트러짐 없던 데베르의 머리칼 또한 바람과 함께 휘날렸다.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넥서스의 밤을 ‘비밀의 밤’이라 불렀다. 거세게 부는 바람 소리에 비밀을 감추기 좋다 해서.

하지만 때론 감추기엔 지나치게 달콤한 게 있는 법이다. 가령.

“너, 누구야.”

흑단처럼 쏟아지는 비밀에 실려 오는 낯선 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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